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0 03:36
- 1978년에 김기영 감독이 내놓은 영화입니다. 이것저것 할 일 없이 검색하다가 우연히 이게 통째로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걸 봐서 그만(...) 스포일러는 없게 적겠습니다.
(올리면서 자세히 보니 김자옥씨 이름이 제일 크게 적혀 있네요. 주인공도 아니지만 이 시절 인기가 상당하셨다던데 그 때문인 듯.)
- 몹시도 1979년스런 분위기의 구성진 여성 보컬곡과 함께 서울과 그곳의 어떤 대학교 풍경을 보게 됩니다. 잠시 후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MT를 떠나고. 여학생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난 자취를 오래해서 집 밖에선 손에 물 묻히고 싶지 않아!'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우리의 주인공 김정철 배우님은 지나가는 검은 나비 한 마리를 발견하고 준비해 온(!) 잠자리채를 들고 나비를 쫓습니다. 결국 나비를 잡고 준비해 온(!!) 약물로 나비를 죽여 보관하려는 그에게 혼자 놀러온 섹시한 또래 여성이 갑자기 생명과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훈계를 늘어 놓죠. 훈계가 끝난 그 여자분은 '오렌지 주스나 함께 한 잔 하자'면서 맛있는 환타를 귀여운 스누피컵에 따라주고. 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먹은 죄로 주인공은 생명의 위기에 처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어찌저찌 살아남은 주인공에겐 이후로 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이번엔 좀 더 멀쩡한 버전의 포스터 이미지를.)
- 장르가 참 모호한데. 호러삘이 충만하긴 하지만 호러라고 하긴 좀 애매하구요. 굳이 말하자면 환타지에 가까운 성격의 영화입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사실상 옴니버스... 라기보단 그냥 짤막한 괴담 에피소드 네 편을 모아 놓은 것에 가까운 형식의 이야기에요. 주인공은 모두 같구요.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이미지가 바로 첫부분에 등장하는 검은 나비. 그래서 제목이 저런가 봅니다. (근데 사실, 실제 스토리와 별 관련은 없는 제목입니다. ㅋㅋㅋ)
좀 짧은 한 시즌짜리 티비 시리즈로 리메이크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기가 은근히 안 촌스러워서 현대판으로 만들어도 위화감이 없겠더라구요.
- 일단 가장 크게 인상적인 부분은 뭐냐면...
웃깁니다.
네. 웃겨요. 그것도 상당히 웃깁니다. 보면서 이렇게 자주 웃은 영화는 참 오랜만이었네요. ㅋㅋㅋㅋ 사실 이런 영화인 줄 아예 모르고 봐서 더 웃겼는데. 그래서 이 글에다 이게 웃기는 영화라는 걸 적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뭐 이게 스포일러는 아니니까요. 그리고 웃긴다는 얘길 빼놓고 설명할 수가 없는 영화라서... 하하.
물론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그 시절과 현대와의 간극 때문에 생기는 웃음도 있어요. 하지만 분명히 감독이 의도한 걸로 보이는 개그들이 많은데 그게 지금도 대부분 먹힙니다.
그리고 한국 영화사에서 레전드 반열에 오른 감독 작품답게 (42년이나 묵은 영화라는 걸 고려할 때) 시대에 뒤떨어지고 촌스러운 구석이 별로 없어요. 바로 엊그제 본 1981년작 '깊은 밤 갑자기'와 대조되어서 그게 확 와닿더라구요. 아니 뭐 격하게 비현실적이면서 과하게 낭만적인 70년대식 문어체 대사들이 상영 시간 내내 펼쳐지긴 합니다만, 그걸 제외하면 연출이나 편집이나 미장센, 촬영까지 상당히 세련되고 안정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사실 저 문어체는 이 감독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하고. 또 다시 말하지만 이게 애초에 개그가 강한 영화이다 보니 그런 어색한 대사가 오히려 시너지를 발휘하는 부분들이 많아서 단점이라고 지적할 순 없네요.
(날자. 날아 보자.)
- 에피소드는 대략 넷으로 구분이 됩니다. 이 중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사실 하나로 이어지는 이야기이긴 한데 그래도 나누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설명은 안 하겠지만, 이야기들이 매번 마무리가 비슷하게 되는데 그 패턴이 총 네 번 등장하거든요.
