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9 16:18
이미 많은 분들이 다양한 리뷰들을 너무 잘 써주셨으니 영화의 내용과 전개에 대해서는 많이들 알고 있을 거에요.
영화 주인공들의 이민 시기와 사유, 한국에서 전적이 명확치 않다는 의견들이 많지만 저는 이 영화를 딱, 영화가 시작하는 그 첫 장면의 시점부터 얘기하고 싶어요.
이 부분이 아마 제가 다른 분들과 이 영화를 대하고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저에게는 어떤 영화든 스포가 중요하지 않고 이 영화 역시 스포에 민감한 스릴러물은 아니기에 결정적인 단서가 될 만한 극적인 장면이나 스토리라고 할 만한 것이
딱히 없다는 것이 저는 가장 맘에 드는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매 순간의 장면들이 허투루 지나가는 법 없이 저마다의 역할들을 해내고 있다는 점도 놀라웠
어요. 언제부턴가 너무 세련되고 영리한 연출과(제겐 그 대표적인 영화가 기생충) 또는 모든 가치관에 공정할 수 있도록 지나치게 머리를 쥐어 짜낸 영화들에 대해
아무 감흥도 느낄 수 없었던 저에게는 이 영화가 무슨 상을 받고 평론가들 리뷰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건 애초에 영화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조건들이 아니었
습니다.
자칫 아메리칸 드림, 남자의 꿈과 쓸모, 아버지의 체신머리, 아내와 엄마의 희생과 양보, 기복과 자기구원으로서의 불가해한 종교행위들, 하지만 광신으로 치닫지
못하는 무력한 신앙심, 철없는 동심 가운데 한국적 할머니 정서와의 부조화, 무자비한 현실 앞에서 붕괴 위험에 놓인 가족이 그럼에 다시 끌어안고 희망을 꿈꾼다는
내러티브가 전부인 것 같은 이 영화는 사실 아무 겉멋이 없는 그 내러티브 자체로 이미 무리수를 두지 않고 영화가 흘러가게끔 놔둡니다.
무턱대고 자신만의 농장을 꿈꾸는 제이콥의 가부장적 이기심은 가족 모두를 토네이도 앞의 티끌처럼 미약한 컨테이너로 끌고 들어오는 철없음이 다분하지만 아내와의
아귀다툼에서도 그 흔한 손찌검이나 욕설을 하지 않는다는 것(저는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 이 부분이 가장 비현실적이라 생각했어요), 그 당시 아내상으로는 결코 흔
치 않았을 야무진 항변가인 모니카도 결국은 상황을 그대로 감수하며 또 다른 가장으로서 자신의 몫까지 묵묵히 해낸다는 것. 그리고 수구초심을 역행하여 다늦게 미국
으로 건너온 순자 여사도 딸이 처한 말도 안 되는 현실 앞에 비관하며 사위를 무시하고 경멸할 법 한데 그 가운데서 자신이 살아갈 방법을 알아서 찾아간다는 것.
영어와 국어를 번갈아 쓰듯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채로 국적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을 테지만 엄마를 돕는 사춘기 들어선 큰딸, 아픈 심장을 달고 사고뭉치에 심하게
개구진 만큼 삶에 대한 의욕과 열망도 넘치는 어린 아들. 그 누구 하나 서로에게 존재 자체로 부담을 주며 기생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각자 알아서 사는 법을 터득하고 있다
는 점이 저는 이때껏 봐 왔던 어느 가족영화보다 훨씬 더 독립적이고 그래서 사실 이 부분이 교포인 감독이 가진 전형적인 한국식 정서와는 조금 다른 결이고, 따라서 영화
가 가진 가장 큰 매력과 힘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동안 숱하게 봐 왔던 일방적인 희생과 착취 관계에서 어느 순간 곪아터지듯 웅변하는 지점도 분명히 있지만, 결국 수용하게 되는 결심에 대한 설명이 따로 없어도(개인
적 감상으로는 부부간의 격렬한 이전투구 후에 물베기 같은 과정이 있었음을 감지하는 온도와 분위기는 있었지만), 그게 성경적으로 해석하는 여자의 순종보다는 모니카
가 가진 캐릭터가 할 말은 하고 할 거는 한다는, 맞고품음에 최적화가 빛나던 순간 아닐까 합니다. 네네, 그러니 지금 상황엔 너무 이질적이고 도대체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왜 도망치지 못하고 저렇게 사는가! 하는 리뷰도 제법 보이겠죠. 그럼에도 저는 영화 내내 모니카 그리고 한예리 배우 전반에 흐르던 감당과 수용이 일방적 오래참음으로
인한 체념적 억울함보다 천성적으로 껴안는 캐릭터에 기인한 것 같아 불편하지 않았어요. 누군가는 모든 사안에 부당하다고 핏대를 올려도, 누군가는 그럼에도 받아들이고
포용하니까요. 그리고 끝까지 문제를 해결하고 방향을 찾아가는 구심점을 제시하는 사람들도, 말 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도 결국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라는 걸 알죠. 왜냐,
온갖 잘난 척 해도 저 또한 그런 캐릭터나 그릇이 못되니까요.
