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6 15:05
1.
에일리어니스트 2 에 목격자 혹은 피해자의 왜곡되거나 불완전한 기억을 온전하게 되살리기 위해 ‘최면요법’을 사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피해자의 트라우마가 너무 심각하여 그림 그리기를 보조적으로 사용하기로 합니다.
다른 정신분석학 교수가 “그림 그리기는 ‘최면’ 상태와 유사하죠” 라며 닥터 크라이슬러를 격려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대사 하나가 기억의 저 어두운 구석에 조명탄을 펑 하고 터트렸어요.
무언가 제대로 그리기 시작하여 완성을 해본 것이 대학수업 시간을 제외하면 중학교가 마지막이었던거 같은데
그 뒤로도 살면서 일하면서 ‘낙서’를 멈춰 본 적이 없었던거 같아요.
회화를 전공한 측근은 ‘낙서’를 ‘브레인 스토밍’ 에서 매우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는데 창의적인 생각을 방해하는 딱딱한 의식상태를 잠시 중지시키고
정돈되지 않은 창의적인 사고를 끌어내기 위한 전단계 - 유사최면상태 - 에 빠지게 해주는 아주 간편하고 효율적인 도구라고 하는군요.
한편, 어린 시절을 떠 올릴적에 그림을 그리던 느낌이 따스한 온도와 눈부신 밝음으로 남아 있던 이유도 짐작이 되요.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하니 기분이 좋았던 것만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최면’상태 혹은 일종의 환각 상태였다는 거자나요.
2.
그러고 보니 ipad 로 일한 뒤부터 종이와 연필을 멀리하게 되버렸어요.
특히 ipad pro 이후에는 종이 사용량이 확 줄어 들었죠.
그런데 작업은 더 효율적이고 속도도 빨라졌지만 그만 ‘낙서’를 잃어 버렸군요.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하던 낙서를 왜 ipad 에서는 안하게 된 것일까요?
사실 몇 번 시도를 해보기도 했는데 매번 실패했어요.
널리 쓰이는 드로잉 유료app 도 시도해봤는데 너무 번거롭더군요.
메인 작업 화면 중에 조그만 화면을 멀티로 띄워 낙서할 수 있는 기능이 생긴다면 왠지 다시 낙서를 쉽게 잘 할거 같은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디지탈 영역에서 아날로그를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을 또 하나 발견한거 같아요.
본디 낙서란 각 잡고 종이 한 장 마련해서 하는게 아니라 교과서의 여백과 귀퉁이에 해야 맛이 아니겠습니까.
3.
그래서 고민을 했어요.
다시 이미 여러번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ipad 에서 낙서를 쉽게 하는 버릇 혹은 방법을 찾아볼 것이냐
아니면 다시 종이와 연필을 늘 옆에 두고 살것이냐
아니면 낙서 말고 아예 시간을 잡아 제대로 그림 그리기를 해볼 것이냐
[최근에 새로 친해진 공원냥- 아비시니안과 고등어 태비가 믹스되어 심하게 개냥스러운 아이; 날짜는 11월이어야 했는데 월초에 늘 그렇듯이 실수]
이런 낙서를 하며 고민을 하다가 문득 iOS 의 번들 그리기 툴이 이미 매우 훌륭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론은 ipad 번들 메모장에 그림 그리기로; 기능이 초 단순합니다. 그리기와 지우기만 가능한거죠. 이게 저에게는 익숙하고 편합니다.
그리고 위 낙서를 다 그리고 나서 생각해봤어요.
좋아하는 것을 그리면 다시 그림 그리기 습관을 들이는데 유리할테니 나는 고양이를 그리면 되겠네!
그것도 남의 고양이 사진이 아니라 매일 만나다 시피 하는 나의 공원냥 친구들을 그리면 되겠네!
이제 시간이 문제인데.... 6년 넘게 해온 게임 하나만 접으면 해결? 흠....
to be continued
2020.11.06 16:14
2020.11.06 16:48
글을 다 쓰고나서 고양이 그림 업로드 할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는데....과분한 칭찬에 막 신이 나네요;
나 좋자고 그린 그림인데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순간 뭔가 주객이 전도될거 같아서 망설여지더군요.
