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19 05:23
저는 경제학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경제학 관련해서 김리벌님과 세간디티님 혹은 raven님 사이에 오고 간 논쟁의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리벌님이 주류라는 말을 사용하신 방식에 있어서는 동의하는 바가 있어서 이렇게 글을 적습니다.
어떤 학문에서 어떤 형태의 연구 방식이 주류라고 해서 그러한 형태의 연구에 포함된 내용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제 생각에 이 부분은 김리벌님과 raven님 모두 동의하실거라 봅니다. 김리벌님이 만약 장하준 교수의 연구가 비주류라고 해서, 그것이 틀렸다거나 가치없다는 주장을 하신 것이라면 그러한 입장에는 저 또한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 김리벌님이 그런 주장을 하신거 같지는 않아요. 제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김리벌님께서 장하준 교수의 연구를 평가할 때 '이상하다'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틀렸다'와 '이상하다'는 다르죠. '틀렸다'라는 표현은 물론 평가하려는 대상이 기준에 맞지 않을 때 쓰는거죠. 반면 '이상하다'라는 표현은 이해할 수 없을 경우에 쓰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보통 주류와 비주류의 논쟁이 그렇죠. 틀렸다라기 보다는, 서로 이해할 수 없다라는거.
raven님께서 주로 주장하시는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떤 이론의 가치는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지 그것이 주류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저도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는데... 제가 이러한 입장에 동의하기 선뜻 어려워지는 부분은 그겁니다. 어떤 이론이 옳은지 그른지 결정되는 것이 그 이론이 이루어지게 된 체계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T라는 이론 체계에서는 A라는 문장이 참이 되지만, T-1이라는 이론 체계에서는 A라는 문장을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거죠. raven님께서는 짐작하시겠지만 다분히 쿤(Khun)적인 생각이에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런 겁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라는 문장에 대해서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그 문장이 참일거라고 생각 할 겁니다. 하지만 중세 유럽에서 활동했던 과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아니 지구라는게 어떻게 움직여?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지구'라는 단어 안에 '우주의 가운데에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두 체계에서 똑같이 '지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 표현이 같은 의미를 가진게 아닌거죠. 이 경우,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는 문장은 현대인들의 이론 체계에서는 참이 되지만, 제가 가정한 중세 유럽의 과학자들에게는 이상한 문장이 될겁니다. 오히려 그들은 "아니 어떻게 그렇게 이상한 말을 할 수가 있지?" 라고 생각하겠죠.
쿤의 표현에 의하면 이는 이론적재성(theory-laden) 때문에 나타나는 과학의 특성입니다. 어떤 이론의 참을 결정하는 것은 단순히 그 이론과 세계와의 대응관계가 아니라, 그 이론을 구성하는 체계 전체의 정합성과 관련있다는 생각이죠. 이는 학문 체계가 전문화되고 세분화 되면서 나타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일상 언어의 차원에서는 이런 문제가 거의 나타나지 않아요. 우리는 '지구'라는 표현 속에 그것이 움직일 수 없다는 의미가 함축되는지 별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문화된 학문 체계가 구성될 경우는 다르죠. '지구'라는 표현이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 해당 학문 체계 내에서 엄밀하고 체계적으로 규정이 됩니다. 이러한 작업은 '지구'와 같은 단어, 혹은 개념과도 연결이 되지만 학문 전체의 방법론과도 관련이 되죠. 어떤 현상에 대해 설명할 때 이러이러 한 방식으로 해야 한다, 혹은 어떤어떠한 방식으로 논의가 전개되면 그와 관련된 문제는 해결된 것이다 등의 학문 전체의 틀이 그 이론 체계 내에서 규정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경우 한 이론 체계내에서 '지구'와 같은 개념어를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야 하는지, 아니면 관련된 문제를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 하는지는 그 이론 체계와 관련된 교과서에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죠. 하지만 분명 그 이론 체계에 숙달이 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 암묵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식의 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맞았다, 혹은 어떤 식의 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틀렸다라고 판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론 체계 내에서 사용하는 규칙과는 다른 방식으로 개념을 사용하거나 문제를 처리하는 설명에 있어서는 맞았다 혹은 틀렸다라고 판정을 내리기 어려워요. 그냥 "잘은 모르겠지만 그건 좀 이상해"라고 말할 뿐이죠.
