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리뷰랄라랄라] 포화 속으로

2010.06.11 14:11

DJUNA 조회 수:5186

이재한의 [포화 속으로]를 보는 동안, 전 계속 베른하르트 비키의 [다리]와 그 영화의 원작인 만프레드 그레고어의 동명 소설을 생각했습니다. 어른들이 떠난 빈 자리를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소년들이 지킨다는 설정의 유사성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차이 때문이었지요. 두 영화는 같은 사건을 다루는 방식이 거의 거울상처럼 반대였습니다. [포화 속으로]는 [다리]에서 효과적이고 감동적이었던 모든 요소들을 일부러 집어던지고 청개구리처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작품이 모두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라면, 이를 극적 논리에 따라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다리]의 소년들이 패망이 확실해진 전쟁 말기에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다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것과 [포화 속으로]의 소년들이 전쟁 초기에 포항으로 밀려오는 북한군을 막아내기 위해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다른 이야기에는 다른 논리와 주제가 적용되어야 하지요. [다리]가 패전국에서 나온 반전영화일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면, [포화 속으로]는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영웅들에 대한 예찬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 그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화 속으로]의 빈약함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엔 반전영화가 아니면서도 훌륭한 전쟁영화들이 있습니다. 영웅적인 행동과 희생에 대한 예찬은 고대부터 예술의 좋은 소재였고 현대전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만약 [포화 속으로]가 그들의 희생과 고통, 갈등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했다면, 관객들은 그 드라마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관객들의 정치적 의견이나 역사에 대한 관점은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아닙니다. [다리]의 관객들이 나찌 소년병들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동료 인간으로서 그들의 갈등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제와 내용이 무엇이건 그 연결고리는 중요합니다. 


[포화 속으로]는 이를 외면합니다. 전 영화가 플래시백을 제한한 것을 적극적으로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도 플래시백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만약에 실시간으로 사건을 다루면서 캐릭터를 묘사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죠. 하지만 이 영화는 캐릭터 묘사 자체를 포기해버립니다. 우리는 탑이 연기하는 오장범을 대충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와 대립하고 협조하는 다른 인물들은 모두 스테레오 타입이고 허수아비들입니다. 얄팍한 한 겹을 치우면 속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모두 기능성 도구입니다. 그리고 도구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이상의 일은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건 이 이야기를 다루는 감독이나 작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보면 [포화 속으로]는 훌륭한 드라마의 재료가 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아이들이 갑자기 총칼을 들고 살육의 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아이들은 흥분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고통받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어줍잖은 영웅심리에 빠지기도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건 훌륭한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이야기꾼이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지금까지 묻혀 있었던 영웅들의 업적을 예찬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려 한다면 이야기의 가능성은 절반 이상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주인공들에 대한 의무적인 존경이 이야기꾼의 행보를 막을 테니까요. 물론 이 남은 재료에서도 여전히 좋은 영화가 나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예찬을 하기 위해 나선 이야기꾼이 한국전쟁이나 역사 자체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이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포화 속으로]에 대한 이재한의 태도는 조금 소름끼치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오로지 비주얼의 소재로만 생각합니다. 가끔 나오는 갈등이나 드라마도 모두 비주얼에 묻혀 버려요. 간담회에서도 그는 수 차례나 '감각적인 영상'을 만들기 위해 투여한 자신의 노력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런 어휘가 불러올 반감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무리 그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흉내내려 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스필버그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거의 평생에 걸친 집착의 대상이었고 그는 역사를 바꾸기 위해 전쟁터에 뛰어든 그 젊은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이재한에게 한국전쟁은 장르 영화의 배경에 불과합니다. 한 장면만 예를 들겠습니다. 김승우의 캐릭터 강석대는 폭발 예정인 다리 저편에 남겨진 피난민을 걱정합니다. 여기까지는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정작 다리가 폭발하자 그는 불꽃을 배경 삼아 슬로우모션으로 카메라를 향해 걸어옵니다. 여기서부터는 어떤 감정도 드라마도 없습니다. 오로지 남자배우의 폼과 예쁜 그림만 있을 뿐입니다. 


액션으로 넘어가면 문제는 더 심각해집니다. 사실 [포화 속으로]의 액션은 비교적 단조롭습니다. 이들이 하는 건 서로를 향해 총을 쏘아대는 것밖에는 없으니까요. 상식적으로 봐도,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주인공들의 내면 묘사를 강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반대로 갑니다. 아이들을 람보화시키는 것이죠. 한국전쟁 배경 [라이언 일병 구하기]인 줄 알았던 영화가 어느 순간부터 2010년 버전 [3840 유격대]가 되어 버립니다. 사실 전 누군가가 시치미를 뚝 떼고 [3840 유격대]식 B급 영화를 만들어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시작한 영화가 [3840 유격대]로 빠진다면 영화는 그냥 자기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포화 속으로]에서 건질 것이 있나? 기술적으로는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리고 전 언제나처럼 고생하며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 스태프의 노력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예쁘장하기만 한 접근법은 [사요나라, 이츠카]와 같은 식민지 로맨스의 패스티시에 어울릴지는 몰라도, 한국전쟁이라는 소재와는 심하게 어긋납니다. 배우들은 무난한 편이고 탑은 예상 외로 잘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반공영화의 틀에 박혀 온전한 캐릭터를 연기할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식의 [배달의 기수]식 영화의 함정은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소재와 창작 과정이 그에 참여한 예술가들의 진심을 자극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시작부터 당연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런 환경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의 진심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영화꾼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기타등등

기자간담회가 끝나갈 무렵, 어떤 사람이 왜 포토타임을 먼저하고 사진기자들을 쫓아내지 않냐고 고함을 질러대더군요. 그 때까지 그럭저럭 괜찮았던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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