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밤의 비밀하나

2012.09.24 23:14

sweet revenge 조회 수:4187


사실 이 이야기는 죽기 직전까지는 비밀로 안고 가려 했는데,

긴 낮잠을 잔 후 심야한 밤에 눈을 뜨고나니

묘한 기분이 들어 써봅니다.




몇년 전인지 잘 기억도 안나는 겨울 밤, 

피폐해질 때까지 싸움을 거듭하던 남친과 헤어지고 헛헛한 마음에 채팅방을 들락거리던 때였죠.

모든 게 끝났다는 암담함과 함께 누구라도 옆에서 내 손을 잡아줬으면 했었죠. 

그렇게 사람한데 데이고도 또다시 사람이 만나고 싶은. 그 욕구 자체에 스스로 절망스럽기도 했어요. 


여차저차 말이 잘 통하던 아이와 만나기로 하고, 모처의 약속장소로 나갔습니다.

거긴 아직도 제가 서울에서 최악으로 꼽는 번화가인데 편의점 안에서 그 아이를 기다리며 좀 우울해졌습니다.

도대체 여기서 내가 뭘 하고 있는건가 싶어서 그냥 갈까 했죠.  

그때 갑자기 나타난 그애가 매우 낭랑한 목소리로 쾌활하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키는 매우 작고 어깨가 넓은, 묘하게 불균형한 체형이었는데 젤소미나에 나오는 잠빠노(이름이 맞나 모르겠어요)가 자꾸 생각났어요.

태도나 말투가 마치 거구의 남자어른 같은 느낌이었고요.

어쨌든 객관적으로 좋은 첫인상은 아니지만 저에게는 묘하게도 느낌이 나쁘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다정하게 느껴졌달까요.


술을 마시면서 주책맞게, 헤어진 남자 친구의 이야기를 떠들었습니다. 그 아인 옆에서 맥주를 따라주며(!)조분조분 한두마디 씩을 거들었고요. 

그러니까 흥이 나서 나는 더 열심히 떠들었고, 그애는 끝까지 엷은 미소를 띤 채 얘길 들어주었습니다. 

솔직히, 지금까지 기억나는 그 아이의 얼굴은 딱 그 표정 하나뿐이예요.

걔의 연애 이야기도 듣긴했는데, 미안하게도 어떤 스토리였는진 잊었습니다. 

그외에도 다니고 있던 대학원 얘기와 사는 이야기들을 들었는데, 말을 재밌게 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예상치도 않은 유쾌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술을 마시고 나자, 노래방에 가자고 제의하더군요. 저는 일종의 트라우마 때문에 노래방에 가는 걸 그다지 즐기진 않지만

제 주장을 내세우는 스타일은 아니라 조용히 따라갔습니다. 

놀랍게도 카펜터즈의 this masquerade를 첫곡으로 부르더군요. 

마치 스티비원더가 내 앞에 있는 듯, 그렇게 소울풀하고 기깔나게 노래를 부르는 일반인은 태어나서 처음 봤습니다. 

나는 노래책 뒤지기를 포기한 채 나는 감상만 할테니 노래를 불러달라 했고, 그아이는 한 시간 내내 끈적끈적한 팝과 블루스를 불러줬어요. 

모든 것이 올드넘버들. 우리가 태어나기도 수십년 전에 만들어지고 유행했던 노래들이었어요. 


어쩌다보니 함께 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관계 자체는 그렇게 즐겁지 않았어요.

나는 그런 쪽으로는 쿨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실은 로맨스가 필요한 사람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그 아인 이런 저런 얘길 해줬어요. 그의 가족과, 어린 시절과...손을 잡고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잠이 들었습니다.

왠지 그늘이 있을법한 분위기의 아이였는데 전혀 그런게 없더군요. 그냥 무작정 밝고 따듯하기만 했어요. 

마치 소설에서 툭 튀어나온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반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요란법석한 치장을 한 나란 사람은 정반대였고요. 

붉은 조명만 켜지는 기분 나쁜 방이었는데, 그럼에도 나는 기분이 그닥 이상하지 않았어요.

그는 이걸 노리고 나의 얘길 들어주고, 노래를 불러주었던걸까? 세상에 많은 남자들이 그렇다는 것처럼?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만일 그렇다고 한대도, 그럼 어쩌겠어...라는 생각과 함께 죽은 듯 편하게 잠들었어요.


이후에도 그 아이 쪽에서의 연락이 계속됐고, 간간이 만남을 거듭하다가 

여자처자 남자친구와 재결합을 하게 된 제 쪽에서 연락을 끊게 됐습니다.

별다른 언질 없이 연락을 끊어버려서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어쩔수가 없었어요. 

실은, 대시를 해온다면 사귀어볼까 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저와의 관계에서 그아이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법이 없었어요.

니가 시간이 된다면,,,니가 괜찮다면,,,니가 보고싶다면.

늘 이렇게요.


솔직히 자주는 아니고, 일년에 어느 하루 정도는 그아이 생각이 납니다.

아주 잘살고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에게 그 끈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면

그녀는 환히 웃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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