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듀게에 자주 글을 올리네요. 블로그나 공개된 페이스북 등의 공간이 없으니 제맘대로 듀게를 블로그 삼아 이것저것 올리게 됩니다. 이번에는 심지어 '숙제'인데요,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야간 인문학과정 강좌의 숙제로 제출한 감상문 같은 것입니다. 학문적인 글이 아닌 소박한 감상문이라 각주등도 없습니다. 듀게분들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리라 믿고 너무 길지만  올려봅니다.    

 

네루다가 날 찾아왔다

   

1. 서(序)

그래 그 무렵이었다. 네루다가 날 찾아왔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허물을 벗으며 그 동안 어른들과 학교가 알려주던 세상의 뒷모습에 욕지기를 느끼며 분노하던 시절, 네루다는 김남주라는 시인을 통해 그 이름을 전해 듣는 먼 나라의 위대한 혁명가였다. 체 게바라, 마오쩌뚱 같은 존재였다. 그의 이름은 들어도 그의 시는 별로 읽지 못했다. 그는 위인으로 박제된 시인이었다.

 

이제 그 시절로부터 사반세기가 흘러 어느새 세속에 찌든 중년이 되었다. 네루다가 다시 날 찾아왔다. 모교의 강의실에서 이른 봄 저녁에 들은 단 한 구절이 나를 감전시켰다.

 

난 봄이 벚나무와 하는 행위를

너와 하고 싶다

-'매일 너는 논다' 중에서

 

갓 스물의 젊은이가 어떻게 이 짧은 몇 마디의 언어로 대자연의 섭리와 에로스를 넉넉히 품어낼 수 있는 것일까. 경탄하고, 매혹되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나에겐 사족이었다. 어떤 삶을 살면 이런 시를 쓸 수 있게 되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네루다의 자서전을 읽었다. 그의 시집들을 읽었다. 망명기의 그를 다룬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도 보았다. 남의 해석에 갇히고 싶지 않아서 그에 대한 평론은 읽지 않았다.

 

그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고 뒤엉켜 있지만, 지금의 내가 그에게 매혹되는 이유들을 써 보고 싶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내가’ 그에게 매혹되는 이유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2.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소년

 

나는 보로아의 자연에 흠뻑 빠져들었다. 새, 풍뎅이, 메추리 알을 보고는 넋을 잃었다. 그런 깊은 골짜기에서 엽총 총신처럼 까맣고 반들거리는 곤충을 발견하다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곤충의 완벽한 모습 앞에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뱀 어미’란 칠레에서 가장 큰 곤충으로 껍질이 딱딱하고 검은색 윤기가 흐르는 대형 딱정벌레인데 너무 터무니 없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 자서전 중에서

 

소년 시절 그는 칠레의 원시림과 그 속 생명들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자서전 첫머리에 그는 ‘칠레의 숲 속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그 땅에서, 그 흙에서, 그 침묵에서 태어나 세계를 누비며 노래했다.’라고 선언한다.

그 매혹은 평생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평생 세계를 떠도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5대양의 조개껍데기를 수집했다. 파리의 자연사 전문점과 벼룩시장에서, 베이징 박물관에서 그는 대추고동, 긴뿔고동, 가시뿔국화조개, 나선식계단조개를 발견하고는 큰 딱정벌레를 잡은 소년처럼 기뻐했다. 그리고 태평양의 섬과 바다생물에 대해 ‘광대한 대양’이라는 스물 네 편의 시를 쓰기까지 했다.

 

바다가재가 그 금빛 다리로 짜고 있는 게 뭐냐고 당신은 나한테 물었고

나는 대답한다. 바다가 그걸 알 거라고.

