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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만든 영화라서 그런가?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재미가 없었고 그걸 내내 참는 저 자신을 의식하면서 좀 피곤했습니다. 특히 명확하게 여성주의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영화에 대해 감상을 이야기할 때, 제가 이 영화의 여성주의가 가리키는 어떤 지점을 놓친 것은 아닌가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주조연이 거의 다 여자배우이고 여자들이 여자들을 이해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이야기 자체의 힘이 약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섬에서 일어난 실종사건의 비밀을 따라가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이 영화는 사실 주인공 현수의 내면을 따라가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있습니다. 작은 섬에서, 경찰이 증인을 보호하고 있는 여자애가 사라졌다는데 얼마나 더 큰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재미있어지려면 그 실종사건이 사실은 더 큰 사건, 그러니까 이 여자애가 실종되어야할만큼 훨씬 더 큰 악의와 치밀함이 도사리는 사건의 도입부가 되거나 작은 사건은 작은 사건대로 두면서 현수 자신의 이야기를 더 진행시켰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사라진 여자애 세진의 사연을 계속 파고듭니다. 여기저기서 단서가 발견되고 실마리를 맞춰가는 재미는 있지만 결국 도달하는 진실이 이 서사 전체를 할애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힘듭니다. 실제로도 영화는 그렇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추리에서 영화는 순천댁과 세진의 연대가 대체 어떤 감정적 이유로 진전된 것이며 왜 순천댁은 그렇게까지 세진을 도우려하는 것인지 그 선의의 정확한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작은 사건을 잘게 잘게 쪼개서 씹고 삼키는데 그 맛과 양이 너무 작고 중간중간 김혜수가 연기하는 현수의 내면에 주저앉아야합니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는 계속 미스테리의 형식을 띄고 있어서 진실에 대한 호기심을 계속 돋구고 있으니 오히려 답답한 느낌이 더 큽니다.


"내가 왜 몰랐을까." 세진과 현수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대사입니다. 영화 속 사람들은 계속 자책감과 싸웁니다. 그렇지만 그런 자책감은 딱히 서사를 따라가지 않아도 딛고 일어서야 할 숙제라는 걸 다들 알고 있죠. 그래서 풍경이 될 수 있을 지언정 서사는 될 수 없는 이 내면적 투쟁에 영화는 계속 시간을 씁니다. 이런 이야기였다면 영화는 오히려 훨씬 더 건조하고 주인공의 나레이션을 아예 없앴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내가 죽던 날>을 보면서 관객은 현수 혹은 세진이 되어 이들의 무력한 과거를 대리체험하는데 저는 이 과정이 오히려 철저한 관조에 머물러서 이들의 쓸쓸함을 오히려 완전히 풍경화시키는 게 나았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섬과 절벽이 나오다보니 어쩔 수 없이 셀린 시아마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그 작품은 한 인물의 가장 내밀한 사연을 그리면서도 그걸 보는 사람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초상화를 보듯이 거리감을 유지시켰으니까요.


김혜수의 연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현수는 소설 속의 문어체 말투에 가까운 말을 쓰는데 전 이게 어쩐지 어색하더군요. 그래도 영화가 그려내고 싶은 분위기를 현수의 말로 책임지게 하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말투가 김혜수 배우 본인의 말투와도 좀 겹쳐지는 것 같았어요. 차분한 사람의 도회적 말투라기보다는 차분해보이고 싶은 사람이 말투를 정리한 느낌이었는데 그 때문에 영화가 소설 속 주인공의 1인칭 독백같은 느낌을 들게 합니다.


이 영화의 결말은 조금 미심쩍습니다. 세진이 굳이 섬을 떠나 외국으로 가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며, 그 도피가 과연 투쟁을 다루는 이 서사의 최종 종착지가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현수는 가장 피하고 싶었던 삶으로 돌아와서 전남편에게 싸움을 선포하지만 세진은 반대로 모든 고통에서 떠나는 선택을 한 것이니까요. 오히려 남쪽나라의 공간적 환상으로 현실의 모든 문제를 덮어버리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도 지나치게 낭만화되었단 느낌이 들구요. 솔직히 너무 오글거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국가부도의 날>과 닮아있는 영화 같습니다. 김혜수 배우 본인이 펼쳐내보이고 싶은 여성 캐릭터의 야심과 입지는 확고한데 이야기가 그를 위해 복무한다는 인상을 받으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엔 모든 걸 마무리하면서 김혜수의 캐릭터가 희망을 확인하는 그 과정까지. 저는 이 영화가 이정은의 순천댁을 더 미심쩍게 그리면서 력자나 매개체가 아니라 훨씬 더 중심에 있는 사람으로서 현수와 세진의 관찰을 당하는 이야기가 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랬다면 이 영화가 뒤집고 있는 서울중심적 편견과 이유없는 구원이라는 주제의식을 더 명확하게 그려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미스테리적인 재미까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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