제 생각에 김리벌님이 하신 말씀은 그냥 그런 의미에서 "장하준의 논증은 이상해"라는 평가인 것 같습니다. 이 같은 주장이 가능한 이유는, 제가 알기로는(사실은 잘 모르지만), 장하준 교수의 논의가 주류 경제학을 비판하는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장하준 교수가 주류 경제학에 대해 주류 경제학적인 방식으로 비판을 한다면, 장하준교수가 옳다 혹은 틀렸다는 식의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충분히 주류 경제학의 규칙을 준수하고 있는 사람인데, 내가 볼 때 장하준 교수의 주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 주류 경제학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거 좀 이상한데" 라고 말할 수 있는거죠. 물론 장하준 교수의 논증을 틀렸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장하준 교수의 텍스트를 장하준 교수가 전개하는 이론 체계내에서 분석하고, 그 분석 내에서 장하준 교수 논의에 허점이 있음을 보여야 합니다. 아마 raven님께서 주장하시는 바는 김리벌님이 자신의 주장에 책임을 지려면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김리벌님은 장하준의 논증이 이상하다고 주장했지, 그것이 틀렸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기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런 식의 대립은 여기저기서 벌어집니다. 어떤 학문 활동이 전개 됨에 있어서, 그 학문의 내용으로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는지는 둘째 문제고, 과연 그런 방식으로 학문을 해도 되는지가 문제의 쟁점으로 떠오를 때가 많습니다. 그나마 과학의 경우 현상을 잘 설명하는 이론이 좋은 것이다라는 학문의 목적은 학문활동을 하는 과학자들 모두가 동의를 하는 바이지만, 경제학의 경우에는 학문 활동의 목적 자체가 학자들의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그 경우에는 당연히 방법론에서도 학문적 입장에 따라 차이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김리벌님의 주장처럼 참의 차원이 아니라 취사선택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되는거죠.
그리고 듀게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류 논쟁과는 별 상관없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사실 주류 비주류 논쟁이라는게 그렇습니다. 비주류 입장에서 주류 논증의 허점을 들춰냄으로써 비주류였던 입장이 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경우는 있어도, 주류 입장에서 비주류의 허점이나 비효율성을 폭로하려는 시도는 잘 이루어지지 않아요. 전자의 경우가 보통 얘기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의 상황이 되는건데, 그 반대의 작업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건 주류가 비주류를 꺾는다고 해서 주류 입장에서는 별반 득될게 없기 때문에 그런거 같습니다. 주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저같은) 비주류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솔직히 별로 관심도 없습니다. 그들이 비주류의 도전에 대해 응전하게 되는 거의 유일한 상황은, 비주류의 문제 제기로 인해 주류 입장의 존속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고 느낄 때 뿐입니다. 즉 주류가 무너지는 상황은 비주류를 잘 갈고 닦는게 아니라 주류 자체에 심각한 결함이 있어서 이걸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주류의 규칙에 따라서 보일 때라는 거죠.(이게 바로 제가 쿤을 이해한 방식입니다. 저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쿤이 파이어아벤트와는 달리 과학적 지식에 대한 합리론자라고 생각합니다. 패러다임 전환을 촉발하게 되는 계기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과학자 개인의 신념이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패러다임 전환의 압박이 생겨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패러다임이 전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과학자 사회 내의 동의가 필수적이며 이 과정을 합리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는게 제가 쿤을 이해한 방식입니다.)
아마 김리벌님이 제차 강조하시는 것은 이 측면인거 같은데, 장하준 교수의 주류 경제학 비판에 대해 주류 경제학자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은 최소한 그것이 주류 경제학적인 방식으로는 주류 경제학의 심각한 위기를 불러오지는 못했음을 보이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 또한 매우 간접적이고 사소한 측면에서 장하준 교수의 논의에 비판이 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2011.06.19 06:50
2011.06.19 18:59
2011.06.20 02:54
이상하다, 기괴하다, 심지어는 재앙이다 라는 표현은 경제학자들 내에서는 흔히 치열한 내부논쟁의 와중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입니다. 심지어는 주류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말입니다. 물론 이때의 주류라는 표현은 시대에 따라서 그 주체가 늘 가변적이기는 합니다만..
장하준의 케임브리지 대학의 할아버지 선배격인 Nicholas Kaldor(칼도어)같은 석학은 통화주의를 Scourge(재앙)라고 표현할 정도이고 아예 통화주의를 비난하는 책제목으로 사용했죠.
세계체제론의 윌러스틴은 어느 인터뷰에서인가 통화주의의 아버지인 밀튼 프리드먼을 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인기가 없고 소외받는 경제학자라고 에둘러 비판한 적도 있습니다.
통화주의도 자신들이 주류가 된 80년대 이후에는 금융위기설에 천착한 하이먼 민스키같은 학자를 Cult라는 표현으로 기괴한 소수의 추종자를 거느린 학자로만 취급하기도 하였죠.
