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들이 설치는 세상

 

 

꼰대, 대부분의 학생들은 나이가 40살 넘어가는 사람을 이렇게 지칭한다. 왜 중년들이 이런 비하적 주례사로 점철되었는가? 대부분 이런 사람들이 나이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나이 차로 어떻게 해보려는 심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새로운 세기가 도래한 지금에 와서는 하나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로 인해 경제적 개방성이 오히려 심각한 패쇄 국면에 도달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엘빈 토플러는 한국 사회가 심각한 세대 차이로 인해 새로운 신국면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사실 말이지 현재의 중년들은 머리에 든 거 없이 어디서 주어들은 정치 얘기에만 급급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기계적인 돈벌이에만 평생을 바쳐 왔고, 그러니 이들이 논할 추상은 그나마 정치에 머무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상 이들에게 인문학적 성찰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벌어먹고 살기 위해 수없이 노력해왔고 요즘의 10대들은 무노동을 지향하면서 자기성찰의 기회를 가질 기회가 수없이 자아에서 교차해 왔을 것이다.

 

프랑스 지성의 최고봉 장 폴 사르트르는, 노동의 무가치성에 대해 끊임없이 예찬한다. 단순히 사회의 기능으로 남는 게 아니라 연금생활자로써 일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인간 실존을 체현함으로써, 단지 인생의 단적인 면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피상적인 것의 반대 편 즉 내(內)상적인 측면을, 그 심층적인 인간 내면의 근저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인간의 생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많은 10대들이 자기의 본질을 살려고 직장생활을 거부하고 문예나 음악, 그림에 열중하기도 한다. 필자는 벌어먹고 사는 삶, 노동해서 얻으려고 하는 유치하고 치졸한 삶, 다만 사회적 기능의 일부에 편승하거니와 눈뜨면 매일 후덥지근한 지하철에서 몇 시간을 보내는 그런 불쌍한 삶을 경멸하고 경시한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때문에 사는가? 왜 그들은 단지 세상에 그럭저럭 존속하고자 하는 원숭이적 삶을 지향하는가? 애 낳는 것이 과연 중요한 것인가? 그렇다면 자기본위는, 자아성취는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가? 틀렸다. 많은 이들이 잘못되고 몰상식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모두가 자본주의의 병폐에 찌들어 쪽도 못 쓰고 있다.

그렇다면 가난한 아이들은? 부의 정당한 분배문제는? 전쟁의 최후의 종식은 도대체 언제 쯤?

 

  자기 속성·본질·특성·영혼·성격을 간과한 채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또다른 공산주의에서 고군분투하려는 사회적 움직임은 실로 병적이다. 꼰대가 왜 꼰대냐? 주변사람들의 눈치를 슬슬 봐가며 자기 개성은 물론이거니와 남의 개성까지 말살하려는 사람을 우리는 꼰대라고 한다. 이들에게 삶은 진정 무엇이란 말인가?

왜 꼰대들은 자신의 길을 유보한 채 사회가 차려놓은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것일까? 40대들과 50대들은 모두가 정말이지 상이한 구석을 찾을래야 찾아 볼 수가 없는 게, 이들에게는 심각한 동류성의 잔재가 깊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솔직히 자기 삶과 자아를 견지하지 못함과 동시에 남을 기만하고 자기 실리만 추구하는 데 급급하고, 거짓과 위선이란 가면으로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우리네 사교생활에서 자아의 이면의 외부라 할 수 있는 표층 부분은, 대부분 허례의식과 거짓·자기기만에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쉽사리 자아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존재이며, 자신의 정당성만 해명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거니와 수없는 거짓들을 ‘참’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을 생성하는 존재이다.

 

비단 나와 너만 그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 내부적으로도 그러한 자기합리화와 법적 방종이 만연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내면, 즉 심층을 잃어버린 채 부유하는 하나의

