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127시간을 보러 갔어요. 어떤 내용의 실화를 영화로 각색했다는 사전 정보를 전부 가지고 있었는데도

그렇기 때문에 스포일러랄 것도 별달리 없는 내용을 관객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있게 설명해놓았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문제의 그 장면이 나오기 한참 전부터

사고로 돌에 팔이 끼고, 당황한 아론이 물을 벌컥벌컥 마시다가 아 이러면 안 되지 싶어서 얼른 물통 뚜껑을 닫는 장면

딱 그 즈음부터 후회가 되기 시작하더라고요. 아 내가 왜 이런 영화를 보러 왔을까.

생각해보면 저는 결핍을 아주 싫어합니다. 약간 병적일 정도

이를테면 집에 꼭 있어야 하는 것(화장실 휴지라든지, 쌀, 라면 등 생필품은 물론이고, 양파, 우유, 커피 같은 것까지도요)이 떨어지는 상황을 못 견뎌요.

그래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게 늘 비축해두고 살아요. 저의 냉장과와 식품 선반은 늘 가득 차 있죠.

그런데 물과 식량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를 찬찬히 지켜봐야 하는 건 거의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어요.

시계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몇 번이고 127시간이면 만 5일 하고도 7시간이니까 하고 앞으로 남은 시간과 남은 영화의 분량을 가늠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의 마침내 마지막 날 환각 상태에 빠진 아론이 팔을 자르는 그 부분이 지났을 때

굉장히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는 게 느껴졌어요.

아, 뭔가 심한 걸 보면 토나온다는 표현이 있는데, 그게 괜한 표현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이제 협곡에서 탈출하는 그 만큼만 남았을테니까 곧 끝나겠구나 싶었지만, 도저히 안 되겠어 옆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스크린 옆에 달린 문을 열고 나오니 바로 화장실이 보여서 뛰어들어갔는데

화장실 문을 닫자마자 급격히 어지러움이 몰려오면서 사방이 핑핑 도는 느낌과 함께 바닥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어요.

순간적으로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이대로 끝인가 싶고, 

그런데 동시에 아 이게 영화 뒷 내용은 이렇게 되는 건가 하는 느낌이 들었던 게 영화에 깊이 이입되어 있었던가봐요.

그대로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려는데 마침 제가 있는 칸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옆칸에 극장 여직원이 들어가는 걸 본 생각이 났고, 인기척이 들렸기에

안 나오는 목소리를 쥐어 짜서 도와주세요 라고 소리질렀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화장실 문을 간신히 열고 나와서 직원의 부축을 받아서는 조금 괜찮은 것 같아서 

화장실에 다시 들어갔다가 또 쓰러졌어요. 결국 남직원 등에 엎혀서 사무실로 끌려갔습니다.

마침 옆칸에 사람이 있었던 게 다행이었지요. 상영관 안쪽 화장실이라 인적도 드문데 사람 없었으면 그대로 쓰러져서 기절했을 것 같아요. 

극장 직원들도 놀라서 119도 부르고, 같이 영화 보러 갔던 제 일행도 불러오고(다행히 영화는 끝난 다음이라 다른 관객들한테 폐는 안 되었겠지요)

그래도 사무실 의자에 앉아 따뜻한 물 한두잔 얻어 마시고 좀 지나니 정신이 들어서 금방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119에는 괜히 민폐 끼친 것 같아서 죄송하더라고요. 조금만 더 정신이 있는 상황이었으면 직원에게 괜찮다고 했을텐데 그럴 정신은 없었고;

그런데 참, 제가 원래 육혈이 난무하는 고어씬 잘 보거든요. 공포영화나 호러 장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볼 일 있으면 그냥 봐요. 장르물도 그렇고;

보고 불쾌해지는 경우는 있어도 이렇게 육체적으로 고통을 느낀 건 처음이에요.

평소에 차멀비 배멀미도 없고, 국내에 있는 놀이기구 중에 못 타는 거 없고, 어디 건강 안 좋은데도 없고, 그런데 어제는 참 왜 그랬을까요.

그냥 영화가 너무 힘들면 사람이 쓰러지기도 한다는 것을, 가끔 영화 사이트나 잡지 같은 데서, 혹은 홍보 문구로나 쓰일 법한데

직접 겪고 나니 참 어이도 없고, 웃음도 나요.

주말이라 병원을 따로 가진 않았고, 가까이 아는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니 그냥 쇼크 상태면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괜찮을 거라고 하시는데

졸지에 하드한 영화 보고 쇼크 받은 사람 되었네요. 뭐랄까, 가녀린 아가씨가 된 기분입니다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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