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5 21:11
- 예전에 보긴 봤어요. 안 봤을 리가 없죠. ㅋㅋ 하지만 본지 20년이 넘어가고 그러면 제 기억력상 안 본 거나 별 차이가 없는지라, 그리고 웨이브에 2편과 3편까지 있길래 한 번 몰아서 보려고 다시 봤습니다. 결말까지 다 유명한 이야기지만 스포일러는 피할게요.
(지금 봐도 간지 작살!!!)
- '근미래'의 디트로이트는 생지옥입니다. '가까운 미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극단적으로 발전해버린 자본주의와 전쟁 기술 덕에 경찰이 대기업 산하 기관이 되어 버렸고. 그 대기업(그 유명한 OCP!)은 쓸 데 없는 데 돈 쓰는 게 싫어서 인력난에 허덕이는 경찰을 방치하는 가운데 자기네가 만든 전쟁용 로봇을 투입해서 치안 유지를 시켜볼 계획을 짭니다. 하지만 최초로 만들어낸 100% 로봇 녀석이 모자란 지능으로 인해 중역 회의에 참석한 직원을 무참히 쏴 죽여 버리는 사고(?)가 생기고. 그 대안으로 죽기 직전의 경찰 두뇌를 이식한 (성실하게도 미리 유사시 신체 포기 각서를 받아 놨더군요) 사이보그를 준비하려 하는데...
때마침 악당 패거리에게 잔인하게 우롱당하고 벌집이 되어 막 숨을 거두게 된 경찰 '머피'가 바로 이 프로젝트의 재료가 되죠. 너까짓 건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일이나 하라고 친절하게 기억까지 다 지워줬고, 싸움 좀 더 잘 하라고 멀쩡했던 팔까지 떼어내버리고 로봇으로 거듭난 우리 머피씨. 하지만 당연히 슬슬 인간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 인상 깊었던 점.
1. 로보캅의 디자인은 지금 봐도 상당히 간지가 납니다!!! 30년을 넘긴 '첨단 로봇' 디자인으로서는 흔치 않은 경우인 것인데요.
피터 웰러의 '위이~잉, 치킨!' 하는 느낌의 로봇 움직임 연기는 가끔 슬쩍 웃음이 나올 때도 있지만 대체로 그럴싸하구요.
2. 영화가 웃깁니다. 런닝 타임 내내 피가 철철 흐르고 툭하면 사람이 넝마가 되며 주인공은 나름 처절하지만 감독의 의도는 코미디 영화였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 장면들이 많아요. 중간중간 삽입되는 뉴스나 광고들 보면 그냥 신문에 실리는 풍자 카툰 느낌으로 웃기고, 가끔은 피 철철 흐르는 끔찍한 장면에서도 개그들이 나오죠. 근데 이게 아마 80년대 한국 관객들에게는 코미디로 받아들여지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싶고... 미국 관객들은 웃었을까? 가 궁금하기도 하고.
예를 들어 ED-209와 관련된 장면들 있잖아요. 임직원을 그냥 날려 버리거나 계단에서 버둥거리거나... 하는 장면들이 지금 보기엔 분명히 웃으라고 넣은 장면으로 보이는데 그 시절엔 (특히 어린이들이라면 ㅋㅋ) 전혀 그렇게 안 보였을 것 같단 말이죠.
3. 확실히 '쇼걸'이 버호벤 영화들 중엔 이질적인 영화이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로보캅이나 토탈 리콜, 스타십 트루퍼스 같은 영화들을 보면 뭐랄까... 영상이 매끈매끈하고 깔끔한 느낌은 아니거든요. 어찌보면 B급 영화 느낌이 난다 싶을 정도로 좀 투박하고 거칠게 찍어내는 게 이 양반 영화들 스타일인데 쇼걸은 걍 번드르르한 헐리웃 AAA급 영화 느낌이었죠. 배우들 신체 노출을 제외하면 막나가고 살벌한 느낌도 덜 했고 유머도 약했고. 감독 팬들 입장에선 실망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구나... 라는 생각이 드네요.
