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멋대로 써라

2020.11.07 12:09

어디로갈까 조회 수:757

어제 퇴근무렵, 다른 부서라 친밀한 교류는 없는 동료가 제게 다가와 은밀한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데릭 젠슨을 알지?"
십 초 정도 뇌세포의 깜박임 후에 기억난 작가, 데릭 젠슨!  15년 전쯤에 읽었던 책이, 까맣게 잊고 있던 책이 난데없이 소환되는 경이로움이란.......
<네 멋대로 써라 Walking on Water >. 책에서 그토록 많은 대화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책이었어요. '책'이라는 매체가 아니라면, 먼 미국 땅의 강의실과 교도소에서 떠든 이런 생각을 내가 어떻게 접할 수 있겠는가 고맙기도 했었고요.

글쓰기 방법론을 담은 책은 적지 않게 나와 있습니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가 대표적인 스테디셀러겠죠. 데릭 젠슨은 그런 책들의 장점과 재미를 살리면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돌파구를 제시합니다.
언어란 살아 있는 것이죠. 죽은 자의 글이 산 자에게 읽히고 산 자의 글이 다른 산 자에게 읽힐 뿐, 글은 결코 죽은 자에게 읽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글의 주인인 산 자를 억압하는 죽은 언어들이 난무하는 경향이 있어요. 젠슨은 이런 현실에 분노와 야유를 보내며, 글의 본래 목적 - 소통과 이해, 치유와 반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해법을 적고 있습니다. 
 "살아있다면 오직 쓰고, 읽고, 말하고, 들으라. 글의 내용과 형식을 통제하는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말라."  

이 책을 읽은 후의 첫소감은 '문학인의 아나키즘이로군'이었습니다. (홈페이지를 찾아가보니 과연 소개 문구가 "anarcho-primitivist writer Derrick Jensen"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
젠슨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의 <밖>에서 배우려고 하지 말라", "너를 너 자신이 되도록 존중하고 사랑하라"입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저는 시론 poetologie으로서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 또한 강력하게 그렇게 읽을 만한 것이었어요. 다만 이 책은 수업이라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독학자나 학생의 입장에서는 '입장의 이입'을 위한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천천히 읽어야 하는 책이죠. 

그런데 어제 동료는왜 난데없이 저 작가를 아냐고 제게 물었던 것일까요? 안다고 하자 다만 끄덕거리기만 하고 어떤 질문도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의식의 횡단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법이고, 모든 질문에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으나 새삼 갸우뚱 갸우뚱~ -_-

(역시나 독서노트를 뒤적였더니 이 책의 몇 구절을 기록해놓은 게 있어서 반만 옮겨봅니다.)
 
- 많은 사람들에게 글이 가 닿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이 전달하려는 것을 그들이 다시 한번 겪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최선의 방법은 그들이 꽉 붙들고 매달릴 수 있는 이미지를 그려주는 것이다.

-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 등급 매기기를 원하는 사람, 모든 강한 의견과 강한 충동 앞에서 얼버무리는 사람. 그런 사람은 가치 있는 걸 쓰지 못한다.  우리 안에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백 명'이나  들어 앉아 있다. 물론 그 각자마다 자기 생각이 있다.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그들의 말을 받아적기만 해도 좋은 글이 되게 마련이다.

- 학교 교육은 미래의 삶을 위한 훈련이다. 읽기와 쓰기, 셈하기를 웬만큼 가르쳐주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끔찍이도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성공을 부러워하는 마음,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음을 서서히 불어넣어 주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나는 산업문명이 싫다. 그게 지구에 저지르는 짓 때문에, 그게 공동체에 저지르는 짓 때문에, 그게 사람이 아닌 것들 하나하나 - 길들었거나 길들지 않았거나 모두- 에게 저지르는 짓 때문에, 
그게 사람들 하나하나 - 길들었거나 길들지 않았거나 모두 -에게 저지르는 짓 때문에,

- 나는 임금경제가 싫다. 그것이 사람들이 제 삶을 팔아 사랑하지도 않는 일들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고 자신들 보금자리를 망쳐버리라고 보상을 주기 때문에.

- 난 산업적인 학교 교육이 싫다. 그것이 유일하게 용서 못할 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학교 교육은 사람들을 자신에게서 멀어지도록 이끌고, 노동자가 되도록 훈련시켜, 더욱 더 충성스런 노예가 되어,  더욱 더 열렬히 문명이라는 노예선을 지옥으로 저어가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이롭다는 확신을 불어넣으며, 마주치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그들과 더불어 파멸시키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과정에 한 몫 거들고 있다.

- 나는 학생들이 지구를 갈수록 더 파괴하는 일에 제 몫을 다하도록 훈련받을 때, 학생들이 거대한 산업기계 속의 톱니바퀴 구실을 하느라, 더 나쁘게는 거대한 공장이자 노예 수용소의 감시인 구실을 하느라, 그들이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으로서의 타고난 권리를 팔아치우는 마지막 단계로 들어섰을 때, 학교가 조금 더 입맛에 맞도록, 조금 더 재미나도록 만드는 걸 돕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나를 협력자로 만들지 않는가?  본.질.적.으.로. 라는 말은 빼자.

- 아우슈비츠 같은 집단 수용소에서 일한 의사들 중 많은 이들이 수용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힘닿는 한 모든 일을 했다고 한다. 단 하나 가장 중요한 것만 빼고 말이다. 
그건 바로 아우슈비츠라는 현실에, 그들이 그 아래에서 수술하는 잔혹 행위를 유발하는 상부구조물에, 의문을 던지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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