모순체이며, 따라서 사물의 내부, 심층을 바라보는 눈도 점차 사라지기 마련인 것이다. 우리는 단지 현상의 피상적인 면만 직시할 뿐 그 현상의 이면을 탐색할 수 있는 작업에 착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모순성만을 따르는 우리네 인생에 있어 그나마 진실을 가리켜주는 것은 바로 실증과학이므로, 우리가 과학에 착목하여 지나치게 비용을 투자하는 금래의 현실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끼리의 소중한 무엇(예컨데 덕목과 사회의 미덕, 사랑과 평화)을 잃어버렸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리 추구에 급급하고 세상은 돈에 의거해, 돈을 지향하는 사회적 구조의 분위기만 팽배해진 게 사실이다. 결국 사람들은 ‘진실’이라는 문제를 논하는 것에 지쳐버렸고, 비로소 우리가 당착할 수 있는 몇 가지 현실들은 우리가 단지 ‘밥벌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르트르의 대저 [구토]에서 연금생활자 로캉탱은 이 밥벌레들을 비난하고 멸시한다. 이들은 돈을 벌려고 일을 하여 자신의 본질을 간과하는 생을 살고,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 진정한 내면적 삶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이들에게, 만일 삶에 있어 정의(定擬)를 내릴 수 있다면 그것이 본디 삶의 진실된 긍정적인 자세라는 걸 깨달은 자가

로캉탱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소유 뿐만 아니라 무노동도 인간 존재로 엄존하기 위한 지름길이라는 걸 로캉탱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구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자본주의의 노예로 평생을 살아간다. 여기서 주어지는 한 가지 명제는 이러하다. “돈을 버느냐 죽느냐(Get rich or die trying)".

이러한 소론을 논구하자면 명실공히 많은 비용히 필요하다. 돈에 의해 선택되느냐 돈 자체를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가 원론이 된 지금, 그 누구도 삶에 대한 문제에 관해 접근하기를 거부하고 또 그것을 말살하려고 혈안이 돼있다. 누구도 인문학적 물음을 제기하려 하지도 않거니와 누구도 문학적인 삶을 원하지도 않는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퇴폐하게 만들었다. 좌절을 강림하게 하였고 또한 우리가 우리 삶의 모든 동태를 단지 ‘동적인 현상’ 문제로써 조감하게 했다. 하기야 얼마나 많은 이들이 대의명분을 위한 희생과, 거대한 부를 위한 보조로서의 ‘기능’ 역할 만으로 퇴락해갔는가?

 

철학적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는 ‘외면’과 ‘내면’의 분리, 그것은 점차 현상이라는 하나의 일원론으로 접어들 때까지 우리는 어깨 위에 얼마나 무거운 관념의 짐을 져 왔는가?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신(神)의 편으로 미끄러져 갈 때에 우리는 신 역시 존재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그를 숭배하며 기도 드린다.

   

 

꼰대들이 모르는 사실이겠지만(사실상 그들에게 자기 철학이라는 것이 없겠지만), 삶은 무상한 것이다. 그러나 삶의 순간적인 것, 일시적인 것에 절대성을 둘 때 삶은 유효적인 것, 지극히 유한한 개체가 된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의 젊은 시절은 다 어디로 갔는가? 사춘기 시절에 파릇파릇한 여자애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우리가 삶을 어떤 별도의 것, 보조의 것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의식의 피안으로 나가 사물에 극단적인 객관성을 부여할 자유가 주어진다. 그것은 그러나 유보된 자유이다. 그것은 삶의 방종의 자세이다. 하나의 참미로운 그러면서도 보편적인 무엇에 우리가 주목할 때, 다른 것은 배제하더라도 거기에 베어있는 미덕을 끌어내릴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 의식이 기투의 경지까지 올라간 것을 인식할 수 있다. 그 미덕이야말로 삶의 방종과는 구별되는, 삶의 방종과는 간극에 있는 선험적인 인간 원형의 일종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다. 자의식이 있는 인간, 자의식이 없는 인간. 꼰대들은 바로 후자에 든다. 인간은 투쟁의 역사에 부딪히면 추상의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 자의식이 있는 인간, 자의식이 없는 인간. 자의식은 능력과 전혀 비례하지 않는다. 자의식이 없는 대표적인 인간이, 빌게이츠나 워런 버핏과 같은 기업가들이다. 이들은 몰자의적인 기능의 인간들이다. 이들이 대표하는 것은 한마디로 기능이다. 반면, 이들과 상반되는 형태의 경우에는 철학자나 소설가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우, 추상적이고 감성적이며, 자의적이고 자가적인 성정을 가진다. 철학자들이나 소설가들은 보통 자아의식에 그 중점을 두고 인문을 탐구한다. 이들에게 추상적·철학적 글쓰기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표상의 전격적인 근거이다. 추상을 연구하라, 삶의 체계를 선택하라, 이야기를 구성하라.

