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9 00:44
- 50분 정도의 에피소드 7개로 깔끔 완전하게 끝나는 오리지널 드라마입니다. 구체적인 스포일러는 없어요.
(짤은 그냥 재활용이요. ㅋㅋㅋㅋ)
- 때는 1960년쯤의 미국. 엘리자베스 허먼, 줄여서 '베스'라 불리는 소녀는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고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들어갑니다. 장르물에 나오는 지옥 같은 고아원... 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사는 건 당연히 팍팍하고,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고아들 사고 치지 말고 말 잘 들으라고 매일매일 비타민이라고 뻥을 치면서 안정제까지 먹이네요. 그래도 자기 생각해주는 절친도 하나 만들었고, 지하실의 관리인 아저씨에게 들이대서 체스라는 신기한 놀이도 배웠죠. 심지어 자기가 그 놀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래도 여전히 문제가 되는 부분이라면 그 안정제의 약빨에 반해서 어린 나이에 중독자가 되었다는 거.
이 어린 소녀 베스가 이런저런 삶의 변화를 겪으면서 체스에 매달리고. 또 이런저런 사건들을 겪으며 부딪히고 깨지고 교훈을 얻으면서 점차 성장해나가는 이야기...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 이 드라마의 첫 번째 미덕은 '예쁘다'는 겁니다.
앞서 말했듯 6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게 기록 영화나 리얼리즘 영화의 터치랑은 아주 거리가 먼, 대놓고 팬시한 감각으로 그려집니다. 사람들 옷차림도 예쁘고 집들도 예쁘고 체스판도 예쁘고 벽지도 예쁘고 심지어 냉장고들도 예뻐요. 그렇게 예쁜 배경 속을 가뜩이나 현실 인간이 아닌 cg 캐릭터처럼 생긴 안야 테일러 조이가 매 장면마다 참으로 예쁘게 비현실적인 스타일링을 하고 돌아다니니 이 또한 예쁘지 아니할 수가 없죠.
두 번째 미덕은 '체스'를 꽤 성의있게 다룬다는 거에요.
물론 체스를 전혀 모르는 시청자들도 재밌게 봐야 하기 때문에 시합의 내용을 디테일하게 다루거나 하진 않죠. 오히려 좀 과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시합 내용은 대충대충 넘어가지만, 그 시절 미국 체스계의 분위기라든가, 시합의 규칙과 용어라든가... 뭐 이런 것들을 상당히 디테일하고 다양하게 보여주면서 거기에 스토리를 꾸준히 연결지어 전개하니 성의 있는 각본이라는 생각이 들죠. 흥미도 생기구요. 계속 보다보니 체스를 배워보고픈 생각도 들더라구요. 지금도 말 움직이는 규칙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만... 이미 늦었어!!!
세 번째는... 음. 이걸 미덕이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는데.
엄마의 자살에 가까운 죽음, 그로 인한 고아원 살이, 어린 나이에 시작된 약물 중독과 나이 조금 먹으면서 추가되는 알콜 중독, 누구에게도 제대로 맘 주고 정착하지 못 하는 불안한 정신 상태, 행운과 함께 꾸준히 찾아오는 비극들... 등등 굉장히 어두컴컴한 소재들을 잔뜩 쌓아 놓고서 정작 이야기는 시종일관 착하게, 나이브하게 흘러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는 동안 그렇게 스트레스가 없어요. 스트레스가 있다가, 좀 쌓일만 하면 해소되고, 다시 쌓일만 하면 해소되고. 이런 식이라 부담이 없더군요.
- 위에 적은 '미덕' 중 둘은 당연히 그대로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약물 중독에 어린 시절 거대한 트라우마를 입은 소녀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성차별이 만연한 업계에서 실력 하나로 당당하게 승부하는 이야기... 인데도 시종일관 묘하게 가벼워요.