또한 제이콥 역시 가족과 함께 이제라도 잘 살아보겠다는 고집스러운 의지의 미련함일 뿐, 여타의 한국식 가장들처럼 어디서 오입질을 하거나 아내를 때리거나 욕하거나
하지 않고(미국 이민 안 가도 한국 땅에서 사업하고 방구 깨나 낀다는 남자분들 치고 가정생활 평탄한 경우를 거의 보지 못해서요. 반대 급부로 자녀교육을 위해 남편의
희생을 담보하고 외국으로 떠났다가 가족붕괴가 일어나는 경우도 많고요-_-)동반자로서 의지하고 신뢰하니 모니카도 그나마 지속가능한 캐릭터였을 거에요. 그러므로
후반부의 화제씬의 절박함이 그들의 결속을 더 다져줬겠죠. 이건 정말 애증을 뛰어넘는 믿음에 관한 확신이겠죠! 상황이 어떠하든 굳이 내가 양보하고 인내하면서까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일면식도 없는 SNS나 사방팔방에서 종용 당하는 요즘 세상에서 더더욱.
누가 누구랄 것 없이 모두의 연기가 대단히 훌륭하고 빼어났지만 가장 원더풀한 것은 역시 배우 윤여정님의 연기입니다! 저는 이 분의 연기를 워낙 어린 시절부터 봤었던
세대이고 지난한 개인사도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입장에서 어렸던 제 눈엔 결코 미인이랄 수 없었던 윤여정님의 연기를 영화와 티브이 드라마로 보고 자랐기에, 이 배우에
대한 무수한 인상들은 요즘 젊은 기자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 중 하나가, 어렸을 때 미용실에서 무심코 집어 들었던 여성동아 같은 잡지에서 읽은 인터뷰 글이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그녀의 자택을 방문해서 진행한 인터뷰였을 거에
요. 제 기억에 인터뷰한 계절이 여름이었는데 그 댁 거실 소파에 씌워 놓은 린넨 커버가 그렇게 깨끗하고 빳빳하고 정갈할 수 있나 하는 기자의 칭찬에, 직접 손으로 빨고 다
린다고 대답했어요. 집안의 살림을 그렇게 직접 한다고 했던 아드님의 첨언이 있었던 기억이 나요(이제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라는 듯한 뉘앙스). 여러가지 개인사를 겪
고 미국에 있을 때부터 그렇게(힘들게) 살았던 게 버릇이 됐다는 배우님이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어렸던 제게도 린넨 커버를 직접 빨고 다리는 습관을 가진 이 사람은 참 지독
하고 성실하겠구나 싶었죠.
그래서 일가를 이루고 이렇게 늦게까지 빛을 보는 걸 보면 역시 사람은 꾸준하고 열심히 제 할 일을 해야하나 싶고, 자칫 이 배우가 주는 무게감이 너무 커서 저는 혹시라도
이 영화에 너무 강한 식초나 참기름 역할이 되는 것을 우려했지만 이 노련하고 영리하고 감각적인 배우는 더도 덜도 않게 딱 제 역할과 무게 만을 더하며 자칫 진부한 신파
로 흐를 수 있는 여지를 원천봉쇄해 버립니다.
