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8 13:33
- 1993년작이니까 27년 묵은 영화네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당시 홍콩 인기작들을 물리치고 이 영화가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다는 게 신기하지만, 암튼 스포일러는 없게 적어 보겠습니다.
(원래 제목은 적각'소자'였나봅니다. 뭐 영어 제목도 베어풋 '키드'이긴 해요)
- 배경은 '옛날 중국'입니다. 구체적인 시기나 배경은 없었던 것 같구요. 사실 그런 게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구요.
암튼 영화가 시작되면 동글동글 강아지 같은 인상의 곽부성이 이마에 '나는 천진난만한 어린이와 같다!!!'고 써붙이고 다니며 여기저기 쿵쿵 부딪히면서 몸개그를 선사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장만옥도 만나고 오천련도 만나고... 하다가 최종적으로 적룡을 만나죠.
곽부성은 군인이었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은 아버지에게서 시골에 처박혀 무술만 배운, 자기 이름도 못 쓰지만 겁나게 싸움 잘 하면서 정신연령은 초딩이고 마음은 참 순수하다... 는 일본 만화 주인공 같은 스펙의 주인공이구요. 아버지가 자기가 죽으면 자신의 옛 동료였던 적룡에게 찾아가 도와달라 그러라고 했었나봐요. 그리고 그 적룡은 과거를 숨긴 채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비법 염료로 잘 나가는 직물 공장 주인 장만옥을 도우며 살고 있구요. 우연히 마주쳤던 오천련은 그 동네 최고 지식인이자 마을 훈장 노릇을 하고 있는 아저씨네 딸이자 본인도 서당(?) 선생입니다.
그런데 이 동네를 장악하고 있는 포악한 조폭 집단 하나가 장만옥네 직물 공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게 문제이고. 싸움만 잘 했지 그 외엔 그냥 멍충멍충 어린이 수준인 우리의 주인공 곽부성군이 자꾸만 본의가 아니게 사고를 치면서 이야기가...
(똘망똘망 귀여운 곽부성씨! '사실상 바보' 연기가 의외로 되게 잘 어울립니다. ㅋㅋㅋ)
- 런닝타임이 무려 80분대(!!)입니다. 한 시간 반도 안 되는 거죠.
근데 다 보고 나면 한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본 듯한 기분입니다. 지루한 게 아니라, 전개가 엄청 빨라서요. 다다다다 계속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인물들이 변하고 상황이 변하고 그러는데 그 와중에 할 건 다 하고 리듬을 적절하게 맞춰내는 게 신기할 정도. 아니 보통 영화들이 끝나기 한 20분 전에는 이제 그냥 클라이막스 제시 & 마무리 모드 아닙니까? 근데 이 영환 그 후에도 참 일이 많이도 일어나요. 보다가 남은 시간 확인하고 신기했던. ㅋㅋㅋ
- 그리고 살짝 잡탕 영화입니다. 코믹한 소년 활극처럼 시작했다가 멜로로 갔다가, 어두컴컴한 스릴러 요소도 가볍지 않게 녹아 있고 막판엔 비장미 좔좔 흐르는 정통 무협물로 가죠. 두기봉에 대한 평들을 보면 '건조한 느와르물로 유명하지만 원래는 아무거나 되는대로 다 만들면서 다 잘 만들던 사람'이란 얘기들이 많은데, 이 영화로 대충 증명이 됩니다. 80분이라는 시간의 한계상 이 장르 저 장르가 조금씩 조금씩 들어가 섞여 있는데 각 부분부분이 다 생각보다 탄탄하고 괜찮아요. 게다가 그게 또 자연스럽게 이어 붙여져 있구요. 물론 90년대 홍콩영화스럽게 나이브하고 천진난만한 전개가 많긴 합니다만, 이게 93년 홍콩 영화이니 그게 흠은 아니겠죠.
(오청련이냐 오천련이냐!! 예쁘냐 안 예쁘냐!! 등등 숱한 논란(?)의 주인공이었던 오천련씨. 풋풋합니다! ㅋㅋ)
- 근데 사실 이게 막 되게 훌륭한 영화냐... 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애매하네요.