왜냐면 위에서 언급한 것 중 무엇 하나도 그렇게 리얼하게 다뤄지지 않거든요. 뭐 무성의하다 싶을 정도는 아니고 나름 센스 있게 묘사되는 장면들도 많지만 그것들이 해소되는 과정이 언제나 아주 훈훈하고... 좀 '쉬워' 보여서요. 도대체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은 다들 왜 그리 착하고 왜 그리 주인공을 못 도와줘서 안달인 건지. 안야 테일러 조이니까!!! 당연히 빌런이어야 하고 실제로 그런 역할을 꽤 많이 수행하는 고아원 원장마저도 사실 악당이 아니구요. 주인공이 체스판에 발을 들여 놓으며 겪는 성차별 같은 건 대략 2~3화쯤 넘어가면 거의 존재하지도 않는 걸로 보입니다. 어떤 방향으론 크게 진지한 드라마를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스포츠물로서도 그렇습니다. 주인공은 애시당초 천재에요. 주인공이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상황이라면 지구상의 그 누구도 적수가 못 되죠. 스토리상 최종 빌런이 하나 존재하긴 하지만 내용을 자세히 뜯어보면 언제나 주인공의 적은 주인공 자신 뿐이고. 그래서 우리가 보게 되는 주인공의 체스 경기 결과는 늘 시작부터 나와 있어요. 그 직전의 전개가 별 탈 없으면 이기는 거고, 뭔가 좀 주인공이 혼 나야할 타이밍 같다 싶으면 지는 거구요. 그러다보니 경기를 지켜볼 때 긴장감 같은 것도 없고 승리시의 쾌감도 그렇게 크지가 않습니다. 뭐 알고보면 먼치킨인 다크 호스가 자신을 깔보는 상대들을 순식간에 퍽퍽 무찔러 버리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분명히 재밌는 일이긴 하죠. 그런 류의 재미는 분명히 있지만 딱 거기까지에요. 손에 땀을 쥐고 그딴 건 없습니다.
- 대충 정리하자면... 예쁘고 화사한 그림을 바탕에 깔고 전개되는 가볍고 따뜻한 분위기의 스포츠물이면서 성장물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나이브한 전개가 많아서 중간중간 좀 싱겁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안야 테일러 조이가 풀어가는 주인공의 캐릭터가 지켜보는 재미를 주고요. 또 단순 솔직 우직한 설정들일지언정 그걸 대체로 성의있게 잘 풀어줘서 평타 이상의 감흥은 전해줍니다.
개인적으로 1화는 정말 재밌게 봤고, 2화 이후로 조금 김이 빠지는 느낌이 드는 와중에도 꾸준히 재미는 있었구요. 그렇게 이 이야기의 천진난만함에 적응을 하고 나니 마지막 에피소드는 그냥 좋더군요. '아 이건 좀 부끄러운 기분인데!!!'라는 느낌의 장면들이 여럿 나오는데도 그냥 헤헤 웃으면서 잘 봤어요.
결론적으로,
미국 60년대를 배경으로 패셔너블한 비주얼이 가득한 이야기를 즐기시는 분들은 보세요. 아주 훌륭합니다.
좀 비현실적이고 뻔한 이야기더라도 부담 없이 훈훈한 마음으로 즐길 거리가 필요하신 분들에게도 추천합니다.
다만 진중하고 현실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묵직한 이야기... 같은 건 절대 아니라는 거. ㅋㅋ 그런 거 기대하지 마세요. 진지하게 말씀드립니다.
+ 결과적으로 안야 테일러 조이에게는 탁월한 선택이었네요.
일단 원탑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거의 혼자서 끌고 가다시피 하는 작품인데 imdb 평점이나 로튼 토마토 지수가 엄청 좋아요.
그리고 젊은 배우로서 보여줄 것이 아주 많습니다. 웃고 울고 어둡다가 차갑다가 그냥 예쁘다가 화려하게 폐인 같다가 소탈하다가... 이런 연기 저런 연기 다 골고루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배역이기도 하구요. 또 배우 본인의 비주얼에 딱 어울리는 스타일링으로 시종일관 패션쇼를 하거든요. 거의 돈 받고 찍은 배우 개인 포트폴리오 같은 느낌. ㅋㅋㅋ
그러니 이 분에게 호감이 있는 분이라면 그냥 보시면 됩니다. 작품이 맘에 안 들어도 한 번 시작하면 끝까지 안 보기가 힘드실 걸요.
