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천원 인생.

2010.11.10 13:45

난데없이낙타를 조회 수:3563

스무살 때,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겨울방학이 찾아왔고, 청춘의 시간은 아버지 시간보다 소중하다며 무어라도 배우라던 아버지에게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발빠른 친구들이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점령했고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지쩌지해서 공장 시다 자리에 들어가게 됐어요. 아디다스 츄리닝 만드는 하청이였는데, 미싱사가 재봉한 추리닝을 다음 미싱사가 재봉하기 편하게 접어 주는 역할이였습니다.

 

스무살 때에는 낯가림이 너무 심각한 사람이였기에 사람 상대하는 서빙 알바보다 낫다고도 생각했어요. 말없이 재봉한 옷을 다음 재봉사에게 넘기기만 하면 되니까요. 생각해보면 이 얼마나 오만한 마음이였을까요.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 공장은 지하도 아니였고 쾌적한 건물 2층이였기때문에 대다수 공장에 비해 좋은 환경이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적잖이 놀랐었어요. 공장을 통해서 물품이 만들어진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한다는 게 어떤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전혀 다른 성질이였기때문입니다. 여전히 공장이 넘쳐나지만, 언뜻 책에서 보았던 이야기들이 눈 앞에 정경처럼 펼쳐지고 그곳을 저는 별세계로 인식했어요. 당시 사람들의 고단함과 힘듦은 보질 않았고 아니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생경한 그 모습들이 나중에 작가가 되면 좋은 소재가 될 수 있겠다는 발칙한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다  첫날에는 보이지 않던 일들이 며칠이 지나자 보이게 됐습니다. 돌도 되지 않은 아기를 안고 미싱을 돌리던 여자분이 있었는데 저와 나이차가 2살밖에 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왜 아이를 안고 이곳에서 일을 하는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었을텐데 저는 그게 어떤 사연일까에만 궁금했었어요. 정말 다행이도 당시에는 친하지 않은 어떤 사람하고도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할 정도로 낯가림이 심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게 다행이지요. 그냥 가출한 청소년이 애기를 가져서 여기서 일하나? 정도로 치부했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생각이죠. 그들이 가난할 거라는. 4천원 인생을 살고 있을 거라는 걸, 생각치도 못하고 무엇보다 가출한 청소년이라는 시선으로 그녀를 낙인찍었으니까요.

 

그 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여전히 밥을 먹기 어렵고, 여전히 일을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여전히 도처에 있다는 걸.  

그리고 내가 그걸 정말 몰랐던 이유는 그들의 삶을 인생을 존재를 외면했기때문이라는 걸.

 

4천원 인생을 읽으며 잊고 있었던 옛날일이 이제와서 생각이 납니다. 읽으면서 감추지 못한 감정은 사실 안도였습니다. 비정규직이지만 그래도 4천원짜리 인생에서는 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안도요. 그 안도가 얼마나 부끄럽던지요. 그리고 그 안도가 만족이나 다행으로 이어질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뭐라 말을 하기가 어렵더군요.

그래도 4천원 인생 기사가 노동자의 삶을 수박 겉핡기처럼 쓰여져있어도 이 책이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저처럼, 며칠 체험하고도 잊고 있던 사람들을 비롯한 이 세계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 끔찍한 현실이 존재함을 환기시켜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사천원 인생은 한겨레 21에 연재된 '노동OTL'이라는 기사를 엮은 책입니다. 각기 4명의 기자가 저소득 노동에 뛰어들어 그곳의 실태와 그곳에서 생활한 것을 기사로 엮었습니다.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이 책에 접근하고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직 읽지 못한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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