 

 

자의식이 없는 인간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래왔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춘기 시절 삶의 양가적인 선택의 통로에 당착하게 된다. 이런 미분적인 생의 길의 선택은 예술가냐, 직업인이냐 하는 이중적인 선택구조를 우리 앞에 제시한다. 왜냐하면 예술가의 길과 직업가의 길은 천명이 아니라 인생길의 일희일비하는 모순율의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적인 길, 정태적인 길은 동적인 길, 동태적인 길과 여러가지 상반성을 함의하고 있다. 예술적인 삶과, 돈을 지향하는 삶의 차이는 바로 이 다다한 이질성에 의거한 일종의 비의이다. “삶을 정갈하게 구체화하라, 삶의 추상적인 개념을 현실적인 개념으로 전향화하라.”

 

 

따라서 우리가 자아와 기능을 구분하려면, 어떤 다면적·다의적인 차원을 정확히 목표화해 걸러내야 한다. 거기서부터 사고관념과 추상이 생성된다.

 

정적인 표현과 시각화에 중점을 둬라. 하여튼 간 우리들이 마지막에 이르는 귀추는, 우리가 초기에 직면하는 근거에 그 바탕을 깔고 있으며, 그 바탕의 색깔은 검정색이라기보단 블루에 가깝다. 블루란 우울을 뜻한다. 그러니까 우리 삶의 상이성은 이 한없이 투명한 블루에서 나온다고 보면 된다. 우리 삶의 근저를 이루는 ‘우울’이라는 특성은 그

누구나 내재하고 있는 파렴치한 색깔이다. “삶에 근거하라, 삶의 양태를 살피고 바람직하게 헤아려라.”

 

삶의 방종을 극복하려면 필연적으로 자기고민에 빠져야 할 합당한 이유가 생긴다. 따라서, 삶의 방종을 극복하려면 필연적으로 자기고민에 빠져야 할 합당한 이유가 생긴다. 따라서, 여러가지 번민의 특성들이 중첩되어 결론이 도출되고, 또한 결론에 이르는 당위적인 정당성은 정합적인 요소들을 함의하고 있음이 자명하다고 본다. 도출된 결론은 그러나 끝끝내 정의를 내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정의란, 어떤 교조적인 지적 지향성이 내포 혹은 전제된 채로만 직조되어지는 모종의 몰유동적인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색채들을 배제해 놓는 가운데, 우리는 전혀 다의적이지 않는 어떤 미분화 된 선택 속에 전적으로 교착하게 된다.

 

  얼핏 방종은 나태성이나 퇴폐성이 함구하고 있는 비자의성에 그 핵심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입장을 유보하고 싶을 따름이다. 왜냐하면 방종은 일종의 도피이며 삶의 탈출구를 찾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일련의 지적 방기와 같다고 생각된다. 무릇 물체는 실로 무기적이다. 곧 물체의 중심은 무생물적인 형성의 생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으며, 순차적인 관점에서 따져도 외양적이거니와 일희일비하지 않는 정적인, 모종의 차원의 문제에 가깝다. 그러므로 우리가 판단해야 하는 유비적인 문제 즉 방종의 근본적인 문제는 언제나 심층적인 구조의 문제에 당착되는 게 즉시적으로 바람직한 전개라고 생각된다. 또한 그문제가 표명하는 층위적인 시간의식은 항시 실존적인 차원에서 국한한다.

 

왜냐하면 첫째, 그것은 공간과 전혀 무관한 지엽적인 객관이다. 그리고 항상 인간의 차원과 맞물리는 어떤 시간성을 정위적으로 견지하고 자가판단한다-판단은 언제나

자신이 아니면 그것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가 되므로, 동일자는 타자의 문제에 종속되서는 안 된다는 걸 방심하지 않는 가운데 담지 해야 한다-.

 

 

둘째, 인간 실존과 연계되어 있는 복잡다기한 개연성은 불멸에 가깝다. 따라서, 불멸이란 공간이라기보다는 시간과 연관되어 있는 부차적인 개념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명석하게 이해하고 그 진위를 변별하여 받아들여야 한다.