++ 약간 아마존 프라임의 '마벨러스 미세스 헤이즐' 생각도 나더군요. 그것도 이렇게 비현실적인 예쁨을 추구하는 페미니즘 드라마였죠. 성차별이 만연한 업종에서 성공하는 능력자 여성의 이야기라는 면도 좀 비슷하구요. 그 드라마는 보다 말았는데 마저 볼지 어쩔지...
+++ 해리 멜링은 갑자기 넷플릭스 정직원이 되었나요. 제가 올해 들어 본 것들 중에서만 넷플릭스 오리지널에서 세 번째 만남이었습니다. '올드 가드'와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에 이어 이 드라마까지. 아직까지도 제겐 '러브 액추얼리 꼬맹이'로 남아 있는 토마스 브로디 생스터도 나오구요.
++++ 전반적으로 '이야기가 좀 더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일단 새엄마 캐릭터가 아깝더라구요. 캐릭터가 꽤 잘 빚어진 느낌이라 좀 더 시간을 들여 둘의 관계를 묘사했음 좋았을 텐데... 싶었고. 고아원에서의 이야기도 에피소드 하나 정도는 더 할애해서 보여줬음 좋았겠다 싶었어요. 그랬더라면 막판 전개와 결말이 좀 더 와닿았을 것 같아서요.
+++++ 막판 주인공의 오열 장면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고 있었죠. 내가 이거 일곱화 보는 내내 너 언젠가 이렇게 후회할 줄 알았거등? 라면서요. 근데 또 그 장면 때문에 납득이 가는 부분도 있었어요. 아, 이렇게 써먹으려고 얘가 그동안 내내 %$^&#$%^#&^ 구나... 라는 거? ㅋㅋ 안 보신 분들은 이 문단은 크게 신경 쓰지 마세요. 사실은 되게 별 거 아닙니다.
2020.10.29 08:38
2020.10.29 13:20
네. 거기에서 호불호도 많이 갈릴 것 같아요. 결국 재밌게 보긴 했지만 음? 이 정도의 사건이 이렇게 그냥 넘어가나? 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들이 여럿 있었어요. ㅋㅋ
2020.10.30 00:40
2020.10.30 10:51
배우가 예쁘다든가... 그렇죠. 전 그걸로 끝까지 돌파했습니다. ㅋㅋㅋㅋ
2020.10.29 08:47
해리 멜링은 또 극악한 캐릭터로 나오는가 했다가안심했어요 ㅎㅎ 생스터는 여전히 어린아이가 콧수염만 기른것 처럼 보이더군요. 새엄마 캐릭터는 조금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보았어요. 주인공 발목잡는 흔한 진상 캐릭터로 발전할줄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더라고요. 한편 다행이기도한데 그래도 뭔가 전체적으로 캐릭터들이 평평하다는 인상이 들었습니다 ㅎ 우라사와 나오키의 해피같은 극단적인 드라마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어요 ㅋㅋ 체스는 사실 피스에만 관심이 좀 있었는데 게임자체도 드라마를 보고나서 흥미가 살짝 생겼습니다. 이시국에 만나서 플레이는 언감생심이고 온라인 플레이나 좀 알아봐야할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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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거 갖고 싶습니다!
2020.10.29 13:24
새엄마 캐릭터가 현실적이어서 좋았어요. 좋은 의도를 가진 진상(?)이면서도 동시에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이고, 무능하면서 답답한데 동시에 애잔하고... 뭔가 현실 가족 같은 느낌. ㅋㅋ 네. 캐릭터들이 밋밋하긴 했죠. 특히 남자 캐릭터들은 죄다 납작하기 그지 없더라구요. 특히 그 기자 되는 훈남 캐릭터는... 얘가 이야기상 왜 필요한 거지?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관리인 할아버지는 멋졌고, 해리 멜링 캐릭터는 나름 괜찮았구요.
