그렇고 그런 시간을 지나며

2021.01.22 17:41

어디로갈까 조회 수:1020

1. 며칠 도로에 쌓여있던 눈이 이제 다 녹았네요. '눈은 녹는 것이다'는 어느 시인의 구절을 처음 접했을때 별 말 아닌데 이상하게 심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표현이 아름다움을 희망하는 우리의 잔인한 무관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무튼 형체의 부분 부분이 증발돼 어떤 소음도 부산물도 없이 하늘로 사라져버린 존재론적인 실종의 광경이 곱디 곱습니다. 싸늘, 단단했던 얼음에서 부드러운 물로. 드디어는 증기로 힘이 빠져버리는 변화의 과정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구나 낯설게 감탄 중이에요.
얼음이 고요하게 물로 바뀌어 사라져버린다는 것. 우리가 계속 주시하지 못하는 그 과정 속에 얼음이 내지르는 비명이 감춰져 있을 텐데, 뒤늦게 상상으로 이렇게 듣고 있습니다.

2. 오늘  동료 dpf가 단어 하나의 뜻을 물었어요. '도모지'가 뭐냐고. 구글링의 대가인 그가 그걸 검색 안 해봤을 리가 없죠.  
" 도모지 塗貌紙는 조선 시대에 행했던 사형 방식이고, 집안의 윤리를 어긴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행했으며, 처형하려는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을 묶고 얼굴에 물을 묻힌 종이를 겹겹이 바르는 형식이다. 몇 겹씩 얼굴에 단단히 쌓아올린 종이가 코와 입에 달라붙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사람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면서 질식사하는 것이며 천주교 박해에 쓰였다"고 시들, 건성 답하니 씨익~ 웃더군요.  
이 친구 요즘 보면 뒤늦게 사춘기 과정 중인가 싶어요. 한달 전쯤부터 제게 " 더 나이 들면 우리 지리산에 가서 흑염소나 키우고 살자~"라는 꼬시레기 말을 해대는데 이게 분명 어디서 배운 표현일 거거든요. 저는 TV가 없어서 모르는데 어느 방송이나 언론에서 회자되는 말인지 아는 분들 계시면... 

3. 내일부터 겨울 휴가입니다. 작년에는 랭보의 고향에 가서 고요하고 충만한 시간을 즐겼는데 올해는 갈 곳도 할 일도 없네요.  세상 신경 안 쓰고 제 마음이나 다듬으면 되겠지만 심심하기는 할 테죠.  매일 4km 정도 걸어볼 거고요, 중단했던 라틴어 공부를 계속할 작정입니다.
왜 이런 예감이 드는지 모르겠는데,  까마득한 시간을 살았구나 싶은게 어쩐지 제 삶의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아요.  날씨 탓일까요.  - -:
빈 들/. 청야淸野/ empty field 라는 단어가 뇌리에서 맴맴돕니다.  '절대적인 것은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한성과 불완전성이 비어 있는 것이다.'라는 어느 현자의 말과 함께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3495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273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3143
114952 만국의 해외동포들이여 단결...은 아니고 영화를 보자! - 미나리 [12] 애니하우 2021.02.25 1057
114951 고양이 참치캔 기부 하고 왔어요 ! [4] 미미마우스 2021.02.25 410
114950 가상얼굴 유튜버 [2] 메피스토 2021.02.24 655
114949 선셋 대로 [12] daviddain 2021.02.24 634
114948 보스와 반나절을 보내고 [2] 어디로갈까 2021.02.24 776
114947 열심히 사는 일상 여은성 2021.02.24 392
114946 아침에 다들 어떻게 잠 깨시나요 ? [11] 미미마우스 2021.02.24 853
114945 길고 길었던 연휴가 끝나갑니다 [15] soboo 2021.02.24 916
114944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6] 조성용 2021.02.24 967
114943 스타워즈: 에피소드 2 - 클론의 습격 (2002) [5] catgotmy 2021.02.23 420
114942 흑인배우가 백인 역할을 맡을 때 - 브리저튼의 경우 [34] Bigcat 2021.02.23 3218
114941 이런저런 호텔 잡담... [1] 여은성 2021.02.23 506
114940 나한테는 당연해도 남에게는 상식이 아닌 경우와 조화이루기 [2] 예상수 2021.02.23 632
114939 영탁이 팬이 됐어요 [6] 가끔영화 2021.02.23 574
114938 [펌] 추신수, 전격 한국 복귀... 신세계 유니폼 입는다 [2] 영화처럼 2021.02.23 564
114937 싸이코지만 괜찮아 보신분?! [6] 미미마우스 2021.02.23 585
114936 [주간안철수] AZ백신 1호로 주세요. 친박 안철수 [14] 가라 2021.02.23 843
114935 (바낭) 세상살이의 어려움 [9] 러브귤 2021.02.23 805
114934 완다 비젼을 기대하며. [5] 분홍돼지 2021.02.23 558
114933 [EBS1 다큐프라임] 곤충, 전략의 귀재들 [EBS2 클래스e]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7] underground 2021.02.22 55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