4. 액션은 뭐라 평해야할지 모르겠네요. 일단 로보캅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간지가 나고 또 항상 평균을 훌쩍 넘는 잔혹함이 있으니 임팩트 하나는 확실합니다. 보면서 지루하거나 별로다 싶은 액션씬은 없어요. 하지만 액션 안무 자체가 잘 되었는가... 라고 생각해보면 그건 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뭐 지금의 액션이 영화의 톤에 잘 어울리긴 합니다. 막 우아한 액션 안무가 펼쳐지고 그럴 분위기의 영환 아니니까요. ㅋㅋㅋ
5. 기계가 되어 버린 인간의 자아 찾기... 라는 소재를 로보캅이 만들어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딱 적절한 수준으로 잘 써먹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이후에 비슷한 소재의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쏟아지는 데 큰 영향을 준 게 사실이니 그냥 이 영화가 원조라고 해도 큰 잘못은 아닐 듯.
6. 주로 ED-209에 집중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뭐랄까... 지금 보기엔 프레임이 심히 떨어져 보여서 좀 웃음이 나옵니다. 근데 애초에 버호벤은 얘를 개그 캐릭터로 설정한 것 같더라구요. 나오면 나올 때마다 개그씬을 하나씩은 만들어내니. ㅋㅋㅋ 애초에 예산을 크게 들인 영화는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그렇담 1편 흥행 덕에 덩치를 키운 영화였던 2편을 보면 많이 나아져 있겠네요.
- 암튼 즐겁게 봤습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악취미 유머가 메인이라 취향에 안 맞을 순 있겠지만 낄낄대고 웃으면서 재밌게 봤어요.
영화 속 디트로이트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세계관도 좀 막나가는 격한 풍자라 무섭다기보단 좀 웃기는 편이었구요.
머피의 자아 찾기 파트는 좀 진지하긴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장면을 보면 역시... ㅋㅋㅋ
내친 김에 '토탈 리콜'이랑 '스타십 트루퍼'도 조만간 다시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네요. 네덜란드 시절 영화들도 보고 싶지만 지금 vod로 볼 수 있는 게...
+ 근데 그거 아십니까. 지금 로보캅의 vod 관람 등급은 무려 15세에요. 사지 절단에 피가 철철 흐르고 마약 파티 장면까지 나오는데 말이죠. 개봉 당시엔 싹둑싹둑 잘려져나간 버전으로 중학생 이상이었으니 그러려니 해도 지금 서비스 되는 vod는 런닝타임을 보면 무삭제판인 것 같던데 말입니다. 21세기의 15세들은 볼 게 많아서 좋겠...
++ 여기서 유일하게 머피를 알아보고 로보캅을 돕는 여성 캐릭터가 헐리웃 액션 영화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라는 평이 있었죠. 주인공이랑 연애도 안 하고 자기 일은 똑부러지게 하는, 주인공과 동등한 여성 액션 캐릭터! 그렇게 듣고 나서 보니 확실히 그런 느낌이 있긴 합니다.
+++ 극중에서 OCP 직원들이 로보캅을 지칭할 때 '사이보그'라는 표현을 씁니다. 사람의 모습이 남아 있는 채로 기계를 결합한 것이니 이 표현이 맞긴 한데... 그냥 워낙 오랜만에 듣는 표현이라 되게 반갑더라구요. 사이보그. 요즘엔 이 단어 정말 잘 안 쓰이지 않나요. ㅋㅋㅋ
++++ 트윈 픽스 매니아분들에겐 친근한 얼굴이 둘 나옵니다. 로보캅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OCP 직원 역으로는 트윈 픽스에서 시즌 3까지 비중 있게 출연했던 알버트 요원님이 나오시구요. 머피를 살해하는 갱단의 미친자들 중 한 명 역으로 로라 파머 아빠가 나오기도 합니다. 특히 이 로라 파머 아빠님은 미친 놈 연기가 참 잘 어울리시는데... 필모에 그 유명한 '킬링 조크'가 있길래 조커였나? 하고 확인해보니 고든 역할이었군요. 오해해서 미안해요. ㅋㅋㅋ
+++++ 옛날 자료를 검색하다 보니 이런 게 나오네요.
김지미씨 반갑구요. ㅋㅋ 근데 저거 진짜 피터 웰러 맞나요? 그냥 옷만 보낸 것 같기도 하고...
2020.11.25 21:29
2020.11.25 23:17
그 시절 검열은 딱 포인트만 잡아서 툭툭 과감하게 잘라내 버리는 거라 전체 런닝타임 감소는 적은 대신 티가 심하게 났었죠. 근데 나무위키 주장에 따르면 의외로 잘려나간 부분들 중 가장 비중이 큰 게 잔혹한 장면보다 경찰들이 파업 운운하는 장면들이었다고 하더군요. 사실이라면 그 시절 답단 생각이... ㅋㅋ 그 영향인지 지금 vod의 자막도 '파업'이라는 표현을 안 쓰고 다른 표현을 썼더라구요. 뭔진 기억이 안 나지만 분명 '스트라이크'라고 말하는데 다른 표현으로 대체했어요.