아마 이 영화의 첫 10분과 끝 10분을 이어서 본다면 그냥 아예 다른 영화로 보일 거에요. 그만큼 톤이 급격하게 오락가락하는데, 그걸 자연스럽게 붙여 놓은 감독의 역량은 인정해야겠지만 끝까지 재밌게 보고 나서 전 좀 사기 당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아니 이런 식으로 끝낼 거면 시작은 왜 그런 식으로 한 거야. 정신 없이 마구 달려대는 통에 속아버렸네... 이런 기분. ㅋㅋ
재미가 없었단 얘기가 아닙니다. 캐릭터나 스토리가 개연성이 없다는 것도 아니구요. 그저 정말로 예상을 못한 방식의 결말이어서... orz
(이 분을 보고 '추룡'이란 이름을 먼저 떠올리신다면 저보다 더한 탑골 멤버...)
- 암튼 뭐 더 길게 얘기할만한 건 없네요.
두기봉의 필모그래피에서 특별히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일은 영원히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양반의 능력에 대한 증빙 자료는 될 수 있을 영화입니다. 액션은 화려하고 멋지고 캐릭터들도 매력이 있고, 어두컴컴하고 비열 음침한 분위기부터 천진난만한 코미디물, 애틋한 멜로, 비장한 무협 영웅들의 이야기까지 다양한 톤의 소재들을 모두 고퀄로 구현해서 80여분 동안 내던져대니 그 시절 홍콩 영화들 많이 본 분들이라면 누구나 재밌게 보실 거에요.
덤으로 추억의 홍콩 스타들이 다들 뽀송뽀송하고 풋풋한 모습으로 나와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니 뭐. 탑골 회원 분들이라면 한 번 시도해보실만 합니다.
아주 재밌게 봤어요.
+ 주인공들 중 장만옥의 사진을 아직 안 올린 건
따로 찬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ㅋㅋㅋㅋ 조금 더 나이 먹고 원숙해진 후의 아름다움도 멋졌지만 이렇게 젊고 풋풋하던 시절도 참으로 아름다우신.
당시에 친구들과 '홍콩은 그 작은 나라에 왜 그렇게 예쁜 여자랑 잘 생긴 남자가 많을까?' 같은 대화를 쓸 데 없이 진지하게 하던 기억이 떠올랐네요.
연기도 좋았어요. 흔한 '무술은 못하지만 당차고 강한' 조연 여성 캐릭터였는데 존재감이 워낙 강해서 있어 보이더라구요.
++ 두기봉이 미장센도 참 잘 꾸미는 사람이다... 는 생각은 전부터 해왔지만 지금껏 제가 봐 온 팍팍한 도시 느와르물과 전혀 다른 풍의 영화를 보니 또 다르게 와닿더군요. 장만옥과 적룡의 데이트 장면 같은 건 정말 화사하면서도 차분하고 슬프게 예쁘더라구요 화면이.
+++ 오천련과 곽부성의 투샷을 보면서 ? 하고 찾아봤더니... 오천련 키가 168, 곽부성 키가 172네요. 오천련이 그렇게 큰 줄 몰랐고 곽부성 키가 그만큼인 줄도 몰랐습니다. ㅋㅋ 특히 곽부성은 비율이 좋아서 그런지 당연히 180 넘을 줄 알았는데, 영화에서 둘이 키가 비슷해 보이더라구요.
++++ 두기봉은 맥거핀스런 소재를 활용하는 전개를 좋아하나 봅니다. 초반에 의미 깊고 중요하게 폼 잡으며 등장하는 소재(이자 주인공들의 목표물)가 후반에 가면 별 의미 없어지는 식의 전개가 많아요. 의도적으로 관객들의 주의를 다른 데로 끌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고, 걍 언제나 '목표 달성'보다는 그저 주인공들, 특히 주인공 집단들간의 상호 작용과 드라마 쪽에 중점을 두고 목적이나 결과 자체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생각해보면 이 영화도 흐릿하게나마 요즘 두기봉의 이야기 스타일이 들어 있습니다. 반목하는 집단이 나오고, 인물들, 집단들간의 관계가 수시로 변화하구요. 스포일러는 빼고 얘기하자면... '아버지가 남긴 물건'이 막판에 아무 의미 없는 것도 그렇죠.