칼도어와 하이먼 민스키는 포스트 케인지언으로 분류되는 학자들인데, 포스트 케인지언은 맑스주의나 제도주의쪽에서 보자면 주류에 가깝지만, 신고전파 종합이나 통화주의에서 보면 포스트케인지언은 비주류입니다.
그렇지만, 기괴한 Cult라는 표현을 꼬리처럼 달고 다녔던 민스키같은 학자가 2008년의 금융위기로 일약 각광받는 경제학의 총아로 떠오른 것을 보면 '이상한', '기괴한' 등등의 부정적인 표현은 그냥 서로 치열한 논쟁의 와중에서 주로 비주류에게 행했던 수사적인 폄하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입장이 바뀌어서 어제의 비주류가 오늘의 주류가 되면 반대로 어제의 주류가 오늘의 비주류가 되어서 '이상한''논쟁적인'이라는 부정적인 표현도 감수해야겠지만 말이죠.
그리고, 그런 치열한 경제학 논쟁의 전장터에 서있던 경제학자들은 다 부정적인 표현을 논쟁의 상대방에게 들어야했습니다.
'이상한''논쟁적인'이라는 표현을 들었다고 해서 그 표현을 얻은 경제학자가 별볼일없는 경제학자는 결코 아니거든요.
논쟁의 당사자가 된다는 것자체가 이미 대단한 수준의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거나 앞으로 미래가 주목되는 학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김리벌님은 장하준이 '이상한','논쟁적인'이라는 표현을 비판자들부터 들었다고 해서 장하준을 듣보잡이나 경제학자들부터 배제된 존재인 것처럼 주장하시는데, 그것은 우습고, 터무니없는 일이 됩니다.
지금 가장 각광받는 민스키, 루비니 교수모두 금융위기전에는 기괴하고 이상한 소수들만의 학자로만 인식되던 사람이었습니다.
반대편의 밀튼 프리드먼도 60년대 비주류 시절에는 인기가 없는 geek처럼 당시 동료 경제학자들에게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즉, '이상한''논쟁적인''문제적인''기괴한' 이런 표현들은 어느 한 학자의 학문적 성과와 위치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큰 의미와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상한''논쟁적인' 이런 단어를 가지고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한다는 발상자체는 정말 무모하고 유치한 편가르기입니다.
게다가, 단지 주류와 비주류만을 구분하는 정도가 아니라 경제학자 집단에서 배제된 이단적인 존재라고 선언하는 행위는 심히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이죠.
마치 복싱이나 격투기 시합에서 한 선수의 코피 좀 났다고, 또, 눈 좀 부어올랐다는 이유만으로 그 선수를 패배자라고 본다면 그 팬은 복싱과 격투기 시합을 난생 처음보는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오로지 시합의 승부를 가늠하는 기준은 KO이고, 심판단의 채점입니다.
종합격투기 선수들중에 누가 더 쎄냐라는 문제로 열렬히 논쟁하는 중고딩들 조차도 코피가 나고 눈이 부어올랐냐라는 기준으로 격투기선수의 우열을 판가름하지 않습니다.
브래드 딜롱 교수는 시카고학파를 '지적인 붕괴'라고 비판하고. 폴 크루그먼 교수는 시카고학파를 비롯한 주류경제학을 (케인즈의 가르침을 잊은)'거시경제학의 암흑시대'이라고 조롱합니다.
물론, 저는 시카고 학파나 통화주의에 대한 '붕괴','암흑'이라는 수사적인 표현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만, 그렇다고 시카고 학파의 학문적 업적과 위치까지 폄하해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장하준 교수도 비판자들로부터 '이상한''논쟁적인'이라는 표현을 들었다고 해서 장하준 교수를 경제학자들의 집단에서 배제된 존재인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의도적인 깎아내리기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하는 것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학문적 계보와 인용 체계와 학맥을 보더라도 그 학자의 입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장하준은 영국 케임브리지의 맑스주의와 포스트 케인지언의 전통에서 성장했고, 제도주의적 연구방법론을 가졌기때문에 비주류 경제학자라고 혹자가 말한다면 저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장하준은 비주류경제학자가 맞습니다.
그러나, 비판자로부터 부정적인 표현을 받았다는 이유로 장하준을 경제학자 집단에서 배제된 존재라고 혹자가 말한다면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주류라는 의미를 지금 당대 유행하고 있는 학문적 사조라고 해석해야 옳습니다. 그게 바로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이론과 일맥상통하죠.
그런데, 김리벌님처럼 (정통과 이단의 구분)을 행하는 학문권력의 집단이라는 다른 개념을 주류의 의미로 은근슬쩍 끌여들어와서 주류를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혼동하게 만들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