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1 09:30
어렸을때는 방학이 되면 시골 큰집에 갔어요.
열흘 정도 큰집에 가서 할머니도 뵙고 사촌형, 누나들이랑도 놀았습니다.
초딩때 여름방학을 하고 큰집에 가는 날이었는데, 태풍이 온다는 겁니다.
이미 버스표도 끊어놨고, 당시 지방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이미 큰집에 가 계시고...
어머니는 초딩 고학년인 저와 저학년인 동생을 데리고 (공부하고 여름방학 숙제 해야 한다고)바리바리 싼 책들을 메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때 왜 강행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버지를 두달동안 만나지 못했고, 태풍이야 하루 이틀이면 지나가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도 하신거겠죠.
비바람이 불어서 평소 3시간30분 정도 걸렸었던 고속버스는 5시간을 달려도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있었고, 동생은 차멀미에 다 게워내고 끙끙 앓고 있었는데..
버스기사님이 차를 세우고 '앞에 침수되어서 더이상 못간다. 내릴 사람은 내리고, 버스는 돌려서 다시 서울로 간다' 라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동생이 끙끙 앓고 있는데, 다시 온만큼 돌아가라고? 라는 생각에 요즘 말로 멘붕이셨는데...
그 동네 사시는 것 같은 아저씨 몇분이 거의 다 왔다며 그냥 걸어가신다고.. 한시간쯤 걸어가면 될거라고 주섬주섬 내리실 준비를 하시는걸 보고, '아, 저분들을 따라가야겠다!' 라면서 저희도 짐을 챙겨 내렸습니다.
요즘 같으면 뉴스를 보면서 '아니, 이 수해에 저기를 왜가!!' 라고 할만한 오판이었습니다.
비는 계속 쏟아지고 어머니는 동생을 업고, 아저씨들이 옷가방을 들어주고 저는 책이 가득 든 배낭을 메고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는데, 침수지역이 나왔어요.
아저씨들이 그냥 돌파한다고 해서... 따라 가는데, 초딩 고학년인 저한테 가슴까지 물이 오더군요. 그래서 책이 젖을까봐 배낭을 머리에 이고 지나갔습니다.
(나중에 들었는데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고..)
그렇게 침수지역을 돌파(?)하고, 터벅터벅 한시간정도 걸어가는데 대형 화물차가 지나갔어요. 아저씨들이 손을 흔들어서 차를 세우고 여기 아주머니랑 애들이 고생인데 읍내까지만 좀 태워달라고 하니 기사님이 흔쾌히 태워주시더군요. '버스나 작은 차는 못 지나간다. 이차처럼 흡입구가 위쪽에도 있는 차들이나 지나간다' 라고 하셨던 말이 기억납니다. 한참을 걸어도 읍내 도착을 못했는데, 차를 타니 금방 도착했습니다.
읍내에 내려서 큰집에 전화를 하니, 큰집도 나오는 길이 침수되었다며 아니 거기까지 어떻게 왔냐고 깜짝 놀라셨다고...
그래서 일단 가까운 여관에 들어가서 몸을 씻고 말리고 책도 말리고 쉬었습니다.
그때는 신용카드 보급률이 매우 낮은 시절이었는데, 3일치 선불을 내고 들어갔죠.
다음날, 쫄딱 젖은 어떤 아저씨가 할머니가 '겨우 몸만 빠져나왔는데, 어머니만이라도 몸 좀 말리게 해달라'며 좀 쉬게 해달라고 여관 주인에게 사정사정 하는데, 여관주인이 방이 다 찼다며 매몰차게 거절하는것을 목격했는데, 요즘처럼 대피소 이런 것도 제대로 안되던 시절이었던것 같습니다.
비는 다음날 오전까지 내리다가 그쳤는데, 여관 옥상에 올라가보니 읍내가 비로 인해 거의 고립되다 시피 했더군요. 논밭, 다리 다 침수...
3일째 되는 날 물이 좀 빠지면서 아버지랑 큰아버지가 부랴부랴 차를 타고 데리러 왔어요.
큰아버지는 침수된 곳을 지나갔다는 말에 '그러다가 넘어지거나 흘러내려오는 뱀이나 동물들한테 휘감기면 큰일난다. 아이고.. 정말 천만 다행이네' 하셨고..
그러고는 큰집가서 잘 놀았습니다.
폭우가 와서 몸만 달랑 빠져나온 것도 아니었고...
큰집 놀러가다가 그런거라.. 대단한 고생을 한건 아니었지요.
딱 네가지는 기억이 생생해요.
물이 겨드랑이까지 찰랑찰랑 차는데, 책가방을 머리에 이고 엄마 따라 가던 것...
화물차 아저씨가 '이런 대형 트럭은 공기흡입구가 위에도 있어서 침수되어도 지나갈 수 있다' 라고 한 것..