하지만 왠지 이 글의 완성은 내가 그린 그림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올려봤습니다.
측근과 영상통화를 하면서 끄적 거린 낙서라 부담이 덜하기도 했어요. 만약 심혈을 기울여 그려 나름 뿌듯해 하는 그림이었다면 올리기가 더 망설여졌을듯 싶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만약 앞으로 또 고양이 그림을 그려 올린다면, ‘나의 공원냥 친구들’이라는 이야기의 삽화라면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거 같다구요.
절친은 위안부 할머니 (치유를 목적으로만) 그림 그리기를 도와 드렸었고 측근은 정신적 불안에 위협받는 아동들을 대상으로(치유적) 그림 그리기 선생님이었어요. 그 두 사람에게 늘 들었던 말이 하나 있는데 그림 가르치면서 절대 ‘평가’하지 말고 ‘공감’부터 해야 한다는 거. 이 말을 그림을 그리는 자신에게 투사하면 ‘평가’가 아닌 ‘공감’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과만 그림을 공유한다면 SNS 에 그림 올리는 것도 꼭 부정적으로 생각하실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요.
그런데 공감보다 스스로 ‘보기 좋았더라’만으로 충분한 그리기가 있긴 하죠. 사실 대부분의 그림 그리기가 그런거 같아요.
2020.11.06 18:52
그림은 일종의 언어인데, 잡담같은건 혼잣말하는 것보다는 누군가와 나누는게 좋죠.
귀퉁이낚서는 잘 하다가 아이패드로 낙서가 잘 안되는 이유는 그게 아닐까요? 농반진반 백지공포증.
2020.11.06 22:49
그림이 갖고 있는 여러 기능중에 의사소통 수단이 있긴 합니다만 그림 자체를 언어의 일종으로 규정하는건 뚱딴지같은 소리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그림, 유사최면 상태를 유발하는 그림 그리기에는 언어와 결부시킬 그 무엇도 없어요.
그래서 누군가의 소통을 위한 그림과 달리 자기만을 위한 그림이 있다는 것이고 사실 대부분의 그림은 소통 이전에 그린 사람 자신의 환각 체험을 동반하면서 여러가지 정서적 작용을 일으킵니다.
종이와 연필만 있던 시절의 귀퉁이 낚서와 ipad 낚시의 차이는 귀차니즘입니다. 당장 듀게질하면서는 낙서가 불가능하자나요. 이 게시판이 종이였다면 눈팅하면서 동시에 어느 빈 자리 찾아 간단하게 낙서를 했을텐데 말이죠. 백지공포증이라...별 희한한 공포증을 다 들어 보네요. 전 A0 정도 사이즈 백지를 봐도 막 흥분되고 신이 나던데;
2020.11.07 00:01
2020.11.08 04:26
2020.11.09 13:58
소부님이 그림 그리는 분이었군요? 저게 아이패드 메모장 그림이란 말이죠?
와.. 그런거군요. 미술에 재능이 있는 분의 손이란... 고정 컨텐츠에 한 표요!
2020.11.10 16:22
그냥님은 날렵하고 늘씬하시군요. 제가 그린 우리집 주인냥이십니다. 설연휴에 가족끼리 모였을 때, 조카의 그림 그리는 패드로 그려봤어요.
이때만해도 코로나가 오늘까지 이어질 줄 몰랐다죠....
그림 그리는 것이 최면, 환각상태와 같다는 말 너무 좋네요. 그 말을 읽고 제가 가장 공들여 그린 그림들이 걸려있는 제 방을 다시 둘러봤어요. 사실 입시미술을 하거나 sns에 그림을 올리고 반응을 보다보면 (그런 행위들 또한 분명한 장점들이 있지만) 사실 자신의 내면에 충실하는 시간에서 좀 떨어지게 되는 거 같아요. 그러다보니 최근에 한 생각이 '좋은 시와 그림은 보편적인 공감을 사면서도 독창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그림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는데 이 글을 읽고 일할 때 외엔 타인의 공감대를 신경쓰기보단 저 자신의 내면과 관심사에 충실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력과 작업량도 그 편이 좀 더 쉽게 늘릴 수 있을 거 같아요.
고양이 그림 너무 매력있고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