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판타지

2020.11.06 11:27

Sonny 조회 수:866

원래도 그랬겠지만, 이제 모든 것이 이미지의 시대로 접어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이미지란 외모나 태도에서 보여지는 판타지로서 그 사람의 능력이나 도덕 같은 "실체"의 반의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미지를 뒷받침하는 게 실체이고 그 실체를 효과적으로 부풀리는 게 이미지라면 이제는 실체와 전혀 무관하게 극대화된 이미지만이 진실을 초월하는 무게를 갖는 것 같습니다. 저는 트럼프가 대선에 출마했고, 그가 공화당의 유력한 후보로 지난 대선에서 각광을 받을 때도 굉장히 충격을 받았는데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에는 정말 놀랐고 굉장히 우울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코로나 사태와  BLM 사태에서도 완전히 최악의 대응만을 했음에도 그에게 대통령의 자격을 주려는 사람들을 보면 이건 단지 무관심이나 이기주의자들의 취사선택이라기보다는 최소한의 객관적 판단을 무력하게 만드는 아주 강력한 환상적 이미지가 전 세계적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이건 영화의 스펙터클과 비슷한 효과입니다. <트랜스포머 1>을 두고 이동진 평론가가 스무자 평을 대략 이렇게 썼었죠. "뭔가 굉장히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착각". 저는 그 평이 아주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트랜스포머>는 눈뜨고 보기에는 낯뜨거운 스토리와 설정으로 점철된 영화이지만 그 영화가 재미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트랜스포머들이 환상적인 씨지 아래에서 변신을 하거나 싸우는 장면들이죠. 특수효과의 한 장면이 영화 전체에 대한 감상을 송두리째 집어삼킵니다. 물론 특수효과가 발달한 지금은 트랜스포머를 보면서 쩐다!! 지린다!! 하는 그 때만큼의 충격을 받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트럼프는 그런 식의 반윤리적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비윤리"가 아니라 "반윤리"라는 것이 중요한데, 트럼프는 자기 스스로 위악을 표방하는 쇼맨십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쾌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질서와 약속을 송두리째 부수는 그 모습 자체가 트럼프 지지자들에게는 일종의 혁명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습니다. 트럼프가 얼마나 악랄하고 저질스러운지 그 방향은 크게 상관없습니다. 그냥 남들이 감히 못하는 것, 한번쯤 해보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던 것,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이미지는 참신하고 진취적인 무언가로 비춰진다는 거죠. 여기서 "저런 거에 어떻게 속고 좋아하지?"라는 질문은 크게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금기 자체의 파괴가 중요하니까요.


여기서 더 의외인 것은 사람들이 트럼프에게 절망하거나 반발하는 대신 그를 하나의 밈으로 써먹으면서 그에 대한 진지한 판단을 스스로 희석해버린다는 겁니다. 저는 남초 커뮤니티에서 트럼프의 행보를 두고 정말 걱정하거나 분노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퍼졌던 "트황상"이란 별명부터 해서 그의 망나니 행보는 리얼리티 쇼의 개차반 캐릭터를 감상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코메디적 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죠. 여기서 트럼프의 놀라운 효과가 발생하는데 그는 그를 둘러싼 모든 비판을 붕 떠오르게 했다는 겁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미국의 대통령이, 어떻게 저런 말과 행동을? 그의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실패는 오히려 축적되면서 진지한 통증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어딘지 초현실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현실감각을 흐트려놓습니다. 오바마가 코로나 대응에 트럼프의 반이라도 실패를 했다면 그는 정말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겠지만 트럼프는 오바마의 실패에 백배는 더 큰 실패를 해도 아무도 그걸 진지하게 반응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무감각해졌으니까요. 극단적으로 경솔하고 이기적인 인간이 우스꽝스럽게 권력을 쥐면 그 때 사람들은 곧바로 심각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인간이 일으키는 그 파격 자체에 도취되어 뭔가 몽롱해진다는 겁니다. 트럼프는 정치를 아주 가볍고 실생활에 아무 필요도 없는 무언가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이게 트럼프 최대의 업적입니다. 뭘 엉망진창으로 한다는데 그건 다 알아서 될 것이고 우리는 저 웃기는 인간의 쇼나 감상하자는 식으로 정치와 현실이 완전히 괴리된 것처럼 세계인 스스로가 느끼는 것 같아요.


원래 진지한 건 재미가 없습니다. 열심히 고민하고 신중하게 뭔가를 선택하며 지지하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정치는 대다수의 시민들이 실천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고 그냥 돈이나 편하게 벌고 놀고 먹으면서 살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입니다. 트럼프는 이 지점을 매우 정확하게 공략했습니다. 그 자신의 정치적 수를 발휘했다기보다는 그냥 그가 그런 시대정신과 부합한 하나의 결과였던 거죠. 그러니까 정치를 현실에서 완전히 떼놓지 못하는 "진지충"들은 이제 새로운 숙제를 껴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현실정치감각을 어떻게 되돌릴 것인가. 어떻게 위악으로 모든 선과 약속을 파괴하는 그 파격에 맞서는 또다른 파격을 내세울 것인가. 글쎄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 같은 정치인들이 다른 방향에서의 파격을 실천하고 있고 거기에 희망을 걸어보고 싶지만 보수는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고 인간은 다수가 될 때 파렴치한이 되기를 망설이지 않는지라... 트럼프 에이지를 지나면서 전 세계가 거대한 정치적 숙제를 껴안은 위기감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건 트랜스포머같은 영화가 아니라 안그래도 재미없고 까딱하면 진짜 재미없어지는 리얼 라이프니까요. 인생은 실전이라는 걸 정치적으로도 되새길 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모든 진보 정치인들은 그 현실감각을 각성시키는 게 가장 큰 예선전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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