그랬겠죠? 당시 한국 사람들 정서로는 이게 웃기는 영화라는 건 상상도 못할 사람이 대부분이었을 것 같아요.
2020.11.25 22:36
왓챠에도 들어오나봐요. "죽든 살든 넌 나와 함께 간다." 는 카피 예전 개봉때 쓰인건가봐요. 눈에 익어요.ㅎㅎ
“죽든 살든 넌 나와 함께 간다.”#로보캅 #왓챠 pic.twitter.com/XpFeZgihoZ
— watcha_kr (@watcha_kr) November 24, 2020
2020.11.25 23:23
기억나는 유명한 카피는 미국판 원본 포스터에도 있었던 '파트 머신, 파트 맨, 올 캅' 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말씀하신 카피는 영화 속에서 '명대사 등극'을 노리고 일종의 펀치 라인처럼 강조되는 대사였죠.
그러고보면 옛날 영화들은 꼭 그렇게 중요한 장면마다 노골적으로 노린 명대사들 집어넣는 게 기본이었는데. 요즘엔 그런 게 드무네요. ㅋㅋ
2020.11.26 13:28
2020.11.25 22:38
나도 인간이 되고 싶다. -양지운씨 Tv 광고가 참 비장했어요
2020.11.25 23:24
머피 사연에 감정 이입해서 슬펐다는 사람도 많았죠. 전 이제 무뎌져서 그런지 그냥 막판에 헬맷 벗고 씩 미소짓는 모습이 제일 기억에 남네요. 어찌나 해맑던지. ㅋㅋㅋ
2020.11.25 22:42
2020.11.25 23:24
폴 버호벤은 리메이크작에 대해 '너무 심각하고 진지해서 망한 듯' 이라고 평했다네요. 그 분다운 코멘트. ㅋㅋㅋ
2020.11.25 22:51
극중 OCP 회장역의 댄 오헐리가 했던 대사 2개가 가장 재미있고 오래 기억에 남더군요.
"Dick I'm Very Disappointed"
"Dick, You're Fired!"
그리고 등장인물중 가장 연기가 좋았던 배우는 클라렌스 보디커의 커트우드 스미스입니다. 폴 버호벤 영화속 악역들이 대부분 퀄리티가 좋은데 이 분은 그중에서도 탑급!
2020.11.25 23:26
넌 해고야!!! 이게 참 센스 넘치는 드립이었죠. 자신이 살 길을 스스로 찾는 능력자!! ㅋㅋㅋ
네. 진짜 미친 놈 중의 미친 놈 느낌이 제대로였어요. 처음 딱 보는 순간엔 마이클 아이언사이드인가? 싶었는데 보다보니 전혀 다른 얼굴이었던...
2020.11.25 23:37
저는 전에도 썼지만 쇼걸 무척 재밌게 봤었어요. 그 전 영화들이 노골적인 블랙유머를 깔고 간다면 쇼걸은 A급인 척 보이지만 나 B급으로 갈래의 느낌이 흥미로웠댔죠. 장르는 거리가 있지만 쇼걸과 로보캅이 꽤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로보캅은 폭력 연출에 거침이 없고, 쇼걸은 적나라한 노출과 다른 폭력 연출에 거침이 없죠. 그 점에서 막 나가는 건 동일했던 듯 해요. 그래서 오히려 에로에로한 느낌이 없는 게 아닐까 하고요. 에로는 적당히 감춰야 하니깐요. 심지어 다큐의 느낌도... 여자들끼리의 관계를 보여준 것도 좋았고, (특히 지나 거손과 주인공의 끈적 라이벌 관계!). 결말도 좋았어요. 저평가된 영화라고 쓰려다 아, 저평가라고 하기엔 이제는 컬트 팬덤도 있긴 하군요. 앗, 로보캅 게시글에 쇼걸 얘기만 잔뜩;;;
이런 쪽 보실거면 아메리칸 사이코도 한 번 더 가시죠. ㅎ
최근에 다시 봤는데 역시!!
2020.11.25 23:44
2020.11.26 01:24
할로우맨은 '너네 이런 거 보고 싶었던 거잖아 ㅋㅋㅋㅋㅋ' 에서 'ㅋㅋㅋㅋㅋ' 가 빠진 느낌이라 버호벤만의 맛이 덜하더라구요. 또 쇼걸은 드라마 구색이라도 갖췄지 할로우맨은 스릴러로서도 좀 애매해서.
