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저와 롯데월드를 같이 간 사촌동생에게 오랜만에 톡을 보내봤습니다. 트위터를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아버려서요. 아니 글쎄... 요새는 요오드를 요오드라고 안한다지 뭡니까. 요오드는 아이오딘이라고 한답니다. 메탄은 메테인이라고 하구요. 아밀라아제를 아밀레이스라고 부른다는 문화충격은 오래 전에 받았지만 요오드와 메탄은 좀 충격적이더군요. 아직도 헤르미온느를 허(ㄹ)마이오니라 부르지 않고 비브라늄을 바이브레니엄이라고 안부르는 이 코리아에서 언어의 대격동이... 하기사 <보건교사 안은영>을 두고 누가 갓드라마라고 했던 이유도 비슷했죠. "담탱이"란 사어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증이 충실하다고.


사촌동생 호(그의 이름 끝은 호입니다)에게 물어보니 절반쯤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호는 자기도 척추를 등뼈라고 부르고 십이지장을 샘창자라 부르고 포자를 홀씨라 부르는 건 잘 모르겠답니다. 그러면서 친구들 욕을 엄청 하더라고요. 멍청한 놈들이 신장이랑 콩팥이 똑같은 건지도 모른다면서. 그렇게 친구 디스로 시작한 그의 패기는 이내 성적 스웨그로 이어졌습니다. 이번에 반에서 2등을 했다고 하더군요. 원래 공부를 잘 하진 않았던 아이라 그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자기도 되게 신기하다면서 공부하는 맛을 좀 깨달은 것 같더라고요. 그래... 롤 랭크 올리는 것보다 성적 올리는 게 더 재미있지...  담임 선생님도 자길 엄청 챙겨준대요. 그런 관심이 뿌듯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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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 근황도 재밌었지만 더 재밌는 건 호와 대화를 나누는 저 자신의 반응이었습니다. 저 짤 전후에 걸쳐있는 전반적인 대화에서 호와 저의 세대차이를 명백히 느꼈습니다. 일단 자기가 반에서 2등한 걸 호는 성적 "떡상"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이런 저속한 말을 대체 누가 써... 싶은 그런 느낌? 공중파 방송 엠씨로서 갑자기 비속어를 질러대는 게스트를 만난 심정이었습니다. 제 또래에서는 저런 말을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제 사촌동생이 이런 말을 실제로 쓰니까 좀 신기하고 재미있더군요. 저도 욕도 하고 비속어도 쓰고 살지만 이런 디씨발 언어는 어쩐지 꺼려져서 잘 안쓰거든요. 가치판단의 영역이 아니라 순전 취향의 영역에서 이런 이질적인 언어를 쓰는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게 좀 웃겼습니다. 글쎄요. 저같으면 성적 급등이라든가 성적 상승 이 정도로 표현할 것 같은데 말이죠. 떡상이라니... 아마 제가 10대일 떄 저희 고모도 그런 걸 느꼈겠죠.


그 다음으로는 제가 필사적으로 호의 언어에 제 언어를 맞추려고 노력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누가 무슨 언어를 쓰든 적당히 맞춰주면서도 자신의 언어를 쭉 유지하는 게 인간의 자연스러운 패턴이잖아요. 그런데 호랑 대화하면서는 제가 머릿속에서 10대 아이들이 쓸 법한 쎄고 유튜브삘 가득한 단어를 찾고 있던 겁니다. 그래서 저 카톡의 편집된 다음 부분에서 저는 "머-단"이라고 해줬습니다. 저는 이런 단어를 그렇게 즐겨 쓰지도 않고 디씨하는 철없는 10대 남자애를 흉내낼 때나 쓰는데, 호랑 이갸기하면서는 진심으로 제가 그 세대의 언어에 동화되려고 애를 쓰고 있더라고요. 위에 보이다시피 유통기한은 살짝 넘었지만 합격목걸이 짤도 막 찾아서 보내고... 뭔가 애기공룡 둘리 짤을 막 보내고 싶었습니다. 아무 맥락도 안맞는데 괜히 '선넘네...' 짤을 보내고 싶고. 제가 아는 요새 애들 문화는 그 정도 밖에 없으니.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게 바로 철지난 급식체를 쓰는 3040 아재들의 추한 모습이구나... 호한테 이렇게 칭찬해줄 걸 그랬어요. 호! 찢었다!! 평상시에 진짜 싫어하는 표현인데...


그런 생각을 좀 했습니다. 왜 어른이 되면 재미가 없어지는가? 아마 겉으로는 예의를 표방하고 감정을 감추는 존댓말로서의 언어를 생활화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 언어를 쓰면서 태도와 관념까지도 좀 딱딱하게 굳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딱히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또래 사람들이라면 너무 유치하고 철없어보이는 언어는 잘 안쓰잖아요. 대화의 오십퍼센트는 "넵"이 차지하고 자유로운 언어는 어른스러움에 갇히는, 그런 한계가 명백한 존재가 되어가는거죠. 사적인 대화보다 공적인 대화의 비중이 더 커지고, 언어의 자유와 생기는 인터넷에서나 간신히 발휘하는게 어른 아닐까요. 그에 비해 10대의 대화는 늘 사적이고 자유롭습니다. 이들은 친밀하거나 동등해서 크게 눈치 볼 것 없는 또래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죠. 구속되는 것이 크지 않은 관계에서는 PC함을 초월하는 어떤 생명력이 언어안에 깃들어있는 듯 했습니다. 그것이 주로 공격성으로 표출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게 바로 젊음의 힘인가 봅니다. 호가 반에서 2등한게 뭐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막 호랑 재미있게 놀면서 제 내면의 젊음(...)을 막 증명하고 싶어했습니다. 야 형 아직 안늙었어~ 이런 것도 알아~ 저 스스로 눈치없이 신입생 엠티에 따라간 복학생이 된 기분을 느꼈습니다. 물론 신입생과 복학생의 간극보다 사촌과 저의 간극은 훨씬 크고 멀었습니다. 언젠가 사촌은 대학도 가고 술도 마시면서 더 이상 자신의 사촌형을 신기하게 보지 않게 될겁니다. 저는 주름이 늘고 피부는 삭아가겠죠ㅠ 이렇게 쓰고 보니 뇌절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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