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19 08:28
산체님의 "주류 논쟁과 학문에서의 참"을 읽고 씁니다.
댓글로 달기엔 내용이 좀 길어 답글로 쓰는 점 양해 바랍니다.
자세히 논의하자면 굉장히 많은 얘기들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많이 생략하고,
좀 간단하게 얘기해보겠습니다. 이미 저는 이 논쟁과 관련하여 지나치게 많이
말을 한 편이니까요.
산체님의 논의의 가장 큰 약점은, 김리벌님의 입장을 단지 "장하준의 입장이
이상하다"란 문구 하나에서 유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상한"이란 표현은 김리벌님이 장하준에 대한 어느 서평에서
가져온 말입니다. 김리벌님은 장하준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내놓는다고, 그래서 학문적 작업이라 하기 어렵다고 적은 바 있습니다.
또, 최근의 논쟁에서는 사실/가치의 구분을 받아들이면서, 객관적 사실의 인식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했고, 경제학을 가치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과학적 학문으로
이해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최근의 글에서는 장하준에 대한 주류 경제학의
비판을 요약하면서, '주류 경제학이 옳고 장하준이 틀린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라고 얘기합니다. 이와 비슷한 언급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결국 김리벌님의 장하준에 대한 평가는,
장하준은 대부분 틀린 주장을 하고, 게다가 반증 불가능한 명제를 내놓는다는 것입니다.
'이상한'이란 술어 하나로 김리벌님을 상대주의자로 만들기에는,
김리벌님이 다른 입장에서 한 말들이 이미 너무 많습니다.
사실 제가 보기에 김리벌님의 입장은 잡탕입니다.
어느 때는 마치 주류든 아니든 취사선택할 수 있는 입장들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래서 상대주의적 인상을 주면서도,
결국에는 이 다양한 입장들이 논증을 통해 '어느 정도는' 옳고 그름을 판가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때로는 포퍼식의 반증가능성 명제를 이용해서, 장하준을 사이비 경제학자로
만드는가 하면, 때로는 쿤식의 패러다임론을 오용해서, 장하준을 소수 학파로
만듭니다.(패러다임은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주류와 비주류는
한 패러다임 안에 있습니다. 주류는 정상과학이 아니고, 비주류는 혁명과학이 아닙니다.
사실 주류/비주류는 누차 얘기하지만 단순한 집합 개념이라서,
상당히 헐거운 개념인 패러다임보다 훨씬 헐겁고 거의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마가렛트님은 김리벌님의 주류를 상대주의적 방식이 아닌 식으로,
실제로 한 학문 영역에서 옳다고 인정된 입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반면 산체님은 그 주류를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상이하게 읽힐 수 있는 차이는 이미 김리벌님의 관점 자체 안에 있습니다.
주류가 학문으로서의 경제학 일반의 연구 방법론, 연구 규범들, 이른바 경제학의 본령에
충실한 입장들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단지 현재 다수의 인정을 받는 특정 경제학 사조
를 가리키는지, 오락가락합니다.(앞 글에서 말한 대로, 이는 세간티니님께서 지적하신 바 있습니다)
후자라면, 산체님의 관점에 가깝게, 상대주의적 입장에 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김리벌님의 본령은, 그런 상대주의적 입장이 아닐 것입니다.
어떤 전제에 따라 입장을 선택하느냐는 자유이지만, 결국에는 소위 주류 경제학이
옳으니까요. 그 때 비주류 경제학은 때로는 소수 입장(하지만 틀린)으로, 때로는
사이비 학문으로(그래서 아예 틀릴 수조차 없는) 간주되지만, 그건 김리벌님 입장에서 보면
중요한 게 아니겠죠. 하지만, 이 비주류 경제학의 위치에 대한 애매성은,
주류 경제학의 정의에 있어서의 동요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산체님의 글에 대해, 김리벌님이 과연 산체님의 생각대로
상대주의자에 가까울지부터 검토되어야 할 것이라고, 간단히 대답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산체님이 제시하신 입장에 대해 한 가지만 질문드리겠습니다.
산체님은 글의 앞 부분에서 관찰의 이론 의존성 테제를 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끝 부분에서 패러다임 전환은 과학자 사회의 동의가 필요하며
이 동의는 합리적으로 결정된다고 말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 두 주장이 잘 들어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과학자 사회의 동의가 갖는 합리성이 어떤 것인지 불분명하다는 점입니다.
주류의 규칙이 위기에 처하고 이는 주류의 규칙에 따르더라도 명백히
보인다는 것은 이에 대해 별 다른 단서가 되지 못할 뿐더러
전반부의 논지와 상충될 위험까지 있습니다.