대단히 눈물겨운 화해도 없고, 극적인 반전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결론이 이게 뭐야? 라는 일부의 불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건 우리는 꼭 뭔가가 어떻게든 해결이 되고 뭐든
지 더 나아져야만 안심이 되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아들의 심장은 좋아졌지만 치매와 뇌졸중까지 얻은 친정엄마까지 군식구로 등가교환한 이 냉정한
현실 앞에서 이제 다시 우물을 파본들 뭐가 나아지겠는가? 우물은 커녕 수맥이라도 과연 찾아지기는 하는 건가?
하지만 여기저기 맨땅에 우물 파는 듯한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는 이미 알고 있을 거에요. 이렇게라도 살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있는지? 지금 나에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살아서 행복한가? 누가 묻는다면 저는 아니라고 할 거에요. 그렇다면 불행한가? 그 또한 아니라고 할 것이구요.
타인들 앞에서 체면과 인심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명분과 논리와 객관성을 확보하고 살아가는 것, 제 현생의 생업과 생활에서 이미 충분히 차고 넘쳐서 기빨리고 질립니다.
모두 하나같이 다 잘났고, 살아가면서 부득불 생기는 불합리는 1도 참지 않으며, 손해는 절대 보고싶지 않은 요즘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으로 들이대면 모순투성이인 영화가,
그래서 저는 더욱 귀하고 아름답다 느꼈어요.
#사족 :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고 재미있었던 몇 가지 추가해서 써봐요.
1.첫장면 운전씬에서 핸들을 잡은 한예리의 손가락이 나오는데, 미국 이민가서 고생하며 병아리 감별사를 하는 여자의 손 치고는 네일관리 너무 잘 받은 손톱이라 관리가
너무 잘 돼 있어서, 유일한 옥의티라고 느꼈어요.
2.앤의 사춘기가 느껴지는 얼굴과 몸이, 전혀 롤리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그 또래 여자애들 특유의 새침함을 잃지 않으며 보기 편했던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3.또래의 교회 친구도 얘기하지만 데이빗의 얼굴은 요즘엔 정말 흔치 않은 그 당시 사내아이들의 전형적인 얼굴이었어요.
저는 어떻게 저런 얼굴을 찾아 캐스팅 했는지 놀라울 따름이에요!
4.또한 대다수 이민자의 얼굴 그리고 제 외국생활 경험상 다국적 페이스로 변한 배우를 어쩌면 그렇게 잘 섭외했는지, 감별사 동료님 특히 그 갈매기 눈썹요!
5.그래서 그동안 내가 먹은 치킨은 다 암탉이었단 말인가? 때로 잇몸새로 느껴지던 질김은 수탉이었단 말인가!
6.그 나이에 남자팬티(트렁크)마저 그렇게 이격감 없이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오직 윤여정 배우구나.
2021.03.10 12:42
2021.03.10 15:57
이 영화의 큰 미덕이 등장인물 중 누구 한 명 악의가 있거나 위선적인 인물이 없다는 점 같아요!
저는 데이빗이 교회 친구네집 놀라갔을 때 아침으로 씨리얼 먹는데, 친구 아빠가 해주던 데이빗이 사는 컨테이너 전 주인의 말로를 들려주는 섬찟한 괴담에서
일순 긴장했지만(그 얘기를 듣는 데이빗의 표정연기는 진짜 아카데미상 주고 싶을 정도죠!) 결국은 캐주얼하게 마무리하면서 니네 아빠말 잘 듣고 잘 도와줘야
한다고 좋게 타이르던 장면에서 안도했어요. 또한 폴이 백인이지만 지역 주민 대다수가 하고 다니는 행색이 아니기 때문에 어린 아이들이 킥킥대는 것도
딱 고맘때 애들 얄궂은 정도였구요. 과거엔 모든게 다 순박했다고 섣불리 미화하면 안 되는 거지만, 지금은 그냥 본인 맘에 안들기만 해도 말로 담기 힘든 끔찍한
묻지마 범죄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빈번한 세상이라 차창 밖으로 십자가를 끌고가는 폴을 보며 웃는 것조차도 일종의 관심과 애정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영화 전반에 흐르는 정서상 이 영화가 감독의 지극기 자전적인 요소에 기반했다면 그 의 가정을 이뤘던 구성원들 자체가 기본적으로 순하고 선량한 사람들
아니었을까 짐작이 돼요. 고단하고 어렵고 그래서 다툼도 갈등도 있기는 하지만, 괴물처럼 폭주하는 폭력성은 없는 사람들이랄까요.