체스는 뭐니뭐니해도 그냥 '기물'이 멋지고 고급진 게 많다는 게 저같은 일반인들에겐 가장 큰 매력 같아요. ㅋㅋㅋ 영화 속에서도 다양하고 고급져보이는 물건들 계속 나오는데 그게 뭐라고 참 보기 좋더라구요...
2020.10.29 10:29
토마스 브로디 생스터는 나름 30살인데 그냥 어린애가 수염 붙이고 나온 것 같더라구요 ㅋㅋ 깔끔하게 분장하면 그냥 안야 테일러 조이랑 비슷한 동년배로 나와도 위화감이 없을듯한...
해리 멜링은 그러고보니 코엔 형제의 넷플릭스 영화였던 카우보이의 노래에도 나왔었죠. 넷플이 은근히 배우들 돌려쓰기 엄청 하던데 그런 경우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카우보이의 노래에서도 발성이라던가 전체적인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올해 참 다양한 캐릭터를 맛깔나게 소화하더군요. 미남은 절대 아니지만 한 번 보면 각인되는 외모에 연기력도 뛰어나니 앞으로 성격파 배우로 잘 자리잡을 것 같네요.
여담으로 새엄마를 연기했던 마리엘 헬러 배우는 미나의 19금 일기, 캔 유 에버 포기브 미?,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 등을 연출한 감독이기도 했더라구요. 다 좋게 봤던 작품들이고 감독이 여성이라는 건 알았는데 배우도 겸하는지 몰랐어요.
2020.10.29 13:55
생스터 얼굴 알아보는 순간 경악했습니다. 으악! 메이즈 런너가 수염만 길렀어!! 되게 어색하더라구요. ㅋㅋㅋ 타고난 얼굴이 아기상인 것 같아요.
전 사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안 봐서 최근까지 해리 멜링이 누군지도 몰랐어요. 언제부턴가 자꾸 보이는데 마스크 독특하네... 해서 검색해보니 해리 포터 출신. 연기력은 확실히 안정적으로 좋은 것 같아요. 생스터는 얼굴 때문에 계속 어색한 기분이었는데 이 분 캐릭터는 그냥 자연스럽더라구요.
네 저도 연기 좋고 비주얼도 잘 어울리고 해서 검색해봤더니 배우 경력보다 감독 경력이 레알(?)이라서 좀 놀랐습니다. 다만 전 본 게 없... ㅠㅜ
암튼 비중을 좀 더 줬음 훨씬 캐릭터가 살아났을 것 같아서 좀 아쉬웠네요.
2020.10.29 17:33
2020.10.30 10:51
아... 영화는 안 봤지만 굉장히 낯이 익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좋은 배우로 잘 자란 것 같아요. ㅋㅋ
2020.10.29 14:45
저도 어제 다 봤습니다.
착한 드라마더라고요.
이하 스포일러입니다.
고아원 나올 땐 혹시 얘가 험한 일을 겪지 않을까.
-> 그럭저럭 잘 지내고 체스까지 배움. 다 컸어도 입양 성공.
새엄마 이상한 사람 아닐까. 아이를 앞세워 돈을 다 갈취하지 않을까
-> 의외로 친구처럼 잘 지내고 적당할 때 퇴장.
재수 없어 보이는 해리 포터 사촌과 러브 액츄얼리
-> 주인공이 힘들 때 큰 도움을 주고 진심으로 응원해줌.
고아원에 남은 친구는 혹시 힘들게 지내지 않을까
-> 열심히 자기 삶을 개척해나가는 이상적인 모습에다가 주인공한테 비행기값까지 줌. 우린 가족이니까!!
칼링 이브나 보건교사 안은영 같이 에너지 소모가 큰 드라마를 보다가 이걸 보니까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2020.10.29 15:18
맞아요. '착한 드라마'라는 표현이 딱 맞습니다. 위 아 더 월드!!!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