2020.11.25 23:57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비슷한 성격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ㅋㅋ 그렇게 생각은 안 했는데 읽다 보니 납득이 됩니다.
몇 년 전에 "사실 남들에게 자랑은 못하지만 쇼걸은 나의 소중한 길티 플레저다!!!" 라고 외치는 글과 공감하는 댓글 한 무더기를 어디선가 구경했던 기억이 있어요. 사실 이번에 새삼스레 그걸 확인해 볼 생각을 했던 것도 그 글과 댓글들 생각이 나서. ㅋㅋ 뭐 덕택에 저도 즐겁게 봤지요.
아메리칸 싸이코는 유감스럽게도 기억이 너무 많이 납니다? ㅋㅋ 좀 더 까먹은 다음에 볼 거에요. 좀 이상한 기준이지만... ㅋㅋㅋㅋ
2020.11.26 01:21
영화의 두 주인공 모두 한바탕 꿈같은 역경을 겪고 본래적인 나로 돌아가는 듯한 구성이라. 토탈리콜도 그렇고 버호벤이 이런 테마에 관심이 많은가 싶기도요. 크로넨버그도 이런 테마를 다루기는 버호벤보다 더한 신체 변형과이긴 하지만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요. 크로넨버그 영화 최근에 보셨다니 스캐너스는 안보시나요? 이거 신나게(?) 터뜨리는데. 다시 보고 싶은데 볼 수 있는 데가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ㅠ
2020.11.26 01:29
스캐너스도 당연히 봤었고 (능력자 배틀물 아닙니까!!?) 좋아하는 영화였는데... 옛날 유플러스 vod에선 분명히 있는 걸 확인한 적이 있는데 일단 웨이브에는 없더라구요. 안 그래도 크로넨버그 영화 본 김에 그것도 다시 보려고 검색해봤습니다. 바로 오늘이요. ㅋㅋㅋ 올레 티비도 확인해 봐야죠.
iptv나 웨이브의 vod들은 보다보면 뭔 생각으로 영화를 골라 놓은 건지 알 수 없는 게 많아요. 예를 들어 하이랜더나 헬레이저 같은 영화들이 모두 1편은 없고 2편과 3편은 있습니다. 어쩌라는 건지. ㅠㅜ
2020.11.26 01:36
아이고, 찐 영화들은 다 빼놓고 쭉정이 속편만 ㅠㅠ 참, 얼마전에 로이배티님 생각이 났어요. 유튜브 알고리즘에 배우 조상기씨 근황 동영상이 뜨더라구요. 이분이 또 희대의 괴작 '미지왕'의 주인공이었지 않겠습니까! 괴작 매니아인 로이배티님은 미지왕을 봤을까 뭐 그런 생각;;;
2020.11.26 01:43
아. 제가 의외로 그 당시엔 되게 멀쩡하고 평범한 취향이었답니다. ㅋㅋㅋㅋㅋㅋ
게다가 개봉도 하기 전부터 '이건 컬트영화다!!' 라고 외치는 마케팅이 맘에 안 들어서 일부러라도 안 봤던 기억이 있네요.
얼치기 씨네필로서 컬트라는 개념을 그렇게 왜곡해서 마케팅에 쓰는 걸 용서할 수 없었던!!!
말씀해주시니 갑자기 이제라도 보고 싶어지긴 하는데 (제가 '하피'도 그래서 최근에 봤죠) 과연 볼 수 있는 곳이 있을지...;
2020.11.26 13:33
한국은 조금 자르고 중학생 개봉이었는 걸요. 확실히 잘린 부분은 화학약품 뒤집어쓴 악당이 클라렌스 보디커의 차에 치어서 박살나는 장면이었습니다. 당시 대한극장에서 초회 관람자들 중에서 뭐 추첨해서 경품 주는 거였던가 로보캅 모델과 사진 촬영이었던가 하여튼 뭔가 이벤트가 있었는데 그거 해보고 싶어서 새벽같이 전철 타고 달려갔는데, 충무로 바닥이 표사려는 대기줄로 미어터졌고 저는 초회를 놓치고 3회를 봤습니다. 제가 겪은 극장 개봉 중에서도 그렇게 줄 많은 건 꽤 드물었던 기억인데 당일만 좀 미어터진 모양이더군요. 영화는 정말 재미있었다 생각하지만 당시엔 다들 진지하게 숨죽여가며 보고 있었던 기억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