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나훈아 팬이 아닙니다. 트로트팬도 아니고.

가족들이 '오늘 나훈아 콘서트를 봐야한다'고 대낮부터 선언했을 때 그걸 같이 앉아서 보고 있어야 할 처지가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말이죠....막상 보니까...

두시간이 넘는 그 공연이, 광고도 없이 쭈욱 11시까지 진행된 그 공연이 정말 빛의 속도로 끝나버린 느낌입니다.

정말로 감탄했습니다. 

아미인 BTS팬 친구가 카톡을 보냈습니다. "BTS저리가라네요. ㅎㅎㅎ"

네, 물론 농담반 진담반으로 한 말이지만 무대 퀄리티 자체는 기대이상으로 쩔었습니다.  


그냥 나는 잘난 나훈아니까, 내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라, 나 원래 이런 사람이야, 뭐 이렇게 늘 보던 것처럼 노래나 쭈욱 부르다 끝나겠지 싶었는데....와우. 정말 세심하게 신경쓰고 공들인 하나의 쑈더군요. 이런 걸 공짜로 봐도 되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음악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무심하게 말했지만 그건 어떤 의미로는 단순한 '트로트가수'가 아니란 말로도 들립니다.

어제는 CD음악처럼 똑같은 노래가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버전으로 자신의 노래를 불렀고, 젊은 감각을 흡수하려는 노력을 보여줬습니다.

특히 기타리스트들과 함께 조용히 기타를 치며 자신의 히트곡을 서너곡 노래하는 그 순간은 와.....

저희 집에서는 그 10분 정도 동안 어느 누구도 미동도 없이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귀담아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네, 트로트라는 장르를 넘어선, 문자 그대로 '음악'이었습니다.


나훈아라는 사람의 카리스마도 굉장했습니다.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삶에서 우러난 이야기를 '왜 당신도 나이들어보니 깨닫게 되지 않던가요?'라고 자연스럽게 공감을 이끌어내는 스킬이...

절대 '내가 잘나서 대단한 나훈아'라는 인상을 주지 않고 '우리 모두가 열심히 살았다'고 위로하는 그 자세에서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무대에서 상반신 탈의가 그대로 보여짐에도 불구하고 옷을 갈아입는다거나, 찢어진 청바지를 입는 다거나, 알통을 내놓고 노익장을 과시하는 모습에서 대리만족과 열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나훈아라는 사람에 대해 1도 관심이 없었지만 어제 콘서트를 보면서 '와...저 아저씨 디기 멋지네....'란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들었습니다.


무대 매너도 아주 훌륭했습니다.

노래 부를 때 표정과 동작, 가사를 음미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애드립인지, 철저히 계산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남달랐습니다.

요즘 트로트 가수들과 많은 경연자들이 노래를 부르지만 하나같이 '남의 노래를 대신 불러주는' 느낌이라면 나훈아씨의 노래는 '내가 내 이야기를 한다'는 느낌이 강해서 훨씬 듣기가 편하고 몰입이 됩니다. 이건 가창력의 문제를 넘어서서 진심을 담은 노래가 결국 감동을 준다는 쪽이랄까....

대부분의 노래가 본인이 작사작곡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 가사들을 보면서 느낀 게...문학적으로도 이 양반의 노래 가사는 꽤나 멋진 것 같아요.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어쩌면 밥 딜런보다 먼저 노벨상을 받았을지도.....ㅎㅎㅎ 그냥 뇌피셜입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일단 KBS의 음향은 정말 구렸고요, 음향과 화면이 맞지 않아서 립싱크 아니냐는 실시간톡이 나올 정도로 편집도 좀 그랬습니다.

노래 끝날 때마다 '나훈아! 나훈아!' 외치는 소리를 넣은 건 좀 과했다 싶고요....

합창단을 배치한 건 괜찮은 아이디어였지만 때로는 그 합창단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나훈아 목소리가 묻힐 때가 있었어요.

코로나 시국에 굳이 합창단을?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고....


뭐 이렇든 저렇든 대한민국에서74세 양반이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팔팔 뛰어다니며 노래하는 무대를 본다는 자체는 꽤나 좋았습니다.

2020년에 신곡이라니요? ㅎㅎㅎㅎ 

아....대체 불가의 매력적인 분임에 틀림없어요. 그냥 '한 명의 트로트가수'는 절대 아닙니다.

너무나 멋진 쇼를 수개월 동안 열심히 준비해 주시고 이렇게 잘 보여주셔서 국민 한 사람으로서 정말 감사드린단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듀게는 안하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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