우렁쉥이가 그 투명한 방울 속에서 무얼 기다리고 있느냐고

당신은 말한다. 그건 뭘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말한다. 그건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고, 당신처럼.(후략)

- ‘수수께끼’ 중에서

 

그가 자연에 매혹되었다는 것은 단지 풍경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다는 것이 아니다. 숲 속의 풍뎅이, 메추리 알, 딱정벌레가 장난감이던 아이에게 생명이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경이였다. 약동하는 생명력으로 가득 찬 대지에서 태어나 자란 유년기의 경험은 평생 시인의 내면에 호기심에 가득 찬 소년을 남겨 놓았다. 그래서 절망적인 시대의 아픔 속에서도 그의 시에는 좌절과 냉소가 아닌 희망과 낙관이 있다. 인간이 만든 어떤 죽음의 시대에도 대자연의 눈으로 보면 무수한 생명이라는 기적이 태어나고 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3. 여체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다

 

한 여자의 육체

- 정현종 역(譯)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고,

밤은 그 강력한 침입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내 화살의 활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벼렸다.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벗은 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방심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치골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우아함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내 끝없는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

그리고 피로가 따르며 가없는 아픔이 흐른다.

 

소년을 갓 벗어난 청년의 첫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이처럼 여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탄과 매혹으로 가득하다. 그의 시에는 성에 대한 금기나 보수적인 윤리의식에 따른 주저함이 없다. 숲 속에서 검은색 윤기가 흐르는 딱정벌레를 발견하고 경탄하는 아이처럼 그는 이성의 육체가 갖는 신비와 아름다움을 거침 없이 솔직하게 찬탄한다. 대자연은 부끄러워 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기억을 꼼꼼히 기록한 것이 아니라 노년의 그에게 생생하게 남아 있는 순간들을 듬성듬성 기록한 그의 자서전은 당혹스러울 만큼 구체적으로 묘사한 성애의 기록으로 가득하다.

 

불쑥 손이 튀어나왔다. 크고 거칠었지만 분명 여자의 손이었다. 그 여자는 내 이마와 눈과 얼굴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탐욕스런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쳤다. 여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으로 나를 짓눌렀다. 두려움은 점차 강렬한 쾌감으로 바뀌어 갔다. 나는 땋은 머리와 매끈한 이마와 양귀비꽃처럼 부드러운 눈까풀을 쓰다듬었다. 이어 풍만하고 탄탄한 젖가슴, 둥근 엉덩이, 나를 휘감은 허벅지를 더듬어 보고, 산속 이끼처럼 촉촉한 사타구니에 손가락을 파묻었다. 그 여자 입에서는 신음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불과 10대 중반의 나이에 겪은 첫 경험의 기억이다. 밀 타작 행사로 들렀던 농장의 탈곡장 밀짚 위, 깊은 밤의 어둠 속에서 농장 주인의 아내가 대담하게도 소년인 그를 탐한 것이다.

마리아 안토니에타와 결혼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근무하던 서른 살 시절의 기억 역시 변함 없이 거침 없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함께 백만장자의 만찬에 초대받은 그는 위대한 로르카를 보초 삼아 처음 만난 여류 시인과 ‘아프로디테에게 드리는 의식’에 몰두한다.

 

우리는 천천히 탑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로 올라갔다. 전망대에 올라간 우리 세 시인들. 각자 상이한 스타일의 시인들은 세상과 유리되었다. 아래쪽에서는 수영장의 푸른 눈이 반짝이고, 저 멀리 만찬장에서 기타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머리 바로 위에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심연에 머리를 담그고 있는 듯했다.

나는 키 큰 금발의 여류 시인을 끌어안고 키스했다. 육감적이고 탄탄한 몸매, 나무랄 데 없이 성숙한 여인이었다. 로르카야 놀라든 말든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망대 바닥에 몸을 눕혔다. 그녀의 옷을 벗기고 있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던지 로르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얼른 꺼져! 아무도 못 올라오게 해!”

