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0월 쯤에 꿈결처럼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최악의 악몽이 되는 것에는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인연의 어긋남이었으면 그나마 괜찮았을 걸. 굉장히 황당한 경우로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화를 내는 것도 잊고 서툴게 그 사람과의 인연을 끊어버려야 했습니다. 사실은 괜찮았어요. 울지도 않았고 밥도 잘 먹었고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 잘 웃기도 했습니다. 다만 컵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누군가가 한 방울의 어긋남을 제게 떨굴 때면 제 자신이 어찌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마음의 요동은 살면서 언제라도 겪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다만 그 이후로 매사에 집중을 하는 것이 매우 힘들어 졌습니다. 아니 생각이라는 것을 잘 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건망증이 늘어만 가고 내가 했다고 생각했던 행동들을 실제로는 하지 않았고 내가 하지 않았다고 했던 행동들이 실제로는 내가 했다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회사 일을 하는 것에는 치명적으로 좋지 않았습니다. 조금이라도 난이도가 있는 일이라면 어김 없이 신입들도 하지 않는 실수를 하기 마련이었고 기존에 관성처럼 해오던 일도 더 느리게 처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누군가의 질책을 듣게 되고 스스로의 자책으로 인해 조금은 더 견디기 힘든 일상을 보내게 됩니다.
 
 몸이 자주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한 달간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하고 감기에 심하게 걸리거나 소화를 제대로 못하기도 해요. 최근에는 등이 매우 아파서 아침에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가끔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땀이 비 오듯 나기도 해요. 아플 때면 병원에도 꼬박꼬박 가고 몸에 좋다는 건강 식품도 꾸준히 챙겨 먹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저의 증상을 보고 갱년기라고 하고 운동하는 습관을 가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운동은 잘 못해요. 몸이 무겁고 제가 좋아하지 않는 습관을 가질 만큼 지금 저의 의욕은 강하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행동들을 더 많이 하려고 했습니다. 친구들과 혹은 혼자 여행을 가기도 하고 습관처럼 공연을 보고 저의 취미로 삼는 물건들에 대한 구매가 늘어만 갑니다. 맛집을 찾아가는 열정도 잊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선택할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기도 했어요. 그리고 이런 시간을 보낼 때면 즐거워요. 하지만 종종 현실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무엇인가 내가 기억하는 일상과 실제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이 어긋나 있다는 이질감. 이것은 마치 어느 순간 평행우주로 내가 날아와서 살고 있는 듯한 묘한 기시감과 부유감을 가져다 줍니다. 통증이 나를 지배할 때 내가 살고 있는 것을 깨닫지만 그만큼 살아있음에 대한 당위에 대해서도 회의감을 가지게 합니다.

 

 어느 순간 무너져 버린 도미노는 처음에는 저의 작은 파트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 무너짐은 멈추지 않고 있고 조금 더 크고 많은 도미노를 쓰러트립니다. 이것이 언제 멈추어지는 것인지 혹은 어떻게 멈출 수 있는 것인지 알고 싶어집니다. 사실은 최근의 저의 슬럼프들이 크게 연관 관계가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실패도 일에 대한 실패도 건강에 대한 실패도 각각의 원인은 다른 것이고 그에 대한 대처의 미비함과 저의 능력과 노력이 모자라서 발생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각각을 연결한 도미노를 쌓아놓고 있고 하나가 무너질 때마다 다른 도미노들마저 연쇄적으로 더 빠르고 많이 무너집니다.

