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책상

2021.02.06 07:55

어디로갈까 조회 수:1211

(저 아래 글에서 singlefacer님 댓글을 받고, 그에 관해 쓴 글 중, 어머니가 보관해둔 중딩 때 글이 있을 테니 올려보겠다 했는데, 그 글은 없다시더군요.
대신 이 글을 보내주셨어요. 졸업 후 밀라노 근무 시절에 쓴 글인 듯합니다. 자신의 옛글을 읽는다는 건 참 간질 오글거리는 일이지만, 대견한 마음이 드는 걸 숨기지 않고 공개해보아요~ㅋ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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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보내 주신 [칼의 노래]를 사흘에 걸쳐 읽었다. 이 책에서 내가 찾은 미덕은 김훈이 인류의 역사에 전쟁을 포함시켰다는 사실이다. 한국 소설 중 참호에서 쓰여진 작품은 드물다. 전쟁을 소재로 했더라도, 소설이야말로 평화를 즐기는 소일거리에 불과함을 드러낸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화약연기도 나지 않았고, 칼로 베어진 흔적도 없었다.
김훈은 다르다. 산다는 것은 편하게 죽는 자리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참호의 생애를 말한다. 죽고 싶은 곳에서 죽을 수 있는 자는 행복한 인간이라고.

'칼의 노래'는 [풍경과 상처]나 [자전거 여행] 같은 산문들에서 보여지는 남성성보다 더욱 더 완정한 형태의 죽음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김훈은 죽음을 빙자해서 종교의 영역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는 죽음 앞에서 사유하고, 죽음 앞에서 침묵한다. 인간적인 방식으로 죽음에 맞서기. 이것이 그의 신념이며, 이 신념이 그의 문학에 엄청난 박력을 부여하는 듯싶다.
그는 죽음을 기가 흩어져 흙으로, 불로, 물로, 공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 아닌 초월적 힘이 나를 데리고 간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김훈은 누구보다도 종교적인 인간이다.

'칼의 노래'에 가득한 선연한 절망의 냄새는 매우 매혹적이고 감염력이 탁월하다. 지금은 이른바 가볍고 쿨한 세상이며, IMF의 책임 한쪽을 면하기 어려울 정도의 쾌락주의가 만연한 세상이다. 김훈은 그런 세상을 향해 칼과 죽음이라는 오브제로 한번 베어지면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늠하여 독자들 앞에 펼쳐놓는다.
시대와 불화했던 만큼이나 그는 성실하다. 그의 문장은 성실하며 관용적이며 동시에 독창적이다. 접속사 하나 없는 그의 문장은 '세계의 계면을 드러낸다.' 스스로 말했듯이, 우원한 세계의 모습이 그의 문장의 도도한 흐름을 통해 현현하는 셈이다.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를 썼지만 그는 아마도 '붓의 노래'는 쓰지 않을 것이다. 붓은 칼과 현을 노래하기 위해서만 쓰여지는 것이지, 스스로를 위무하기 위해 쓰여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로 된 세상을 경멸하면서도 글로 세상을 만들어가는 이 단단한 작가에게서 내가 맡는 것은 죽음에 대한 단순한 취향이 아니다. 그의 죽음관은 삶의 유한성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여느 인간의 현존과 다르지 않다. 다만 그는 그 '어떻게' 앞에다 '주어진 세상에서'를 첨가할 뿐이다.

보편적이지 않은 세상, 단 한번도 평화롭지 않은 세상에서 그는 이미 쇠약해진 육신으로 무엇인가를 공작하고 사유하고 쓰고 있다. (이가 솟구쳐서 이빨을 손으로 하나씩 뽑아내며 '칼의 노래'를 썼다지 않은가.) 
온 몸으로 밀고가는 아날로그 방식의 글쓰기로 그는 몇 편의 작품이나 더 내놓을 수 있을까.
어느 대담에서 스스로 예견하긴 했다. 탐침해보고 싶은 세계가 두,셋 정도 있을 뿐이라고. 더 있다고 해도 자신의 물리적 나이가 허용하지 않을 거라고.
세상의 밑바닥에 마음을 대고 그 긴장을 이겨내며 사는 그는 어느 청년보다도 젊다. 그가 부디 안녕하여, 말 아닌 것들을 베어 말의 순결성에 이른 칼 같은 말로, 다시 한번 내 가슴을 그어주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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