 

죽음이 머지 않은 노년기의 위대한 민중시인이자 혁명가인 그가 쓴 자서전에는 체 게바라, 카스트로, 자와할랄 네루, 마오쩌뚱과의 만남보다 세계 곳곳에서의 이름 모를 여인들과의 하룻밤의 정염의 기록이 더 상세하고 생생하다. 그 이유는 자서전 서문에서 읽을 수 있다.

 

회고록을 쓰는 사람의 회상과 시인의 회상은 다르다. 회고록을 쓰는 사람은 치열한 삶보다는 생생한 삶을 그리려 하기 때문에 지난 일을 상세하게 재현한다. 반면 시인은 자기 시대의 불꽃과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환영들을 보여 준다.

 

그렇다.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노시인에게 있어 여인의 육체에 대한 매혹과 경탄, 성(性)이라는 신비가 주는 환희는 대자연에 대한 사랑, 민중에 대한 사랑, 조국에대한 사랑보다 어쩌면 더 생생한 환영들인 것이다. 그것은 머리와 가슴으로 체득한 것들 이전에 존재하는, 수컷 동물 유전자에 아로 새겨진 본능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굳이 세상에 숨기려 들지 않는다.

 

4. 사랑의 대상을 확장시켜 가다.

 

모두들 알다시피 그의 사랑의 대상은 자연과 생명, 여인의 육체에서 출발하여 고통받는 민중, 스페인 침략자의 학살로 출발한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사소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우주적으로 확대되어 간다. ‘지상의 거처’를 쓴 극동에서의 절망적인 고독과 관념적인 비관을 넘어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통한 시대적 전망의 획득, 타인들과의 연대의식 발견이 비로소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위대한’ 민중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만들어 가고, 양말, 양파, 수박, 소금을 장중하게 기리는 ‘단순한 것들을 기리는 노래’에까지 이르게 한다. 이 과정은 영웅 설화와도 같이 전형적인 것이어서 후대 평론가들이 무수히 반복하여 이야기할 것 같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그다지 상세하게 언급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 시 하나만은 읽고 가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커다란 기쁨(발췌)

- 김현균 역(譯)

 

나는 쓴다, 물과 달을, 변치 않는 질서의

요소들을, 학교를, 빵과 포도주를,

기타와 연장을 필요로 하는 소박한 사람들을 위해 쓴다.

 

나는 민중을 위해 쓴다, 설령 그들의

투박한 눈이 나의 시를 읽을 수 없을지라도,

언젠가 내 시의 한 구절이, 내 삶을 휘저었던 대기가,

그들의 귓가에 닿을 날이 오리라,

그러면 농부들은 눈을 들 것이다.

 

광부는 웃음 띤 얼굴로 바위를 깨고,

제동수(制動手는) 이마의 땀을 닦고,

어부는 팔딱거리며 그의 손을 불태우는 물고기의

반짝거림을 더욱 선명하게 보게 될 것이고,

갓 씻은 깨끗한 몸에 비누 향기 가득한

기계공은 나의 시를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말할 것이다. “그는 동지였다”고.

 

그것으로 충분하며, 그것이 내가 바라는 월계관이다.

 

 

5. 모순 덩어리의 삶

 

그가 사랑한 세상이 실은 모순 덩어리이듯 위대한 시인의 삶도 모순 덩어리였다. 수줍고 내성적인 소년이었다고 여러 차례 스스로를 회고하지만 그는 페르귄트처럼 일찍부터 넓은 세상을 떠돌며 대담한 모험과 연애를 반복했다.

 

그는 마추픽추 산정에 서서 자신은 잔인한 스페인 정복자들로부터 학살당한 인디오들의 후예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하지만, 버마, 인도, 실론에서 그는 철저히 고립된 백인 정복자일 뿐이었다. 주변에 인간들이 가득했지만 그에게는 소통 불가능한 동물이나 다름 없었다. 그의 친구는 오히려 키우던 몽구스였다. 자서전을 보면 몽구스에게는 이름이 있지만 이 시기의 기억에 등장하는 아시아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가 비로소 타인과의 연대의식에 눈을 뜬 것은 같은 제3세계가 아닌 정복자 피사로의 조국 스페인에서였다.