모두 다 어두컴컴하고 괴이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확실히 웃겨요. 세 번째는 웃기는 것 거의 없이 그냥 다크하게 환상적인 이야기였다가... 마지막 네 번째는 갑작스레 멜로로 흘러갑니다. 솔직히 이 멜로 파트는 이 영화에서 가장 지루하고 별로인 부분이었는데요 (애초에 감정 이입을 할만큼 밑밥을 깐 게 전혀 없는데 난데 없이 격정 신파로 흘러가니;) 다행히도 그 끝에 상당히 화끈한 마무리가 기다리고 있어서 기분 좋게 감상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 배우 이야기를 하자면... 주인공 역할을 맡은 김정철씨는 제가 전혀 모르는 분입니다. 검색을 해 보니 옛날 한국 영화 많이 보신 분들에겐 유명한 분일 것 같고. 90년대 들어가서는 거의 감독을 하셨는데 연출작들이 대부분 그냥 에로 영화네요(...) 이 영화 촬영 당시엔 이미 나이가 30대였는데, 사실 그래 보입니다. ㅋㅋㅋㅋ
(왼쪽이 주인공 김정철씨. 오른쪽의 친구 캐릭터도 영화 내내 비중 있게 나옵니다. 근데 이 짤론 안 그래보이겠지만 두 분 다 그 시절 배우치곤 덜 촌스럽게 잘 생겼어요)
그리고 그 3, 4번 에피소드에는 우리가 잘 아는 유명 배우 두 분이 나오죠. 남궁원과 김자옥씨요. 무려 부녀 관계로 나오길래 나이가 어떻게되나... 하고 검색해보니 실제로는 17세 차이더라구요. 남궁원은 당시 40대였는데 살짝 50대 느낌으로 분장하고 나온 듯 하고, 김자옥씨는 반대로 실제 나이보다 좀 어린 역할로 설정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근데 사실 둘 다 극중 역할 나이와 비주얼이 잘 어울려서 영화만 보면 진짜 부녀 관계급 나이 차이로 보이더라구요. 연기는 뭐... 남궁원은 그냥 잘 생긴 옛날 사람. 딱 그 정도였고 김자옥씨 연기를 보는 게 재밌었습니다. 뽀얗고 젊은 모습이지만 제게 익숙한 중년 이후의 연기들로 익숙한 버릇 같은 게 그대로 보여서요.
근데 사실 여기 나온 배우분들의 연기를 진지하게 평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워낙 이야기들이 괴상해서, 그리고 대사들이 진짜 격하게 문어체들이라. ㅋㅋㅋㅋㅋ
- 환타지이다 보니 특수효과들이 자주 등장하죠. 일단 낚시줄 트릭이 상당히 자주 나오는데 잘 보면 다 보입니다. 소품들도 퀄리티가 조악해서 제작 여건의 열악함이 리얼하게 드러나구요. 그 외에도 어두컴컴한 배경에서 검은 옷을 입고 연기한다든가... 암튼 특수효과 자체는 굉장히 열악합니다만. 그런 부분 때문에 보다가 깨는 느낌은 신기하게 별로 없습니다. 애시당초 웃기는 장면이라서 그냥 웃어 넘기기도 하고, 효과는 조악해도 화면 연출이 괜찮아서 용납이 되기도 하고. 암튼 여러모로 감독의 악전고투가 느껴지지만 결과적으로 흠이라고 생각되진 않았습니다.
근데 한 가지 쇼킹했던 건... 구더기가 대량으로 등장하는 씬이 있는데. 그 시절에 무슨 cg를 썼을 리도 없는데 굉장히 리얼하더란 말이죠. 그렇단 건 실제로 구더기를 구해다가 뿌려놓고 그 위에 배우가 누워있었던 건지(...)
- 대충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재밌어요. 웃기기도 하고 또 어떤 장면들은 70년대 한국 영화라고 생각하기 힘든 과감함도 느껴지구요.
뭐 애초에 '하녀'의 김기영 작품이니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재밌는 영화였습니다.
어두컴컴 괴담과 개그 좋아하시고 괴작 스타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꼭 보세요. 개인적으로는 '하녀'보다도 더 재밌게 봤습니다. ㅋㅋㅋ
+ 주인공 설정이 달동네 살면서 생계와 학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하루에 라면만 여섯 번씩 끓여 먹는 가난한 고학생인데요. 그래서 초반에 계속해서 나오는 라면 취식 장면 때문에 지금 상당히 라면이 땡깁니다. ㅋㅋㅋㅋ 라면 끓이는 장면의 디테일도 좋았어요. 정확히는 라면이 펄펄 끓는 양은 남비를 숟가락으로 들어서 옮기는 장면의 디테일이 좋았습니다. 저도 옛날에 종종 썼던 방법이라서(...)
