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6 11:27
원래도 그랬겠지만, 이제 모든 것이 이미지의 시대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이미지란 외모나 태도에서 보여지는 판타지로서 그 사람의 능력이나 도덕 같은 "실체"의 반의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미지를 뒷받침하는 게 실체이고 그 실체를 효과적으로 부풀리는 게 이미지라면 이제는 실체와 전혀 무관하게 극대화된 이미지만이 진실을 초월하는 무게를 갖는 것 같습니다. 저는 트럼프가 대선에 출마했고, 그가 공화당의 유력한 후보로 지난 대선에서 각광을 받을 때도 굉장히 충격을 받았는데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에는 정말 놀랐고 굉장히 우울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코로나 사태와 BLM 사태에서도 완전히 최악의 대응만을 했음에도 그에게 대통령의 자격을 주려는 사람들을 보면 이건 단지 무관심이나 이기주의자들의 취사선택이라기보다는 최소한의 객관적 판단을 무력하게 만드는 아주 강력한 환상적 이미지가 전 세계적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이건 영화의 스펙터클과 비슷한 효과입니다. <트랜스포머 1>을 두고 이동진 평론가가 스무자 평을 대략 이렇게 썼었죠. "뭔가 굉장히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착각". 저는 그 평이 아주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트랜스포머>는 눈뜨고 보기에는 낯뜨거운 스토리와 설정으로 점철된 영화이지만 그 영화가 재미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트랜스포머들이 환상적인 씨지 아래에서 변신을 하거나 싸우는 장면들이죠. 특수효과의 한 장면이 영화 전체에 대한 감상을 송두리째 집어삼킵니다. 물론 특수효과가 발달한 지금은 트랜스포머를 보면서 쩐다!! 지린다!! 하는 그 때만큼의 충격을 받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트럼프는 그런 식의 반윤리적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비윤리"가 아니라 "반윤리"라는 것이 중요한데, 트럼프는 자기 스스로 위악을 표방하는 쇼맨십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쾌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질서와 약속을 송두리째 부수는 그 모습 자체가 트럼프 지지자들에게는 일종의 혁명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습니다. 트럼프가 얼마나 악랄하고 저질스러운지 그 방향은 크게 상관없습니다. 그냥 남들이 감히 못하는 것, 한번쯤 해보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던 것,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이미지는 참신하고 진취적인 무언가로 비춰진다는 거죠. 여기서 "저런 거에 어떻게 속고 좋아하지?"라는 질문은 크게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금기 자체의 파괴가 중요하니까요.
여기서 더 의외인 것은 사람들이 트럼프에게 절망하거나 반발하는 대신 그를 하나의 밈으로 써먹으면서 그에 대한 진지한 판단을 스스로 희석해버린다는 겁니다. 저는 남초 커뮤니티에서 트럼프의 행보를 두고 정말 걱정하거나 분노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퍼졌던 "트황상"이란 별명부터 해서 그의 망나니 행보는 리얼리티 쇼의 개차반 캐릭터를 감상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코메디적 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죠. 여기서 트럼프의 놀라운 효과가 발생하는데 그는 그를 둘러싼 모든 비판을 붕 떠오르게 했다는 겁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미국의 대통령이, 어떻게 저런 말과 행동을? 그의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실패는 오히려 축적되면서 진지한 통증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어딘지 초현실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현실감각을 흐트려놓습니다. 오바마가 코로나 대응에 트럼프의 반이라도 실패를 했다면 그는 정말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겠지만 트럼프는 오바마의 실패에 백배는 더 큰 실패를 해도 아무도 그걸 진지하게 반응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무감각해졌으니까요. 극단적으로 경솔하고 이기적인 인간이 우스꽝스럽게 권력을 쥐면 그 때 사람들은 곧바로 심각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인간이 일으키는 그 파격 자체에 도취되어 뭔가 몽롱해진다는 겁니다. 트럼프는 정치를 아주 가볍고 실생활에 아무 필요도 없는 무언가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이게 트럼프 최대의 업적입니다. 뭘 엉망진창으로 한다는데 그건 다 알아서 될 것이고 우리는 저 웃기는 인간의 쇼나 감상하자는 식으로 정치와 현실이 완전히 괴리된 것처럼 세계인 스스로가 느끼는 것 같아요.
원래 진지한 건 재미가 없습니다. 열심히 고민하고 신중하게 뭔가를 선택하며 지지하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정치는 대다수의 시민들이 실천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고 그냥 돈이나 편하게 벌고 놀고 먹으면서 살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입니다. 트럼프는 이 지점을 매우 정확하게 공략했습니다. 그 자신의 정치적 수를 발휘했다기보다는 그냥 그가 그런 시대정신과 부합한 하나의 결과였던 거죠. 그러니까 정치를 현실에서 완전히 떼놓지 못하는 "진지충"들은 이제 새로운 숙제를 껴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현실정치감각을 어떻게 되돌릴 것인가. 어떻게 위악으로 모든 선과 약속을 파괴하는 그 파격에 맞서는 또다른 파격을 내세울 것인가. 글쎄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 같은 정치인들이 다른 방향에서의 파격을 실천하고 있고 거기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지만 보수는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고 인간은 다수가 될 때 파렴치한이 되기를 망설이지 않는지라... 트럼프 에이지를 지나면서 전 세계가 거대한 정치적 숙제를 껴안은 위기감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건 트랜스포머같은 영화가 아니라 안그래도 재미없고 까딱하면 진짜 재미없어지는 리얼 라이프니까요. 인생은 실전이라는 걸 정치적으로도 되새길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모든 진보 정치인들은 그 현실감각을 각성시키는 게 가장 큰 예선전인 것 같아요.