 

고통받는 민중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는 혁명가였지만, 그는 청년기에 빈민 여성 노동자를 자신의 육욕을 일방적으로 배설하는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거무스름한 조각상 같은 여자가, 이제까지 실론에서 본 여자 가운데 제일 아름다운 여자가 집 뒤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불가촉천민 파리아 카스트에 속하는 타밀족으로, 싸구려 천으로 만든 붉은색과 황금색 사리를 걸치고 있었다. (중략) 그녀는 엄숙하게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니, 내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처럼 그 혐오스러운 용기를 머리에 이고 여신 같은 걸음걸이로 눈앞에서 사라졌다.

천한 일에 종사하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눈부시도록 아름다운지 마음속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사람을 피하는 정글의 짐승 같았다.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하는 존재였다. 그녀를 불러 봤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후 나는 그녀가 지나다니는 길목에 비단이나 과일 같은 선물을 놓아두었다.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비록 비천한 일이었으나 까무잡잡한 절세미인이 그런 일을 하고 있으니 마치 냉담한 여왕이 의무적으로 치러야 하는 의식으로 보였다.

어느 날 아침 끝장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의사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그녀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저항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이내 알몸이 된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냘픈 허리, 풍만한 엉덩이, 흘러넘치는 젖가슴은 마치 인도 남부의 수천 년 묵은 조각상 같았다. 우리의 결합도 한 남자와 조각상의 결합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눈만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경멸하길 잘했다. 나는 다시는 그런 짓을 되풀이하지 않았으니까.

 

이것은 명백히 강간의 고백이다. 그것도 스페인 정복자들이 인디오 여성들에게 자행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다른 것은 그는 최소한 자신의 잘못을 즉시 깨달았다는 점이지만 저 타밀족 여인에게는 그의 후회가 아무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스페인 파시스트와 싸우고, 칠레의 자본가와 결합한 군부독재와 싸운 혁명가였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또다른 독재자 스탈린을 찬양한 스탈린주의자였다. 그의 민중시인으로서의 명성은 자신의 인민을 탄압하는 스탈린의 맨얼굴을 분칠하는 장식품으로 이용되었다. 당시 스탈린에 의해 시베리아의 동토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죽어간 민중과 지식인들에게 그의 스탈린 평화상 수상은 어떤 의미였을까. 하지만 그는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가 20차 전당대회에서 스탈린의 죄상을 만천하에 밝히며 격하 운동을 벌인 후에야 자신의 과오를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판단 착오를 자서전에서 인정하지만, 시인답지 않게 가슴으로 절절하게 반성하기보다 정치인처럼 혼돈의 시대를 변명거리로 삼는 느낌이다. 히틀러라는 악마를 분쇄한 영웅이자 러시아 혁명의 굳건한 수호자, 선량하고 원칙을 지키는 인물이라는 것이 그의 스탈린에 대한 첫인상이었고, 이후 이 첫인상은 소비에트 연방을 수차 방문하면서 발견한 우상화와 독재의 징표들에 눈 감게 만들었다. 위대한 시인은 자서전에서 굳이 사족 같은 변명을 남긴다.

 

그러나 나는 이 권력자에게 단 한 편의 시를 헌정했을 뿐이다. 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쓴 시였다. 이 시는 전집에 실려 있으니 누구라도 찾을 수 있다.

 

생각해보면 애초에 쉽게 매혹되고 경탄하는 시인의 감성은 냉혹하게 현실의 이면을 꿰뚫어봐야 하는 정치가, 전략가에는 맞지 않는다. 그는 선의를 갖고 러시아 혁명의 성공을 기원했기에 이를 이뤄낼 현실적 힘을 가진 독재자의 추악한 이면을 보지 못했다. 많은 이들이 보았는데도 말이다. 보고도 못 본 척한 것인지, 시인의 내면에 마키아벨리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이란 그처럼 복잡한 존재기 때문이다.