 

 셋째, 구조는 여러모로 비구조 즉 직관을 앞선다. 하기야 직관과 반대되는 개념에는 여느 때나 사변이성을 손꼽을 수 있다. 인류는 사변이성이 도래함에 따라 학문의 발전을 성립할 수 있었다. 사변이성은 곧 문화의 꽃이요, 문명의 총아였다. 구조가 변양됨에 따라 인간생활의 본질에도 변화가 왔거니와 인간역사의 정점에는 항시 구조적 난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런 문제들의 근저에는 온갖 아이러니와 비의가 난무하고 종래에는 비로소 소멸했는데, 이것이 그야말로 우리 생의 실존적 차원에 의거한 근거이다. 이것이 이른바 삶의 문법 즉 인생무상이라 불리는 정아한 생의 방정식, 도식이다. 

 

넷째, 후설이 말했듯 시간의식은 이성의 문제이다. 이성이란 바로 인간의 방향의식의 객관성을 축약한 집약어이다. 객관적인 인간이란 정당한 윤리와, 정치하고 보편타당한 사상체계를 구축한 소유자임과 동시에 자기기투를 각고의 노력 끝에 손에 넣는 자이다. 이런 유형은 항상 타자와 구별되는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으므로, 결코 남의 윤리에 관여하려는 발자국을 남기려 하지 않는다. 이런 착실한 객관성은 시간의 수레바퀴에서 공존하는 한 개인이 마땅히 인식해야 할 관념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같은 맥락으로써 혹은 결론으로서, 방종이라는 이름의 난제는 자기고민에 착안하여 이용할 수 있는 극점 즉 관념의 모험에 함몰되는 대표적인 자기기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기만하라, 그리하여 마침내 어떤 위대한 세계로 멀리 이르라.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뿐이다.

  

  따라서 삶을 바꾸려면 우선 삶을 움켜잡고 있는 기본 제반부터 갈아치워야 한다. 그 제반은 삶의 본래성을 근거로 하고 있으므로, 생의 본질에 대한 불같은 열정은 거침없이 타올라야 할 것이다. 열정에 스며들어 있는 희미한 속성들, 그 배면에 감춰져 있는 일면적인 내용들, 그리고 본질. 어쨌든 간에, 삶을 정초하고 있는 여러 가지 특성들은 그 윤곽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거니와, 어떤 가식 뒤에 숨어 자신의 모습을 밝히려 하지 않는다. 여하튼, 우리가 규정하고자 하는 자기 정체성의 본질은 뚜렷하게 수면 위로 자신의 내실을 제시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그 뿐만 아니라 그 배후까지, 그 밝혀지지 않은 이면까지 꿰뚫어 봐야 할 것이다. 하기야 우리네 삶이 그리도 답답한 어떤 망실(忘失)된 무엇이라면, 우리 자신이 단지 소모성이 전제되는 불분명한 존재 중의 하나라면, 우리는 우리에게 모종의 조건을 요구하는 사태들 속에서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자기 동일성을 확립해 나가야 하는가?

 

 

답은 무조건 하나이다. 필연적으로 우리를 둘러싼 배경요소들이 있다. 첫 번째로, 시간의식을 들 수 있다. 과거·현재·미래를 망라하는 시간의 내적 흐름. 이것은 바로 우리 내부적 정신의 파장의 아주 기본적인 제반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둘째로, 공간의식을 들 수 있다. 공간은 <객관주의>의 성립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사태를 구성하는 존재론적인 사고방식에서 기인한다고 예측된다. 비로소 우리가 이 시간과 공간 속을 부유(浮游)할 때, 우리 가운데 명멸하는, 전반적인 생각의 전환의 흐름은 당위적으로 우연성에서 그 패턴을 알 수가 있다. 예컨데, 우리 삶이 해명하고자 하는 삶의 문법은 근본적으로 이 패턴에서 자신의 외양을 구축한다.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면서 견지할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은, 시공의 공시성(共時性)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이며,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별해야 할 변양하는, 정치한 아이러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거시적인 변환은 반드시 한 개인의 제반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확연한 희생을 요구한다. 그리고 한 영혼으로 하여금 구조적으로 정밀한 방향의식을 촉구하려 한다. 이러한 강제적인 요구에 앞서 논리 정연한 무모순성이 강요되어야 한다는 걸 필자는 제기하는 바이다. 삶을 변별하라, 삶에게 행복을 요구하라, 삶에게 정합적인 원칙적 이론을 제시하고 또 실천하라. 그렇다. 무모순성은 인간이 자기 생을 가치 판단함에 있어 최고의 가치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제대로 살았다는 것을 자신에게 증명하려면, 우선적으로 환멸을 일으키는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를 규준하는 메타적인 원리들을 규명하고, 분해하고, 다시 재조립하여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자기가 행동하는 바가 질정을 받지 않는 지, 또한 남의 질시를 받지 않는 지, 이것이 그릇된 행동이 아닌 지 깨닫는 것이 있을 테다.

