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2010.11.04 10:25

나미 조회 수:1477

저는 외조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두분 모두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어머니께서 팔남매 중 일곱 번째이시기에 이미 어머니가 태어나셨을 때만 해도 두 분 나이가 아주 젊진 않으셨죠. 저랑 같은 항렬의 사촌들이 주로 30, 40대인걸 생각해 보면 무리는 아닙니다.

 

전해 듣기로, 두 분은 아무래도 격동의 세월을 살아오신 만큼 고생은 하셨습니다만 말년에는 안온하게 사시다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자식들(그러니까 외삼촌들 이모님들 말이죠)도 크게 망하거나 한 사람 없이 고만고만하게 잘 살았고(적어도 두 분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본인들도 병에 걸리시자마자 오랜 기간 투병하신 일 없이 금방 돌아가셨다구요. 돌아가실 때 나이도 적지 않았죠. 팔남매 중 마흔이 넘어 본 막내 외삼촌이 결혼하는 것까지 보고 돌아가셨으니까요.

 

그래서 제 머릿속에 더 강하게 남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제가 열 살쯤이나 됐을 땐데, 명절 때 외가에 다녀오다가 엄마랑 이모들, 외삼촌 몇 분과 외조부모님 묘소에 간 적이 있어요. 톨게이트 근처였기 때문에, 귀향하는 길에 갑자기 가자! 해서 갔지요. 저는 그 때 처음으로 외조부모님 산소에 갔습니다. 가자마자 몇 가지 제사음식을 차려 놓고 어른들께서 큰절을 하셨어요. 그리고......이모님이 펑펑 울기 시작하셨죠. 어린 마음에도 저 이모가 왜 저렇게 서럽게 우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업하는 우리 아버지 때문에 고생  좀 하신 우리 어머니는 그렇다쳐도, 그 이모님은 꼬장꼬장하고 성실한 이모부와 금슬 좋게 돈 걱정 자식 걱정 없이 편하게 잘 사시는 분이었거든요. 예나 지금이나 말입니다. 성격도 직설적이고 화통하신 분이라 더더욱 놀랐었지만, 어린 마음에도 함부로 뭘 물으면  안되겠다 싶어 가만히 입 다물고 구석 한 켠에서 할미꽃만 뜯었던 기억이 납니다. 금방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그 이후로도 종종 생각이 나더군요. 그 때마다 그 분은 왜 그렇게 우셨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어느 때부턴가 저 혼자서 결론을 냈습니다. 그 나이대가 되면 그냥 엄마만 봐도 서러운가 보다. 그때 이모님 나이가 아마도 40대 중후반쯤 되셨을 거예요. 그쯤 되면 속상한 일 없어도 엄마만 보면 저절로 눈물이 날 만큼 서러워지나 봐. 그런 가보다.

 

 

 

갑자기 딴 얘기 같지만, 저는 어릴 적에 부모님이랑 어딜 가면 늘 듣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얘는 도대체 누굴 닮았어요? 저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한 눈에 닮아 보일 만큼 생긴 얼굴이 아니었나 봐요. 오히려 앞서 말한 이모님을 닮았다는 얘기를 더 많이 들었지요.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집에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면 자주, 거의 매번 사람들이 엄마와 저를 착각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던 것이 차츰차츰 엄마와 비슷한 얼굴로 변하고, 이제는 어딜 가도 엄마랑 닮았다는 말을 아주 많이 듣습니다. 생김새부터 목소리, 말투, 행동거지, 성격까지. 한의원에 가면 체질까지 어머니랑 똑같다고 해요.

저는 지금 혼자 사는 중인데, 어제 잠시 밖에 나갔다 방에 들어오니 엄마 냄새가 방 안에 가득해서 맘이 철렁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일까, 생각해보며 청소를 시작했어요. 방 안에 이리저리 쌓인 옷가지를 정리하며 저도 모르게 제 옷의 냄새를 맡아보니, 엄마에게서 나던 냄새가 똑같이 나더군요. 베개에서도, 옷에서도, 엄마가 집에서 늘 입고 계시는 월남치마에서 나는 엄마 냄새. 그 냄새랑 똑같은 것이 제 옷에도 배어 있었어요. 어릴 적 저는 왜 엄마 냄새는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 생각하고는 했었는데 어느새 그 냄새가 제 몸에서 날 만큼 저도 나이를 먹었습니다. 언젠가 엄마가  돌아가시고, 그리고 그 산소 앞에 서서 통곡을 하며 울게 되는 나이가 되겠지요, 저도. 그 때쯤에는 어릴 적 저만한 딸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엄마가 돌아가시는 생각이 너무 두렵고 무서운 걸 보면 아직 나이를 덜 먹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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