 

 

6. 비극적 최후

 

그는 자서전을 쓰는 와중에 최후를 맞이한다. 그가 사랑했던 칠레 민중들의 짧은 승리로 성립한 민선 정부, 그가 사랑했던 동지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에 대한 전세계 민중과 지식인들의 지지는 냉혹한 현실세계에서는 나비의 날개처럼 아름답지만 허약했다. 파시스트들과 독점자본가들은 군대라는 사냥개와 결탁하여, 칠레의 대자연이 품고 있는 지하자원을 모든 이들의 것으로 선언한 아옌데를

그대로 사냥했다. 그의 자서전 마지막 몇 줄은 대통령궁을 칠레의 공군이 폭격하고, 칠레의 육군이 탱크를 몰고 진격하여 기관총으로 단 한 명, 대통령의 육신을 난사하여 갈갈이 찢은 행위에 대한 분노로 피가 튀며 갑자기 마무리된다.

 

하지만 그의 최후 역시 갑작스러웠다. 아옌데가 타살된지 불과 12일 후에 네루다는 사망했고, 그의 자택은 쿠데타 세력에 의하여 약탈, 파괴되었다. 40년이 흐른 후에야 암살 의혹을 밝히고 사인을 규명하고자 그의 시신이 발굴되지만 밝혀진 것은 없었다.

 

7. 그에게 매혹되는 이유

 

청년기가 아닌 중년에 이르러 새삼 네루다에 매혹된 이유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그가 위대하고 완벽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내가 본 그는 쾌락에 탐닉하고, 방탕하고, 모순 덩어리고,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구차하게 변명하는 사람이다. 그는 끊임 없이 실수하고 순간의 격정에 심취하지만, 그 순간의 열정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거기서 샘솟는 순정한 언어로 찬양한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오직 자기 가슴의 명령에 충실하다. 그것은 소년의 특성이다. 소년들은 어른이 되고 사회에 편입되면서 자기 가슴의 명령보다 주위의 눈치와 가장의 의무감에 더 충실해지며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가 되어 간다. 우리 평범한 인간들은 그렇다.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 철들지 않는 소년이었다. 그는 평생 대자연에, 육체적 사랑에, 고통받는 이웃들의 순수함에, 함께 이룩할 아름다운 사회에 대한 꿈에 매혹되어 침을 튀기며 그 매혹을 시로 옮겼다.

 

철들고 조로해 버린 우리들은 그에게서 먼 옛날 우리 안에 살았던 그 소년을 기억해 낸다. 검은색 윤기가 흐르는 큰 딱정벌레에 흥분하고, 이웃 여학생의 도톰해지는 가슴 곡선을 훔쳐 보며 가슴 뛰던 그 소년. 우리는 모두 그 소년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철들지 않는 시인에 대한 매혹은 현실 세계에서는 비극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영화 ‘일 포스티노’의 주인공인 우편배달부 마리오처럼 말이다. 아름다운 섬 카프리에서 어부의 자식으로 심해어처럼 고요한 삶을 살던 마리오는 뉴스 영화에서 네루다가 아름다운 여인들의 열광을 받는 장면을 보고 단지 그 이유만으로 시인이 되고 싶어 한다. 마침 그의 섬으로 망명 생활을 하러 온 네루다에게 편지를 전하며 마리오는 쭈뼛쭈뼛 서툴게 시인에게 다가 가서 그의 친구가 되고, 제자가 되고, 마침내 동료 시인이 된다. 태어날 때부터 늘 곁에 있어 범상하게만 대하던 바다와 하늘과 별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알게 되고, 그 아름다움을 언어라는 도구로 노래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멀리서만 흠모하던 아름다운 여인을 시의 힘으로 품에 안게 된다.