2020.12.28 14:32
2020.12.28 14:49
장철이 만든 원작 영화의 제목은 '홍권소자'였는데 홍가권이라는 무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라서 별로 안어울린다 싶었어요. 무술감독이었던 유가량이 홍권전문가였으니까 제목부터 정해놓고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두기봉의 리메이크에서는 내용상 중요한 포인트인 맨발(적각)을 제목에 내세웠죠.
2020.12.28 14:58
이게 리메이크였군요! 몰랐습니다. 적룡 나온 것만 봐서;; 보니까 부성이 주인공이네요. 적룡 영화보다보니 덩달에 눈에 익었던 배우라. 아깝게 요절...
2020.12.29 09:08
검색을 해 보니 정말 리메이크가 맞네요. 설정의 디테일은 많이 바꾼 것 같습니다만 기둥 줄거리는 똑같은 듯 하구요.
다만 정보가 많진 않네요. 돌도끼님 대단하십니다. ㄷㄷㄷ
2020.12.28 14:55
젊은 시절 적룡은 우주 최고 미남 인정입니다. 얼굴에다 키와 몸매까지도 너무나 아름다우셨음.
2020.12.29 09:09
몇 년 전인가에 아무 생각 없이 한 번 검색해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니 이렇게 미남이었다니! 같이 영웅본색에 나왔던 젊은이(?)들과 비교해도 오히려 우월하지 않나 싶은 비주얼!!!! ㅋㅋㅋ
2020.12.29 09:06
정말 배우들 매력이 철철 넘쳐서 더 보기 즐거운 영화였던 것 같아요. 사실 전 곽부성은 잘 생겼지만 배우로선 뭐 좀... 이런 느낌이었는데 이 바보 강아지 캐릭터가 너무 잘 어울려서 좀 놀랐습니다. ㅋㅋㅋ 어떻게보면 두기봉이 배우들 매력을 잘 살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 싶기도 하구요. 이 사람 현대 범죄물을 봐도 등장인물들 다 나름 매력있잖아요.
장철 영화들은 솔직히 본 게 거의 없어서, 그나마도 어렸을 때 멋모르고 봐서 잘 모르겠습니다. 걍 싸움 장면 멋졌다... 라는 흐릿한 인상만 남아 있네요. 그 분 영화도 찾아봐야 하나요. ㅋㅋㅋ
그렇게 소품인 게 더 두기봉 취향인 것 같기도 해요. 가만 보면 이 아저씨 의외로 그렇게 거창한 스케일 영화가 많지 않더라구요. 지구 멸망을 막고 나라를 구하는 동방삼협 같은 영화도 있긴 하지만서도... ㅋㅋ 곽부성 캐릭터는 좀 그렇지만 초반 분위기가 워낙 해맑아서 속아버렸네요. ㅠㅜ
2020.12.29 10:47
오청련이냐 오천련이냐!! 예쁘냐 안 예쁘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 논란 정말 오랜만이네요.
'스크린' 잡지에 실린 사진을 보면서 당췌 어디가 예쁜지 모르겠다 싶다가도 활동영화 속 모습을 보면 '아...이쁘긴 이쁘네...'싶기도 하고.
그당시 홍콩 영화 속 배우들 얼굴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아, 뭐 요즘도 인물들이야 준수하지만 당시 배우들이 보여주던 그 강렬한 인상은 왜 안나는지....
2020.12.29 11:23
오천련의 비주얼은 살짝 연구 대상의 느낌이 있습니다. 솔직히 이 영화 보면서도 처음엔 '음? 왜 이렇게 안 예쁘지??' 라고 생각했는데 보다보니 또 매력있어서 끝날 때쯤엔 예뻐 보이더라구요. ㅋㅋ
딱 그 시절에 먹히던 매력이랄까... 그런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개인적으로는 당시 한국 배우들 대비 매력이 쩔었던 게 아닌가 싶구요. 당시야 뭐 한국 영화는 거의 고사 궤멸 직전이었고 예쁘고 잘 생긴 배우들 대부분을 티비로만 접했는데 그 시절 한국 티비 컨텐츠라는 게 대부분 뻔할 뻔자이다 보니 홍콩 영화 속 히어로, 히로인들 같은 방향으로 매력적인 캐릭터를 보여줄 기회가 별로 없었죠.