++ 다 보고 나서 이런저런 글들을 찾아보니 이 영화의 흥행 실패로 김기영 감독이 굉장히 상심했었다는 이야기가 보이네요. 아니 근데 감독님. 그 시절에 이런 영화를 만들어 놓고 흥행을 기대하셨단 말씀입니까. ㅋㅋㅋㅋㅋ
+++ 역시 다 보고 나서야 안 일이지만, 유튜브에 이렇게 볼만한 화질의 영상이 올라올 수 있었던 게 해외의 컬트적 호러 영화 전문 블루레이 제작사 덕분인가 보네요. 아마존에 검색해보니 정말로 18$에 지금도 팔고 있구요. 이 좋은 영화를 공짜 & 불법으로 봐 버린 죄책감에 구입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알고 보니 KMDB에서 볼 수 있대요. 회원 가입 후 vod 서비스로 볼 수 있다는데... 내친김에 여기도 가입해야겠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본 '깊은 밤 갑자기'의 주인공 김영애님도 진작에 돌아가셨죠. 어쩌다보니 또 일찍 세상을 떠난 여배우의 작품을 보게 됐네요.
게다가 그게 벌써 6년 전이더라구요. 다시 한 번 김자옥님의 명복을 빕니다.
2020.09.20 07:52
2020.09.20 13:58
꿈에서 만나 이렇게 디테일한 대화를 할 정도로 좋아하신다니 뭔가 감동적이네요!
영화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다음에 또 꿈에서 만나시면 전해주세요. 하하.
2020.09.20 21:41
꿈속에서 김기영 감독님을 만나다니요... 정말 신기하네요.
역시 김기영 영화를 볼 때마다 남자 주인공에게 김기영이 겹쳐보이는 건 어쩔 수 없죠 ㅋㅋㅋㅋㅋ 아내 돈을 그렇게 말아잡수셨으니 ㅋㅋㅋ
2020.09.20 11:45
잘한 일은 칭찬하자는 의미에서 곁들이자면 말씀하신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복원에 지대한 공헌을 한 "해외의 컬트적 호러 영화 전문 블루레이 제작사"가 미국의 몬도 마카브로라는 곳인데요, 바로 얼마 전 로이배티 님께서 감상 남기셨던 [깊은 밤 갑자기]가 훌륭하게 복원된 데에도 이 회사의 공이 컸답니다. 물론 필름 스캔과 복원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도맡았지만, 애초에 블루레이 출시 계획을 추진하고, 복원에 대한 수요를 만들고, 제작에 참여했고 아직 살아있는 원로 영화인들이나 다른 한국 영화 전문가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딴 주체는 몬도 마카브로니까요. 솔직히 구성에 들이는 공은 영자원에서 직접 기획한 블루레이들보다 낫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데(결코 영자원을 무시하는 건 아니고요. 네, 예산...), 태평양 건너의 외국 덕후가 운영하는 사실상 1인 제작사 수준의 중소 기업에서 몇십 년 된 한국 영화의 먼지를 털어내고 새로이 소개하는 작업을 이 정도로 해낸다는 데에서 아무래도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500장, 800장짜리 초회 한정판은 순식간에 다 팔리고 다시 일반판을 출시하는 걸 보면 장사도 지속가능한 수준으로 되는 것 같고요.
그리고... 놀랍도록 좋은 화질의 예고편!
2020.09.20 14:00
그게 또 1인 제작사 수준의 덕후 회사였다니 참 신기하면서... 아쉽네요. 한국 영화인데 한국에선 손도 못 대고 있고 말이죠.
블루레이 정보 찾아보니 표지부터 내용물까지 정성이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회사 대표가 누구신진 몰라도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 지경. ㄷㄷㄷ
2020.09.20 12:54
2020.09.20 14:01
베드씬이 한 번 나오긴 합니다. 딱히 신체 노출은 없지만... 그리고 내용 자체가 애들 보여줄 내용이 아니기도 하구요.
장르야 뭐. 뭐라고 하나 갖다 붙이기가 영 애매해서 이해하네요. ㅋㅋㅋㅋ
2020.09.20 16:33
2020.09.21 01:55
모든 걸 연결지어서 해석하려고 들면 난해하기 짝이 없지만 저처럼 단순무식한 관객들에겐 또 그냥 골때리게 웃겨서 신나는 영화였다는 점이 맘에 들어요.
박정희 부녀에 연결지은 해석은 재밌네요. 나름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하구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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