 

결론은, 삶을 바꾸려면 삶을 선택하고 과감히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답이다.

 

 

CODA : 한국 사회에 만연하는 이 세대차이는 필연이다. 젊은이들은 영원히 중년들을 꼰대라고 지칭할 것이고 이것은 절대 극복할 수 없는 21세기의 숙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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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대한 반론

 

 

와X다에서 유명한 자인데, 거기서는 이미 개무시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아직 여기에서는 신선한 얼굴이라 판단을 유보하고 계신, "인문사회에 약한" 분들의 판단을

앞당겨드리고자 간단히 설명을 붙입니다. (저는 인문사회과학을 제도권 안팎에서 공부해온(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글의 내용은, 생산적&건설적인 사회적 역할을 단 한번도 수행해보지 못한 채, 부모 피만 빨아먹으면서 기생적으로 자란 어린이의 때늦은 사춘기적 자기고백입니다.

내용은 거기까지고, 간단히 주석을 붙이자면, 건전한 가정교육을 통해서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가져야 할 삶에 대한 자세부터 제대로 정립하는 것이 학문을 닦는 길에 선행되어야 함을 무시한 살아있는 사례입니다.

내용은 별 것 아니지만, 정작 문제시 되는 해로운 '핵심'은 글의 내용이 아니라 수사법입니다. 이런 글의 본래 목적은 "인문사회에 약한" 사람을 겨냥하여 자존심을 어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글을 쓴 자는 자신의 언설이 진리에 조금아리도 가까운가 아닌가에는 전혀 무관심한 대신, 자신이 동원한 수사들이 (관심사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심오하고 그럴듯해 보이는가 아닌가에만 관심을 쏟습니다. 이는 다름 아니라 '사기'의 기술이며, 따라서  게시판을 읽는 회원들에 대한 '은폐된 모욕'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저는 모욕을 당해서 상당히 짜증이 납니다.

어쨌든 사정이 그리하니 당연히 글의 내용의 타당성도 실상 완전히 엉망일 수밖게 없는데, 굳이 이를 다 지적하지는 않겠습니다. 원전과 정통 이론에 근거한 논박은 이 자의 관점에서는 "꼰대같은" 짓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자가 진정 철학적인 '대화'를 원한다면, 비판자에게 증거를 통한 논파를 요구하기에 앞서서, 원 글의 저자가 무의미한 선언과 감상 대신 제대로 된 추리/논증 과정을 담아낸 글을 써주는 것이 먼저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추리와 논증으로 만들어낸 사기극은 논파의 대상이라도 되지만, 그 수준에도 다다르지 못한 궤변으로 만들어낸 사기극은 사회적(개무시 등) & 언어적(욕설 등) 폭력으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심하세요.
  

 

 

 

 

저의 견해

 

->  저도 이글의 반론이라고 올린 견해와 거의 유사하게 생각하긴 합니다. 그런데 김훈같은 소설가도  여러번 언급한 소위 먹고사나니즘. 밥벌이즘.있잔아요

      이 먹고 사나니즘. 밥벌이즘  자체가 숭고하다는건 잘알겠는데 이게 먹고살려면 삶의 부조리등도 일정부분 '방기'한채로 살 수 밖에 없다는 식의 결론으로 흐르는건

      또 짜증나더군요...

 

     그런걸 지적한거라면 일정부분은 유효한 부분도 있는거 같고 뭐 그렇더라구요...  빌게이츠나 워런 버핏은 자의식이 없다 뭐 이런부분은 저도 그야말로 " 견소리하고있네 --;"

     라는 말은 절로 튀어나오긴 했지만... 사실 그런말 튀어나올만한 부분이 한두군데가 아니긴 하네요. 글 첫부분 "우리 학생들은 한국에서 40대이상은 꼰대라고 부른다"

    부터 그야말로  에러의 연속이니...;;ㅎㄷㄷ

 

    뭐 떡밥또 투하한거야?라고 하기엔 댓글 많이 달릴가치도 없는글일테고 그냥 일종의 자료? 정리하다가 듀게에도 가볍게? 올려본 측면도 있으니 왜 자꾸

     이상한? 주제를 끌어오냐?는 태클은 많이 안달렸으면 하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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