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미덕

2021.02.27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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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는 것도 일종의 재능입니다. 오전 내내 전화로 친구의 하소연을 듣노라니 새삼 그런 생각이 들어요. 뛰어난 망각의 끝은 신성성에 가닿는 거니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긴 합니다. 사실 동물만큼 건강하게 잊는 존재는 없죠. 뒤끝 없는 무-기억만큼  신의 근처까지 가는 것이 있을까요? 인간은 기억 때문에 초월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중딩 때, 도서관에서 읽었던 제목이 기억 안 나는 세 권짜리 <신화> 시리즈가 기억납니다. 거기 어느 예시에 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미련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가족/친구가 그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면, 반나절만에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 사느라 다 써버리고 다시 빈손이 되죠. 돈 준 이들이 놀라면서 다시 돈을 주지만, 역시 하루만에 동내고 말고요.  그는 그저 의욕없는 타고난 허무주의자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심상치 않은 모습이었어요.

가족과 친구들은 그에게 기사회생할 기회를 계속 줬고, 거부를 모르는 그는 그걸 계속 받았고,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며 아이를 둘씩이나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바깥으로 돌며 살았고, 돈의 마력에도 녹아나지 않았고, 쾌락의 극단에도 물러지지 않았으며 자기 닮은 생명의 신비에도 눈감았습니다. 
(바른 기억인지 자신 없는데,) 마침내 어느날 신이 등장하여 그를 심문했죠. 
"너는 왜 마지막 집착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 따위로 살고 있느냐?"
"저에게는 본래 집착이 없습니다. 다만 저를 닮은 아이들을  만들고 보니 옛기억이 새 희망이 되어 새록새록 같이 자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 남자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더랍니다. 그래봤자 평범한 삶이었습니다. 바로 익명의 삶을 산 것이죠. 그에게는 기억에 사로잡힌 평범한 희망이 옷처럼 덧입혀졌습니다. 아마 그냥 평범한 사람보다 더 평범한 사람으로 죽었을 거에요. 으례 나중 된 사람이 더 되는 것처럼. 
제가 이 얘기에서 얻은 것은 망각의 반대어는 기억이 아니라 익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니체는 동물신의 권능에 조아리며 건강한 망각 쪽에 한 표를 던졌죠. 그의 잔혹 미학은 다른 게 아니라 사자와 같은 삶의 태도로부터 시작하여 아기처럼 되자는 것이었습니다. 사자의 무-기억이란 인간으로서 얼마나 부러운 것이냐, 라는 것. 그러나 이 건강한 망각은 단순히 기억 능력이 사라지는 것, 무능력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기억할 수 있음에도 무-기억으로 나아가는 것에 가까운 것이죠. 넘어가는 자의 고차원 정신이랄까요.

저와 친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니체 같은 방식을 답습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삶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같은 범인들에겐 망각해서는 안 될 의무도 있는 것이니까요. 그게 한걸음 내딛는 동력이 되기도 하고요.
통화를 마치기 전 친구가 키득댔습니다. 
" ㅋㅋ 그 쌀쌀맞은 말투는 세월이 가도 안 변하는구나~" 
-  그래서 다음 생에서 나 같은 친구 안 만나려면 이 생을 현명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
" 마지막으로 펀치 한방 날려봐."
- 나쁜 기억은 신문기사 읽듯 그날그날 소비한 후 버려. 묵은 기사 파고 있는 한 다양한 뉴스는 너에게 가닿지 못하니까.
"흠..."


덧: 이렇게 낙서질하는 것으로 저도 오전 내내 친구와 나눴던 말들을 망각해버립니다.  - - 
창밖을 보니 날이 맑고 햇살이 화려하네요. 봄이군요. 봄이 오기 전에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를 봐야 했었는데 놓쳤구나... 아직 기회가 있는 걸까? 하는 무의식이 의식 위로 떠오릅니다. 뜬금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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