확실히 지금처럼 화가 많은 정서는 아니라는 점에서 저도 보기 편한 영화였어요.
호평이 무색하게 혹평도 많고 기대 이하였다는 평도 많아서 그러려니 합니다만,
그래도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부분 공감해 주는 분과 나누는 대화는 재미있고 의미있네요. 고맙습니다.
2021.03.10 12:49
2021.03.10 16:02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1.03.10 20:35
초반부...반바지로 풀밭을 달려가는 데이빗....
풀독오른다던 할머니 말씀이...
2021.03.10 23:02
2021.03.11 15:05
이렇게라도 살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있는지? 지금 나에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살아서 행복한가? 누가 묻는다면 저는 아니라고 할 거에요. 그렇다면 불행한가? 그 또한 아니라고 할 것이구요.
인생이 참 뭐라고 정의할 수 없이 애매하죠. 그런 점을 잘 살려낸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밋밋하다는 평도 받고 있구요.
근데 얘깃거리를 이 정도로 많이 생겨나게 하는 영화라는 점이 리뷰를 썼던 저로서도 조금 놀랍네요.
2021.03.11 17:09
애니하우님 써주신 리부보고 저도 더더욱 보고 싶었어요! 겨자님 글도 그렇고 아무 극적인 스토리가 없는데 이렇게 많은 얘기들이 나오는 영화라는게 진짜 신기해요.
저는 사실 그날 너무 피곤했어서 영화 중간에 아주 잠깐 졸기까지 했지만 귀로는 다 듣고 있었거든요.
아마도 로컬 촬영이 주는 시각적 청량함도 한몫을 한 것 같고요, 그 자연적인 풍경이 주는 개방감, 시원함, 그래서 더욱 자연스럽게 편안했던 화면과 이야기들.
인생에서 꼭 행복해져야 한다는 강박을 애초에 결락으로 갖고 태어난 저는 그래서 이 이야기들이 하나도 무겁지 않았고, 어떻게든 자기 몫은 살아가게 돼 있다고
그 지점을 다시금 인정하면서 안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1.03.12 06:31
2021.03.12 15:38
저는 너무 좋게 봤기 때문에 추천드리고 싶은데, 개인마다 받아들이는 감상이 다르니 어떠실지 조심스럽네요. 그래도 한번쯤 보시면, 안 보고 들은 얘기로만 영화를 생각하시는 것보단 훨씬 좋으실 겁니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특히 넒은 초록의 풍경이 좋아서 화면을 바라보는 시야 자체도 굉장히 편안한 영화였어요!
쓰신 리뷰의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동감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싶네요. 특히 한예리 캐릭터에 대한 부분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자발적인 감당과 수용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아요. 뭐랄까 저 또한 우리네 어머니하면 떠오르는 일방적인 참음이 아니라, 자기 의지와 확신을 가진 캐릭터라 더욱 마음에 들었거든요. 사실 돌아보면 이 영화 전반에 과장된 인물이 하나도 나오지 않아서 저는 마음이 되게 편했고(심지어 교회에서 앤에게 아무 말대잔치를 하는 아이 조차 '놀림'이 아닌 순수한 '궁금증'으로 표현되는 지점), 어떤 기교의 영화보다 세련되다고 느꼈어요.(소위 말하는 힙함이란 이런 게 아닐까...) 또한 흔히 억압하는 계층으로 묘사되는 백인 캐릭터가 다소 모자라다 여겨지는 폴로 나타난 것도 흥미로웠구요. 아무래도 본인의 경험이 아니면 나오기 힘든 인물 설정인 듯...결국 감독의 성정이 그런 사람이고 그렇게 살아왔고,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드럽고 유연하기에 이런 영화가 나온 것 같다고 생각해요. 살다 보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계속 자리를 바꿔가고(이 가족에게 훗날 화재가 재난이 아닌 화해의 기억이 될 것이듯) 삶 자체가 어쩌면 행복하지만도 불행하지만도 않다는 걸 저도 이제야 깨닫고 있는 지점이어서였을까요. 쓰신 글처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영화였답니다. 제게도. 영화를 곱씹어볼 수 있었던 시간 만들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