 

하지만, 인간 세상은 자연과 여인의 아름다움만을 온전히 노래하며 살 수 있게 평화롭지 않다. 시인이 고향으로 돌아간 후 그를 더욱 그리워하던 마리오는 마침내 시인의 민중에 대한 사랑, 혁명에 대한 열정까지 혼자서 배워 내고 만다. 시인에게 계속 자신의 열정과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보내지만, 밤하늘에 아름답게 빛나는 별은 나 혼자만을 위해 빛나지 않는다. 온 세상 사람들의 별인 시인은 마리오에게 답장할 여유가 없다. 마리오는 이제 스스로 네루다가 되어 혁명의 길에 나서지만, 로맨티스트 시인 혁명가가 현실 세계에서 대체로 차지하게 되는 것은 차가운 총탄이다. 시간이 흐른 뒤 섬을 찾은 네루다가 만난 것은 한때 마리오의 모든 것이었던 생명력으로 넘치던 여인이 빛을 잃고 고단한 삶에 지친 모습이다.

 

우리는 호롱불에 매혹되어 날개가 타들어가는 고통도 잊고 다가가는 부나방처럼 시인에게, 혁명가에게 매혹된다. 그래서 네루다는 마약처럼 위험한 존재일 수 있다. 주인공 마리오를 연기한 마시모 트로이시는 영화촬영을 위해 심장이식 수술을 연기하면서까지 배역에 몰두했고, 영화촬영이 끝난 후 정확히 12시간 후에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 한낱 흔한 부나방이던 존재는 타오르는 불꽃이 되어 단 한 순간이라도 주변을 비춘다. 그래서 우리는 시(詩)가 우리의 남루한 일상에 찾아오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황홀한 니르바나의 순간을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詩)

- 파블로 네루다,

김현균 역(譯)

 

그래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言)도,

침묵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밤의 가지들로부터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나를 건드리곤 했다.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입술은

얼어붙었고

눈 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

그때 무언가가 내 영혼 속에서 꿈틀거렸다.

열병 혹은 잃어버린 날개들,

그 불에 탄 상처를

해독하며

난 고독해져 갔다.

그리고 막연히 첫 행을 썼다.

형체도 없는, 어렴풋한, 순전한

헛소리,

쥐뿔도 모르는 자의

알량한 지혜.

그때 나는 갑자기 보았다.

하늘이 걷히고

열리는 것을

행성들을

고동치는 농장들을

화살과 불과 꽃에

들쑤셔진

그림자를

소용돌이치는 밤을, 우주를 보았다.

 

그리고 나, 티끌만한 존재는

신비를 닮은, 신비의

형상을 한,

별이 가득 뿌려진

거대한 허공에 취해

스스로 순수한

심연의 일부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별들과 함께 떠돌았고

내 가슴은 바람 속에서 멋대로 날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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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856 음란물 차단 소식에 일베에 연일 대통령 비난글이 올라온답니다 [8] 흐흐흐 2015.01.14 4223
114855 독신생활의 즐거움과 괴로움 [13] 살구 2014.10.10 4223
114854 '부모가 돈 대줬으니 성적 강제공개(?)는 당연하다'의 논리는 무리수 아닐까요 [45] 큰거북이 2013.07.10 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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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851 독거인들을 위한 잡지가 생겼네요. [12] 자본주의의돼지 2011.07.15 4223
114850 나를 미치게 하는 직장동료 [14] 유체이탈 2012.06.21 4223
114849 미어터지나보군요 지산.. [14] bebijang 2012.07.27 4223
114848 이병헌 [레드: 더 레전드 Red 2] 출연진 한명한명과 촬영장에서 인증샷 [9] Guillaume 2013.07.11 4222
114847 영어로 된 외국 영화 리뷰 사이트 좋은 데 없을까요? / 범죄 느와르 영화 추천 받아요 [9] 도니다코 2012.12.14 4222
114846 허재 감독 성격 많이 죽었어요. [7] 달빛처럼 2011.09.25 4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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