 

 지난주는 완전히 저를 공황 상태로 빠뜨리는 상황이었습니다. 해외 출장이 예정되어 있던 와중에 손에 꼭 쥐고 있던 여권이 단 10미터의 걸음을 걷던 와중에 사라져 버려 어찌어찌 긴급여권을 발급받느라 출장이 하루 늦어지는 와중에 하물며 바쁘게 간 출장지에서의 첫날에 엉뚱한 개발 중인 소스를 뒤엎어 버려 버그를 만들어 버리기도 했고 그것을 개선하려고 하는 철야를 하는 저의 노력은 더 큰 버그를 양산해서 어찌할 지를 모르고 허둥대기만 하다가 결국엔 제가 손을 놓아버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려야만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목이 매우 아파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어요. 나쁜 환경에서의 출장은 자주 다녀 봤지만 제 자신이 최악의 환경이 되어버린 출장은 정말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강한 현실 부정이 발생되어 이 현실 세계의 탈출구를 상상해 보기도 했지만 전 매트릭스 안에 갇혀 있는 네오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고 지금 이 상황은 깊은 한숨으로 밖에 대체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지난달에 낙산사로 바다를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바다의 일부가 파도로 부서지고 부서진 파도가 다시 바다로 되는 것을 보면서 삶은 번뇌로 부서지고 부서진 번뇌는 다시 삶이 된다는 마음의 위안을 잠깐 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번뇌가 부서질 때마다 더 큰 노도로 나 자신에게 되돌아 온다면 이것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하지만 전 낮아진 자존감과 사라진 집중력을 병원에서 회복시켜 줄 수 있을지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예전에 꽤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서 우울증 관련 치료를 받아 봤지만 큰 효과는 받지 못했고 그에 대한 저의 해결책은 좋아하는 취미와 사람의 장점을 더 많이 발견하는 삶을 긍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좋은 것을 누리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나머지 나쁜 것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내성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일 적으로 가장 큰 위기는 지나간 상황이고 남은 출장 기간에는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나를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지 모릅니다. 앞으로 다시 무너지질 모르겠지만 잠깐이라도 전 무너져가는 도미노가 잠시라도 멈추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망설이기만 해서는 되는 일이 없을 테지만 저는 지금 좀 지쳐 있는 상황이고 일단 몽롱한 기분으로 일어나는 아침 대신에 깊은 잠 뒤에 이어지는 청명한 느낌의 아침을 가장 먼저 맞고 싶어요. 우선은 고민을 지우는 일부터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0071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907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9386
114168 고양이 또또 [21] 칼리토 2020.12.07 655
114167 우리는 하루 앞도 내다볼 수가 없죠. 2021년 [4] 산호초2010 2020.12.07 516
114166 결전을 앞두고 [16] 어디로갈까 2020.12.07 965
114165 마지막 시장한담..과열인가 버블인가? 시그널과 노이즈. [9] 무도 2020.12.07 638
114164 길고양이X : 동네 고양이O 구워리 [14] ssoboo 2020.12.06 495
114163 아직 애플뮤직에서만 들을 수 있는 팝 2곡, 혼돈의 그래미 예상수 2020.12.06 340
114162 이제야 이유를 알았어요.(내용은 지움) [5] 구름진 하늘 2020.12.06 817
114161 영화를 보러 갔는데 [7] daviddain 2020.12.06 519
114160 제가 겪고 있는 병의 자살률은 일반인의 8배 [12] forritz 2020.12.06 1264
114159 코로나 시대의 만남과 소통의 방식은 역시 온라인? [6] 산호초2010 2020.12.06 440
114158 프리키 데스 데이 재밌네요 [2] 정규군포 2020.12.06 338
114157 PD수첩 ,아동 성범죄자들의 범죄 재발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건? [3] 산호초2010 2020.12.06 518
114156 연말연시 모임하시나요 [5] 메피스토 2020.12.05 677
114155 일본뉴스를 보는데 화제인 만화 [4] 예상수 2020.12.05 712
114154 [EBS1 영화] 위트니스 [31] underground 2020.12.05 627
114153 [영화바낭] 유청운 & 유덕화, 정이건의 두기봉 영화 '암전' 1, 2편을 봤습니다 [8] 로이배티 2020.12.05 948
114152 바낭) 머리카락 잘리는 꿈을 두번이나 꿨네요ㅋㅋ... [2] 하워드휴즈 2020.12.05 558
114151 코로나 얼마나 참아야 하는걸까 [8] beom 2020.12.05 1070
114150 시부야, 범 내려온다 [2] 예상수 2020.12.05 538
114149 테넷 보았습니다 [2] 가끔영화 2020.12.05 46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