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미드소마

2020.09.14 13:29

겨자 조회 수:828

'미드소마'를 여러번 봤습니다. 볼 때마다 슬픕니다. '파리대왕'을 읽었을 때와 비슷합니다. 끔찍한 데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어떤 강렬한 진실의 편린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죠. 


줄거리: 대학생 대니는 순식간에 가족을 잃습니다. 조울증을 앓는 동생이 부모를 살해하고 자살했기 때문이죠. 남자친구인 크리스티안과 4년 좀 못되게 사귀었어요.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대니에게 별 신경을 써주지 않고, 크리스티안의 친구들은 대니와 헤어지라고 충고합니다. 크리스티안의 친구 펠레는 스웨덴의 작은 마을 출신인데, 자기네 마을에 미드소마 축제가 있으니 여행 가자고 조쉬에게 제안합니다. 멋진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스웨덴을 기대하고 조쉬와 친구들은 크리스티안도 같이 가자고 하죠. 결국 대니까지 스웨덴의 하가 공동체로 여행을 갑니다. 


세상에 왜 이렇게 엉망진창인지 설명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세론, 하나는 미세론입니다. 사실 둘은 같은 거라고 봐도 되겠네요. 말세론은 세상이 이미 망했거나 혹은 점점 망해가고 있고, 지금의 세계는 최초의 순수를 잃고 점점 더 나빠진다고 설명합니다. 진정한 세계는 과거에 있었죠. 그 이후로부터는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다고 설명합니다. 미세론은 앞으로 진정한 세계가 올 거고 그 세계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많은 말세론이 미세론과 얽혀져 있죠. 


그런데 왜 나에게는 세상이 이미 멸망했는데 남들의 세상은 그대로 돌아갈까요? 나는 살아있어야할 이유를 잃었는데. 오늘도 태양은 밝고 꽃은 아름답고 새는 지저귑니다. 사람들은 들떠서 여행을 가고 누구는 논문을 쓴다며 바쁘지요. 하지만 내 세상이 멸망했다면 지지않는 태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금씩 조금씩 주변 사람들이 죽어가고 세상이 종말로 다가가는 게 놀라울 턱이 있을까요? 이미 내 세상은 종말을 맞았는데.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강간당한 여성, 사회적으로 짓밟힌 여성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다른 느낌이 드네요. 지금 캘리포니아의 하늘은 산불 재로 붉게 물들어,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를 연상케합니다. 판데믹은 잡힐 기미가 안보이는데 사람들은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며 오늘도 시위를 합니다. BLM 운동 사진을 보면 사람들이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즐기는데 그 옆으로 BLM 시위하는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이질적이죠. 누구의 세계는 종말 중인데 누구의 세계는 황금의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이번 판데믹이 나고 나서 왜 사람들이 시위에 나올까 하고 생각했지요. 어찌 됐든 전염병이 퍼지지 않게 해야 하는데 시위는 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그렇지만 고기를 먹기 위해서 감염의 위험을 무릅쓸 수 있다면 (판데믹 중 적절히 PPE 없이 고기 공장 가동), 흑인의 인권을 위해서도 감염의 위험을 무릅쓸 수 있겠구나 하고도 생각해보았지요. 왜냐하면 그들에게 세상은 망해버린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유전'을 보려고 시도했는데 무서워서 도저히 많이 못보겠더군요. 다만 에디팅이 어찌나 뛰어난지, 다소 느리게 시작하는 도입부를 그냥 넘길 수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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