2020.12.30 10:49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 DJUNA | 2023.04.01 | 34918 |
공지 |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 엔시블 | 2019.12.31 | 54245 |
공지 |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 DJUNA | 2013.01.31 | 364683 |
114737 | 좋은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인가? [2] | 사팍 | 2021.02.01 | 562 |
114736 | 해고자의 반박 [8] | 사팍 | 2021.02.01 | 1097 |
114735 |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 3 1 [8] | daviddain | 2021.02.01 | 316 |
114734 | 펜팔 친구 [7] | 은밀한 생 | 2021.02.01 | 504 |
114733 | 오 마이 그랜파/ 럭키 (영화얘기) [6] | 채찬 | 2021.02.01 | 334 |
114732 | 저런 식으로 하니까 망하지. [1] | ND | 2021.02.01 | 734 |
114731 | [안철수속보] 금태섭 만나겠다. [5] | 가라 | 2021.02.01 | 670 |
114730 | 류호정 사건의 정리 [56] | forritz | 2021.02.01 | 2268 |
114729 | 고등학생으로 나온 스티브 맥퀸 [7] | daviddain | 2021.02.01 | 526 |
114728 | 오늘 KFC 하루종일 치킨 1+1 하네요 [2] | 예상수 | 2021.02.01 | 447 |
114727 | [주간안철수] 금태섭에게 일기토 도전 받은 안철수는 '상황봐서' 라며 피해 [7] | 가라 | 2021.02.01 | 544 |
114726 | 넷플에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떴더라구요 ~ [2] | 미미마우스 | 2021.02.01 | 457 |
114725 | 조커(2019) [1] | catgotmy | 2021.02.01 | 378 |
114724 | 이런저런 잡담...(월요일) [1] | 여은성 | 2021.02.01 | 279 |
114723 | 아마추어 정의당 [9] | 사팍 | 2021.02.01 | 733 |
114722 | (노스포)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보고 왔습니다 [2] | Sonny | 2021.01.31 | 552 |
114721 | [정치바낭] 성향차이, 정의당 스릴러 [6] | 가라 | 2021.01.31 | 765 |
114720 | 부당해고는 아니고 그냥 정의당과 류호정의 함량미달인거 [8] | soboo | 2021.01.31 | 1134 |
114719 | 그 당이 민주당이었으면 2 [3] | 메피스토 | 2021.01.31 | 524 |
114718 | The dig 아주 좋네요 [7] | 가끔영화 | 2021.01.31 | 419 |
적각비협이닷! 비스듬히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 만지작 거리다가 바로 PC앞에 앉아 로그인 ㅋ
곽부성은 과거 4대 천왕시절에도 아무 관심없었는데(한국에서의 인기 역시 그 전세대 홍콩스타들에 비해 흐릿한 편이긴 했죠) '멍충멍충 어린이' 캐릭터가 잘 어울리기도 하고 본인도 잘 하고^^; 장만옥도 진짜 넘넘넘넘 이뿌죵. 캐릭터도 넘 멋지고. 데이트 장면도 지가 막 쿵쾅쿵쾅. 제 맛폰엔 이 영화 스샷 짤이 여러개 있더랩죠;; 장만옥 이쁜 거야 알았지만 제게는 적룡의 재발견이라고 해도 좋을만한 영화였음다. 덕분에 적룡 옛 영화까지 싹 찾아보구선 이 분이야말로 우주 채고 미남이시다란 확신을 굳혔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우신 분! ㅎㅎ
중심되는 소재는 하나 있죠. 신발이요. 보통의 홍콩 무협물과는 차별화되는 두기봉만의 작가적 스멜이 진하게 배어있는 장치랄까요. 하지만 배운 자들의 교활함을 그리는 것도 잊지 않고요. 현대물에서 조직을 가차없이 냉담하게 바라보리라는 게 이 영화만 봐도 예상이 됩니다. 본인의 작가적 테이스트를 반영하면서도 적룡이란 배우에 대한 예우와 더불어 장철에 대한 오마주를 적절히 조화시켰다는 것도 영화의 또다른 장점같습니다. 나중에 안 거지만요. 그 전에 장철 영화를 봤던 건 아니었는데 클라이막스의 그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긴 했거든요.
사건의 스케일로만 따지면 소품입니다만 두기봉만의 각인을 확실히 보여준 홍콩 무협물인 듯요. 결말을 예상 못하셨다니 그건 의외네요. 곽부성 캐릭터 자체가 파국을 몰고오는 그런 유형이라..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