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장만옥의 <객도추한>

2021.03.11 06:26

어디로갈까 조회 수:980

신입 멤버의 포트폴리오를 읽노라니 옛영화 하나가 난데없이 떠올랐습니다.
“엄마는 나처럼 다시 해탈할 수 있을까."
영화 <객도추한 客途秋恨 Song of the Exile> 에서 딸 (장만옥)이 일본 여행 중 엄마를 이해해가는 과정 중 보이스오버로 흘러나왔던  대사입니다. 엄마(육소분)가 일본인으로서 홍콩에서 살면서 느낀, 하지만 말하지 못한 외로움과 애환을 딸이 일본여행 중 뒤늦게 이해해가는 과정이었죠.

남지나해를 사이에 둔 중국과 일본, 1970년대를 끼워넣은 채 식민지 시절과 현재를 오가는 <객도추한 >은 모녀가 역사 속으로 숲길을 걷는 정서를 보여줬습니다. 해탈이라니,  그것도 '나처럼'과 '다시'라니... 얼핏 건방떠는 듯한 그 말은 무엇일까요. 영국 유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딸이 동아시아 근대의 복잡한 역사의 굴레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일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건방의 극치일 가능성이 읽히는 어법이에요.

하지만  다르게도 해석해 볼 수 있는데,  자신에겐 엄마와는 다른 고뇌가 있지만, 엄마의 고통과 상실에 뒤늦게나마 가닿고 있다는 걸 그런 투로 드러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딸은 일신이 해탈했다는 게 아니라, 그 가능성에 의해 역사 속의 하염많은 구구절절 뭇 고뇌들이 서로 이해될 여지가 생긴다고도 할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서 일본여행은 언어에 의한 의사통보다 오히려 그 결렬에 따른 퍼포머티브한 소통이 중요하다는 점을 드러냈습니다.  일본어, 중국어, 영어라는 언어적 삼체가 혼돈에 휩싸일 때마다 ‘남지나해’는 하나의 운하처럼 작동했어요. 그렇게 환히 밝혀주는 게 개방성의 입구가 됨을 보여줬고요. 
영화 마지막 부분에 할아버지가 부르는, 덧없음의 시간을 탄하는 노래에 터져나온 장만옥의 눈물이 단적인 증거입니다. 해소가 아닌 흐름의 시작이죠. 시간이 흐르고 감정이 흐르고 이해가 흐릅니다. 

이러 식의 해탈 가능성에 기대어보자면, 허안화 감독은 자전적인 이 영화로 ’동아시아 공동의 (흐르는) 집’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탐문돼야 할지를 너무나 환히 보여줬다고 하겠습니다.
1990년에 제작된 이런 관점이동의 영화, 일본과 한반도를 오가고 식민지 시절과 현재를 넘나든 한국 작품이 있을까요?  있을 법한데 제가 언젠가부터 영화를 너무 안 보는 경향이 있어서 알지 못합니다. 

덧: 요즘 청년들은  포트폴리오를 참 잘 작성하는군요. 전문적이면서 감성적 터치도 할 줄 알고, 무엇보다 자기가 이 분야에서 뭘 하고 싶은지, 뭘 할 수 있는지를 명료하게 적시할 줄 압니다.
덧2: 장만옥은 객도추한 10년 후의 작품 <화양연화>로 저에게 각인된 배우입니다. 고딩 1때 쓴 화양연화 감상문으로 학교까지 찾아온 남학생이 있었는데, 그런 글을 저는 하나도 보관해두지 않았네요. 꼭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 - ;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2389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143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763
115317 (바낭+속풀이+스포) 건축학개론 보며 열받은 이야기 [29] 모모씨 2012.03.24 4252
115316 스타벅스 now brewing의 의미 [10] Joseph 2015.06.21 4252
115315 '안철수 치사해요' 에 대한 가카의 화답: "안철수 연구소 주가조작 수사 착수" [34] 데메킨 2011.09.07 4252
115314 한식구 일주일 분 식재료 [26] 가끔영화 2011.02.02 4252
115313 [듀9] 장기하 안경? [8] 그러므로 2010.11.15 4252
115312 [우행길] 4. 한 번에 한 가지만 하는건 어렵네요. 숨쉬기도 어려워요..<심야식당> [11] being 2011.02.19 4252
115311 [듀나인] 제목에 숫자가 들어간 영화 제목 [36] 뮤뮤 2010.09.15 4252
115310 방송의힘.. 나혼자산다와 모란시장 [8] 이게무슨 2014.06.07 4251
115309 이정재 아웃팅은 유야무야 끝났네요 [7] 사과식초 2013.02.21 4251
115308 이번주 아빠! 어디가? [12] 아모르 파티 2013.02.04 4251
115307 요새 내이름은 김삼순 다시 보고 있는데 [15] 감자쥬스 2013.01.04 4251
115306 야마가타 트윅스터 '내숭고환 자위행위' [4] 회전문 2012.11.02 4251
115305 (바낭) 화장품 서랍 정리 [22] 침흘리는글루건 2012.09.07 4251
115304 문재인 PI 안 쓴답니다. [9] 이소란 2012.07.20 4251
115303 부쩍 예뻐진 장재인 [11] Shearer 2011.11.30 4251
115302 어제 안철수 논문 표절이라며 댓글에 나온 이야기 조선일보에도. [21] utopiaphobia 2012.09.28 4251
115301 [미국대선 특집] 특권 의식 없는 오바마. [6] 자본주의의돼지 2012.11.06 4251
115300 오늘 위대한탄생 인상깊었던 장면들.. [3] juni 2011.03.05 4251
115299 연애가 끝나고 나면 꼭 이런 순간들이 있죠 [9] menaceT 2012.10.06 4251
115298 (19금 잡담) 나는 결백합니다 남자의 증명 [5] nomppi 2012.04.19 4251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