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방 한 칸

2020.10.31 19:52

어디로갈까 조회 수:741

이태원에서 6년 째 월세 사는 동료 dpf가 집 구하기 전쟁에 내몰리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사는 동안 세 한푼 올리지 않았던 보살형 노부부 주인이 세금 문제 때문에 사정 상 집을 팔 게 된 것이었어요.
남산 등반길을 몹시 사랑하는 dpf는 이태원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죠. 그런데 전세에서 월세로  전환되는 현 추세와 달리 그 동네에 나와 있는 집은 전세집 뿐이었습니다. 아파트가 아니라 다주택 건물들이어서 그런 듯싶었어요.

당장 몫돈을 써야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부동산 업자가 권하는 집이 융자가 많은 집이어서 세입자보증금 - 최우선변제권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런 분야 깜깜이라서 뜻을 잘 모름.) 
하지만 상대하는 부동산업자가 dpf가 신뢰하는 사람이어서 그쪽에서 권하는 집으로 많이 마음이 기운 상태였어요. 아무튼 집을 비워줘야 하는 날짜가 잡혀 있고, 나온 집 그마저도 누가 채가기 전에 오늘 레아나와 함께 셋이서 집을 보러 갔습니다. 남산 소월길에서 가까운 집 위치며 건물 상태도 나쁘지 않은 곳이었어요. 세입자가 깨끗하게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고요. 

들어가서 매의 눈으로 여기저기 살펴보노라니, 거실 책상 위에 꽃잎이 세 개 둥둥 떠있는  유리 물잔이 놓여 있더군요. 무슨 꽃잎인가 가서 보니 개망초 꽃잎이었어요.  그 뒷 거실 창을 열었더니, 아아! 거기에 서너 평 가량의 텃밭이 펼쳐져 있는데 개망초들이 즐비했습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꽃잎들이 난분분 날리고 있었고요.
그걸 본 dpf는 저 꽃들이 불운을 제압해줄 것 같지 않냐며 덜컥 계약을 할 결심을 하고 말더군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계약서를 쓰기 위해 집을 나서자 익숙한  좁은 콘크리트 길이  나 있었고,  떠들떠들 소음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스쳐갔고, 자연히 그 집이 이태원의 그저그런 다주택 중의 한 집일 뿐이라는 실상을 절감했습니다.
집 구한 축하 파티로 생맥주 몇 잔을 마시고 헤어졌는데요,  삼겹살 파티에선 삼겹살을 굽고, 생선구이 파티에선 생선을 구워 먹었는데, 집 구한 파티에선 집을 구워 먹을 수 없는 일이더군요.

지상에 방 한 칸 없으면서 "내가 등을 대고 누으면 바로 거기가 내 집이지~"라는 식으로 선사처럼 말하는 이들이 가끔 있죠. 의도한 바 없이 인생을 통달했다는 자세를 취하는 건데, 그런 정답을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경우에는 사는 게 아주 덧없다는  생각이 저런 거구나 라는 짐작을 하게 돼요.  바로 그런 덧없는 조건 속에서 열심히 생활하다가 그 마지막 조건을 빼앗길 때 문득 자살하고 마는 이들이 있는 거고, 그건 마냥 남의 일만은 아닐 텐데.... (심호흡)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든 은퇴하게 되면, 저는 태양전지를 이고 있는 시골집에서 살 거예요.  한국이든,  마음에 점찍어둔 몇 나라 중 한 마을이든, 낮엔 다복한 햇볕을 받으며 밤에는 그 온기로 책을 읽을 수 있는 동네에서 살 겁니다. 맥주 한 잔에 골똘/착잡해 있던 dpf에게 암송해준 릴케의 이런 시나 뒤적이면서요. 

- 나를 축하하기 위하여 Mir zur Feier (중에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대는 삶을 이해할 필요가 없나니,
그러면 삶은 축제와 같아질 것이다.
마치 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많은 꽃잎들을 선물 받듯이
하루하루가 그대에게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라. 

꽃잎들을 모으고 아끼는 따위를
아이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아이는 꽃잎들이 기꺼이 사로잡힌
머리에서 살며시 털어서
사랑스러운 젊은 해年들에게
새로운 꽃잎들을 달라고 손을 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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