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 보고 왔습니다

2020.08.28 00:31

Sonny 조회 수: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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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있으면 막이 내릴 것 같아서 코로나를 뚫고 부리나케 <반도>를 보고 왔습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고 신파가 넘쳐난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어서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계속 호기심이 들더군요. 이를테면 이 영화는 CG를 떡칠한 영화이고 캐릭터나 장면들은 매우 기능적인데,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시네마틱하다는 감상을 계속 받았거든요. 시네마틱하다는 표현은 영화이되 영화같지 않은 어떤 공정성에 대한 안티테제인데, 사실 <반도>는 누가 봐도 그냥 돈이나 많이 벌라고 전 연령 보편적 관객들을 노린 상업영화잖아요. 그런데도 저는 이 영화에서 이상하게 시네마틱하다는 감정을 느꼈단 말이죠. 시네마틱하다는 것은 감독 개인의 취향이 강하게 드러날 때 생기는 현상일까요. 이 영화에는 좀비소굴이 된 현실과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 동심 가득한 장면들이나 청소년용 애니메이션 같은 멋부리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그런 것들이 묘하게 좀 인상깊었습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고 정말 인상적이라는 느낌. 지금 이 느낌을 왜 제가 받았는지 저도 좀 궁금해하는 중이에요.


그 외에도 여러가지 흥미로운 지점들이 있습니다. 일단 서대위. 이 캐릭터는 이 영화에서 없다시피 한 캐릭터에요. 전작인 <부산행>에서는 김의성의 캐릭터가 메인 안타고니스트를 맡았지만 정작 <반도>에서 서대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끝판에 가서야 뭘 하기는 하는데 그 전까지 주인공과 갈등을 일으키는 접촉지점은 거의 없어요. 사실상 이 영화에서 메인 빌런을 하고 있는 것은 황중사지 서대위가 아닙니다. 좀비 영화, 혹은 재난 영화에서 선의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과 대적하는 인물이라면 그 선의의 반대편에 있는 악의적 이기심을 가진 인물이어야하잖아요. 이걸 증명하기위해서는 타인을 희생시키는 비인간적 면모가 필수구요. 그런데 서대위는 그걸 아무 것도 안합니다. 황중사가 사실 이 영화의 스토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한 기능적 캐릭터라는 건 다들 아실거고, 가장 핵심적인 서대위는 부재하고, 부작위합니다. 서대위는 첫등장부터 자살을 하려고 합니다. 너무나 무기력한 인간이에요. 그렇다고 군을 적극적으로 통제하고 주인공들의 생존에 위협을 가하는 권력을 보여주는가. 그런 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캐릭터이고 흔히 그려지는 포악한 남성성은 아예 보이질 않습니다. 이 인물이 군을 통솔하는 장면은 딱 한번 나옵니다. 24시간 올림픽인가 뭔가를 한다면서 군인들에게 연설을 하는 장면인데 그 모습은 리더의 권력이 아니라 무슨 통신병 같은 느낌을 주죠. 연상호는 왜 이런 인물을 정석의 반대편에 갖다놓은 것일까요. 그 지점에 이 영화의 핵심이 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도 흥미롭습니다. 반도란 뜻은 대륙에 연결되어있지만 바다로 튀어나온 지점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것은 전작인 <부산행>에 비교해봤을 때 그 규모나 개념 면에서 아주 다르죠. 부산이란 도시에 가면 어떻게든 재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담은 제목이 <부산행>입니다. 국가적인 재난이 터졌지만 그래도 나라 안에서, 어딘가 유토피아는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서 도망을 칩니다. 그런데 <반도>는 그런 게 아니죠. 반도행이 아니라, 그냥 반도라는 지리학적 단위가 영화의 제목입니다. 희망을 적극적으로 구하는 게 아니라 이미 희망이 끝난 상황 자체를 제목으로 결정지었어요. 그래서인지 영화 속 어른들은 다들 생기가 없습니다. 전투에 치열하고 뭔가를 하려 하지만 영화의 톤부터 해서 이들의 행동은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부산행>이 갑자기 생겨난 지옥에서 탈출하려는 영화라면, <반도>는 그 지옥으로 다시 기어들어가야하는 절망적인 영화입니다. 영화 안에서 반도란 단어는 정상적 사회에서 툭 튀어나온 비정상적 세계를 가리키는 것처럼 들리는데, 최근 한국사회가 꽤나 희망적인 변화를 보였음에도 연상호가 느끼는 그 고립감과 절망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좀 궁금하기도 합니다. 국가적 재난을 세계적으로 키우면서 난민 이슈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도 상기해볼만 하구요. 한국인이 난민이 되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까요.


<부산행>이 지켜야 할 것을 끝끝내 지키는 이야기라면, <반도>는 끝내 지키지 못했던 것을 다시 지키려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반도>의 어둡고 황폐한 세계는 그저 공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물의 심정을 담은 이야기같기도 합니다. 볕이 들고 행복하게 보이는 이미지는 말미에 딱 한번 나오는데, 이 영화의 어두운 이미지가 러닝타임 내내 이어진다는 걸 상기해본다면 <부산행>과 달리 현재의 삶은 훨씬 더 척박하고 건조하게 느껴진다는 연상호 본인의 심리 같기도 합니다. <부산행>에서는 분명히 아이를 구하고 최소한의 도덕을 지켜냈거든요. 그런데 <반도>에서는 도덕을 지키는데 실패한 사람들이 계속 자책하고 거기에 매달리며 어떻게든 속죄를 하려고 합니다. <부산행>에서는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희생을 자처하면서도 최후의 가치를 지켜냈는데, <반도>에서는 왜 그렇게 사과를 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세계는 어떻게 되어버린 것일까요. 


<반도>가 오락영화로서 얼마나 허술한지는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심지어 그걸 만든 연상호도 모르고 있는 것 같진 않거든요. 저는 연상호가 던지는 이 질문들이 더 흥미롭습니다. 갇힌 사람들, 세상을 망친 사람들, 좀비가 세상을 망쳤는데 좀비를 쏴죽이는 어른들이 사과를 합니다. 그는 우리 사회의 무엇에서 그토록 어른의 책임감을 느끼고 아이들을 구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어찌보면 <반도>는 황폐해진 세계를 볼 때 환경파괴와 수복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제 못쓰게 되어버린 땅을 두고 원래 그랬냐고 물어본다면, 예전엔 이러지 않았다고 과거를 경험한 세대가 말해야하잖아요. 아무렇지 않게 좀비들을 드리프트로 쓸어버리는 이레의 모습에서 저는 <설국열차>의 고아성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암울한 시대에 태어난 뉴 제네레이션은 그렇게 비범해지는 게 아닐까요. 여러모로 가슴이 복잡해집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엄마들을 어떻게 구해낼 수 있을까요.


@ 강동원 액션 참 잘합니다. 저는 이 배우가 밀리터리 액션물을 한번은 찍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탈출에 성공하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저는 오히려 그 해피엔딩이 너무 환상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엔이 그렇게 좋은 집단도 아닐 뿐더러 외부의 선한 존재가 우리를 구해준다는 설정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 서대위라면 오히려 자신들이 정석 일행을 지켜주겠다고 하고 어떻게든 합류해서 같이 싸우다 틀어지는 식으로 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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