2020.11.06 12:12
2020.11.06 13:09
네 아무래도 그렇게 됩니다... 진지한 미국 대통령을 보고 싶어요
2020.11.06 13:04
2020.11.06 13:26
1. 2016년 재선 당시 힐러리와 트럼프에 대한 반응 차이를 찾아보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힐러리의 이메일 루머에는 아주 심각하게들 반응하지만 기정사실화된 트럼프의 러시아 로비 및 중국 로비에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 심각성에서 전혀 다른 온도차를 보이는 것이 트럼프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대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미국의 대통령과 필리핀의 대통령을 일대일로 비교하기에는 그 영향력이 동일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나 트럼프의 실패는 단순한 정책적 부분이 아니라 소수인종을 대하는 도덕적 실패도 클 텐데 이 부분에서 당사장인 한국인들이 어떤 불쾌감도 느끼지 않으면서 그를 밈화시켜서 노는 게 의아하다는 거죠. 말씀하신 마스크나 락스 같은 사례도 코로나에 대한 최소한의 과학적 반응을 보여야 하는 자리에서 트럼프가 보이는 실패는 단순한 희화화 재료가 아니라 지구적 위기를 같이 겪고 있는 사람으로서 위기감을 충분히 느낄만 한 사안인데도 그렇게 비토하는 여론이 크지 않구요.
3. 오바마가 만약 트럼프처럼 락스 운운하거나 한국이 코로나를 정말 잘 대응해서 확진자 숫자가 낮게 나왔는지 의심스럽다고 인터뷰를 했다고 가정해봅시다. 트럼프가 그리 인터뷰한 것처럼 사람들이 넘길 수 있었을까요. 사실 이건 꼭 오바마가 아니라 트럼프 외의 누구를 대입해도 똑같은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미쳤다고 욕먹기 좋은 이슈가 트럼프에 한해서는 어쩐지 우스꽝스러운 무언가로 그냥 넘겨지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정치인을 희화화하는 것은 풍자의 전략이지만 트럼프에 한해서는 그 풍자가 수단이 아니라 아예 목적이 되어 그저 웃는데서 그치고 마는 묘한 자포자기의 분위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4.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여타 정치인의 실패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와 비호감의 축적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트럼프에 한해서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사람들이 웃고 넘긴다는 이야기입니다.
2020.11.06 21:33
1. 2016년도 재선 당시 힐러리의 이메일 스캔들과 비교해서 트럼프의 러시아 스캔들이 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사실인가요? 트럼프의 러시아 스캔들은 특검을 거쳤고, 탄핵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북한과의 하노이 협상을 뒤집어 엎은 이유가 이런 국내 이슈를 해외로 돌리기 위함이라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반응입니다.
2. 트럼프는 한국인의 대통령이 아닙니다. 필리핀의 대통령이나, 미국의 대통령이나, 자신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면, 그저 외국의 대통령이지요. 물론 미국 대통령이 우리 일상에 영향을 줄 일이 더 많이 있겠습니다만, 트럼프가 락스를 마시라고 해서 한국인들이 들고 일어서야 될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비웃으면 그만인 것이지요. 코로나도 그렇습니다. 미국인들의 코로나 환자의 증가가 경제적인 악영향으로 인해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해서 비판을 할 수 있습니다만, 단순히 트럼프 한사람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이 비토하는 여론을 조성하는것이 당연하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물론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이라면 상황이 다르겠지만, 저는 한국에 살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 위주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3.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서 근거 없이 결과를 가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바마가 그렇게 말했다고, 트럼프가 안될 수 있지만, 될 수도 있습니다. 벌어지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트럼프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을 넘겼다고 생각을 하시는데, 글쎄요. 제가 들은 여론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만, 그것은 제가 미국에 살지 않아서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부분이니 딱히 단정적으로 말씀은 못 드리겠군요. 하지만 댓글에서 말씀하신 것 처럼, 트럼프의 행동과 결과는 결국 지금의 투표로 결과가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유리하다는 재선에서 고전을 하는 것 자체가 그간의 업모의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2020.11.06 13:41
2020.11.06 16:04
2020.11.07 13:23
좋은글 잘봤습니다.
저는 트럼프가 잘나갔던 이유로 그냥 전체적으로 먹고살만해지고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없어서 그러지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미국은 대사관한번 안가봤고 그냥 개인적인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