할머니를 모시고 온 아저씨가 어머니만 좀 모시게 해달라고 울면서 사정사정하던 것
그리고 여관 옥상에서 본 광경
P.S) 여름방학 일기에 그 일을 적었는데, 담임이 반애들 앞에서 '가라가 바보 같이 태풍 오는데 놀러가서 그 고생을 했네~ 거길 왜가냐' 라면서 비웃었던 것도 기억이 생생. 지금은 아마도 고령으로 돌아가셨을 서울 **초등학교 김종* 선생
하긴, 저도 뉴스 보면서 캠핑장에서 고립이 되었네 라는 내용을 보면 '아니, 이 폭우에 캠핑을 왜가..' 라고 하는군요.
2020.08.11 09:51
2020.08.11 13:11
어머니가 '가봐야 어차피 놀기만 하는데 내가 왜 공부 시킨다고 책을 싸왔을까' 라고 후회 하셨죠. ㅋㅋㅋ
2020.08.11 12:36
저도 반지하에 살때에, 기생충과 비슷하진 않지만,,, 방도 침수되고 부엌의 곤로와 그릇들이 둥둥 떠있던 기억이 나네요.
비그친 동네에서 뗏목타고 놀던 기억도,,,
시골 할아버지댁에 갈때에 버스가 못들어가서 물을 건너갔던 기억도....
다 옛날 얘기고, 요즘은 제가 사는 곳에서는 더이상 못보는 광경이죠...
2020.08.11 13:13
기후위기 때문에 다시 자주 보는 광경이 안되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2020.08.11 14:48
사실 '수해'라는 게 80년대에는 꽤 흔한 풍경이긴 했죠. 매년 여름마다 몇 주 동안 뉴스에 보이는 침수 풍경들. 학교 강당이나 체육관으로 대피한 사람들. 집에 물이 들어차서 세간이 둥둥 떠다니는 풍경. 그 와중에 허리까지 물에 잠겨서 등하교 하는 학생들 모습... 그리고 이어지는 성금 모금 전화 광고;
저는 운이 좋아서 그 정도까진 아니고 대략 발목까지 잠기며 등하교 하는 정도였는데 누나는 학교 앞이 수해 날 때마다 물이 들이차는 곳이라 가방 머리에 이고 등교하고 그랬어요.
2020.08.12 09:03
요즘 같으면 그정도면 휴교 아닌가요...
2020.08.11 14:55
지브리 애니 본 것 같은 얘기예요... 책을 이고 건너가는 가라님 가족앞에 나타난 커다란 메기 요정 뭐 그런 거....?(쿨럭)
여관 주인분 너무 매정하셨네요... 방은 없었어도 세탁실 같은 공간에서 몸이라도 씻고 옷 좀 말리게 해주셨을 수도 있었을텐데.
아니 근데 김종* 선생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ㅠ ㅠ
"우리 가라가 용케도 태풍을 피했네 행운이다 ^^ 무사히 돌아온 가라를 축하해주자 얘들아" 하진 못할망정....
너무해요!!!!
2020.08.12 09:06
날이 맑고 물이 깨끗했으면 포뇨의 한장면이었을지 모르지만.... (...)
그때 선생님과 반아이들이 비웃음이 아직도 귀에 생생.
2020.08.11 15:06
2020.08.12 09:07
북한에서 쌀도 준 적이 있었군요. 그러고 보니 고난의 행군이 90년대 전후였으니..
2020.08.11 15:27
전 어렸을적에 한강이 바라 보이는 곳에 살았었는데 여름철마다 집 떠내려가고 소 떠내려가는거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살던 동네는 고지대라 물난리 피해를 입지 않았었는데 동네에서 한강이 잘 내려다 보이는 고개마루인지 언덕인지에 사람들이 무지 많이 모여들어 물난리 구경하던 장면도 생생해요. 그런 물난리 난 뒤에 동네에 폐사한 닭, 오리를 트럭에 실고 헐값에 팔고 다니는 사람도 있던 그런 시절이었죠.
알고보니 그 시절에는 한강조차 제방이라던가 배수시설이라던가 제대로 갖추지 못해서 여름철마다 물난리가 많이 났던거였어요.
한강이 그 지경이었으니 다른 곳들은 더 심각했을게 뻔하죠.
여름철 홍수피해는 상수였고 ‘국군장병아저씨’들이 동원되어 수해복구를 하는 장면을 ‘대한뉘우스’로 보던 시절
최근까지 과거의 그런 심각한 홍수피해가 점점 줄어들었던 것은 강우량이 줄어들어서가 아니라 대비의 수준이 점점 더 좋아진 덕이었던거죠.
이제는 왠만한 큰 비가 내려도 큰 물난리가 나지 않을 정도 수자원관리가 되고 있었는데
이번 전국적인 물난리를 보면서 이제 방재기준치를 바꿔야할 정도로 기후위기가 심각해진게 아닌가 싶습니다.
2020.08.12 09:08
고수부지 잠기고 농구대 보여주고 하는게 여름 단골 뉴스였던...
이제 기후위기에 대해 좀 더 고민해야 할 것 같은데, 이놈의 미통당은 4대강을 갑자기 띄우니... 하아..
2020.08.11 15:46
배낭을 이고 가는 게 위험한 행동이지만 책이 중요하니까 어쩔 수 없겠지요 ㅎㅎㅎ;;
(책이 젖거나 책을 버리면 등짝이 위험해지는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