이는 마치 주류의 규칙의 한계가 객관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계기,
따라서 어떤 이론에도 의존하지 않고, 또는 같은 말이지만 어떤 이론에
의존하더라도 동의가 가능한 관찰, 사실과 같은 어떤 것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아는 한에서 쿤은 패러다임 전환을 그렇게 학문 내에서 기존
이해 방식이 한계에 봉착했을 때 일어난다고 보지 않습니다.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려면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권력 관계와의
결합이 필요합니다. 물론 기존 패러다임의 위기도 필수요소이지만
말이죠.
이런 방식을 피하고 합리주의를 견지하자면, 관찰, 사실이 이론을
반박하는 가능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마련해야 합니다.
2011.06.19 15:11
2011.06.19 16:22
2011.06.19 19:55
2011.06.19 21:32
그런데 두 번째 논평에 대해서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는 방식에 있어서는 저는 제 입장에 큰 문제가 없다는 점을 재차 주장하고 싶습니다. 제가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결국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다라는게 과학자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 전체가 동의하는지에 따라 일어나는게 아니라, 그들 중 다수만 동의해도 되는 문제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즉 일종의 민주주의적 방식에 따라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이 과정을 합리적으로 볼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raven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류 규칙의 한계가 객관적으로 드러나거나, 어떤 이론에 의존하더라도 동의가 가능한 관찰이 없어도 충분히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났을 때, 모든 과학자들이 기존 이론 체계를 폐기하고 새로운 이론 체계를 받아들이는건 아닙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그들이 꽤 유명하고 업적이 뛰어난 과학자들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이후 세대들은 기존 패러다임에 대해 교육받지 않고 새로운 패러다임만 배우면서 성장하는거죠. 기존 패러다임이 더 이상 과학 이론 체계로서 작동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 와서야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하자면, 과학이 이론 적재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날 때 반드시 객관적으로 판정 가능한 사실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제 입장이 비일관적인건 아니란 겁니다. 이론 적재성에 따라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어떤 관찰 결과가 발견되든 간에, 그 관찰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기존 패러다임 옹호자들이 있으니까요.(저는 이게 옛날 얘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요새도 이런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말씀하신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권력 관계에 의해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입장에 대해서도... 물론 아마 이 논점에 대해 저와 raven님이 보이는 차이는 정도의 차이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겠지만, 조금 회의적입니다. 저는 그 정치, 사회적 권력관계의 개입이, 패러다임의 전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기존 패러다임의 위기나 과학자 사회의 동의가 부족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인위적인 정치, 사회적 권력으로 인해 성립하게 된 패러다임은 효율적인 연구프로그램으로 지속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실증 사례도 있고요. 구 소련에서 리센코 연구 프로그램이 보여줬던 결과가 그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소련에 많은 생물학자들도 그런 식으로 연구하면 안될거라고 말렸지만, 리센코의 연구프로그램은 이데올로기적 권력을 등에 엎고 그 과학자 세계 내의 주도적 연구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죠. 결과는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고 그 연구프로그램 자체, 그러니까 패러다임 자체가 폐기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기존 이론에 대한 논박이나 과학자들의 충분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치 사회적 압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패러다임이 수립된다면, 그 패러다임은 오래가지 않아 망해버릴 거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이러한 논거는 정치, 사회적 권력 관계만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은 될 수 있을지라도 정치, 사회적 권력 관계가 패러다임 전환에 필수적이다라는 주장의 반론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위와 같은 이유와 함께 저는 두번째로, 그 정치 사회적 권력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기존 이론 체계가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과학 외적인 권력 관계들이 패러다임 전환에 필수적이라는 입장에 회의적입니다. 기존 이론 체계에서는 권위있는 집단이 권력을 쥐고 있을 겁니다. 패러다임이 전환되면 대부분 이 권위있는 집단이 충격을 받는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즉 정치, 사회적 권력관계는 오히려 패러다임의 전환에 보수적인 모습을 띄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패러다임 전환의 여러 중요한 시점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하려던 과학자들은 기존 권력에 소외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갈릴레오도 그랬고, 아인슈타인도 그랬고, 호킹도 그랬죠. 이런 과학자들의 이론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는다고 해서 어떤 가시적인 이득을 볼 수 있는 권력 집단이 압력을 가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닌것 같습니다. 정치적 권력관계가 패러다임 결정에 어떤 중요한 역할을 행사한다면 생물학의 패러다임은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론이 되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진화론이 생물학의 주도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은 것은, (일단 이 지점에서 저는 과학 이론 성립의 상대론 관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진화론이 창조론에 비해 참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밝힙니다.) 다른 정치, 사회적 권력 관계와 결합을 이루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과 관련한 훼방과 압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자 사회에서 널리 동의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대중들과 정치, 종교, 사회적 권력은 그러한 패러다임의 성립을 극구 거부했지만, 과학자들이 그 패러다임의 수립이 자신들의 연구에 있어서 훨씬 효율적이니까 그런 패러다임을 형성한거죠.
그러니까 기존 패러다임의 위기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형성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많은 경우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게 제 입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