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콘서트의 옛날 코너들

2024.06.04 10:55

Sonny 조회 수:190

요즘 개콘을 몇번 보니까 제 유튜브 알고리즘에 옛날 개그콘서트 영상들이 뜨더군요. 그렇게 알고리즘에 휩쓸려서 예전 개콘 영상들을 몇개 봤습니다. 코미디 빅리그와 비교해보면 확실히 정통파 꽁트 스타일이라는 게 느껴집니다. 저는 주어진 극을 파괴하거나 실패 자체를 웃음소재로 삼는 코빅보다는 약속을 지키면서 연기로 딱 웃기는 개콘이 더 제 스타일이긴 하더군요. 


요새 연극 보는 것에 재미가 들려서 그런지, 개콘의 코너들이 다시 볼 때 훨씬 더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무엇보다도 다들 연기를 잘합니다. 예전에 사우나에서 해피투게더를 할 때 유해진씨가 신봉선씨 연기 정말 잘한다고 칭찬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란 유행어를 남겼던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 같은 코너를 보면 박성광과 허안나의 연기가 정말 대단합니다. 엔지를 내면 안되는데도 받아주는 연기를 하는 경찰 역의 이광섭씨가 웃음을 힘겹게 참는 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어쩌면 개그콘서트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코메디 장르의 연극을 가장 열심히 보고 즐기던 하나의 창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연기라면 다들 쟁쟁하지만 제가 연기라는 측면에서 인상깊게 본 개그맨이 있습니다. 바로 이문재씨인데요. 아마 많은 분들이 [두근두근]이란 코너로 기억하실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썸"이라는 단어도 없어서 이 꽁트를 통해 친구와 애인 사이의 그 미묘한 감각을 즐겼던 것 같습니다. 이분이 생긴 것도 꽤 잘 생긴데다가, 코메디 꽁트 특성상 울었다 웃었다 하는 식으로 빠른 감정변화를 연기해야하는데 그 부분에서 몰입력이 정말 좋으시더군요. 저는 [나쁜 사람]이란 코너에서 이문재씨를 좋아합니다. 사실 이 코너는 크게 웃기는 부분이 없는데 오로지 이문재씨가 울며 흐느끼는 오버액션 하나에 의존합니다. 표정연기만으로 사람을 웃기는 게 쉽지 않은데 이 코너에서 이문재씨는 그걸 해냅니다. (쓰다보니 '페이소스'란 효과에 대해 쓰고 싶어지는데 그건 나중에...)




개그콘서트가 잘됐던 이유는 단순히 연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얼마전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란 코너를 보면서 아이디어도 정말 좋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이제 막 교도소에서 출소한 젊은 남자가, 노인 둘뿐인 어떤 공간에서 자꾸 범죄의 유혹을 받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웃음을 유발할 때 자주 다루는 딜레마적인 상황이죠. 주인공은 착하게 살고 싶은데, 상황이 범죄를 저지르기에 너무 편리합니다. 주인공의 정체를 모르는 두 노인은 자꾸 무방비하게 중요한 정보를 떠듭니다. 금고 열쇠가 어디 있다거나, 언제부터 집을 비운다든가 하는 것들이요. 주인공을 이걸 들을때마다 곤란해서 펄쩍 뜁니다. 이건 굳이 범죄의 욕심이 없어도 옆에서 들으면 괜히 식겁하게 되죠. 누굴 비하하거나 일상의 디테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절묘한 상황 자체를 만든다는 것에서 감탄하게 되더군요. 견물생심 같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슬쩍 긁는 지점이 인상깊습니다.


특히 웃기는 지점은 경찰 역을 맡은 김장군씨가 주인공을 보면서 능글맞은 미소로 뭔가를 말하는 장면입니다. 상식적으로 경찰이 치안 공백 상태를 저렇게 여봐란듯이 말할 리가 없습니다. 이 장면에서 해석을 더 밀고 나아가게 되더군요. 혹시 이 코너의 상황 전체가, 주인공의 욕망이 투영된 결과가 아닐까 하고요. 자신의 어두운 욕망을 인정할 수 없으니까 그 욕망을 필연으로 만들려는 무의식이 발동한 것이라면? 노인들은 분명히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데 그걸 자기가 엿들으면서 '왜 저렇게 크게 말해!'라는 합리화를 꾀한 것이라면? 그렇게 보면 이 코너는 '환상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주인공의 양심과 욕망이 서로 싸우면서 만들어낸 비현실적 공간 같기도 하구요. 당신이 사악한 짓을 저지르기 편하게끔 경찰인 내가 정확한 정보를 줄게~ 라면서 웃는 김장군의 표정은 뭔가 악마의 유혹같은 느낌이 있지 않나요?


예전의 개그콘서트가 잘 나갔던 건 바로 이런 통찰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관객과 시청자를 웃기려는 목적에서 출발하지만 들여다보면 인간의 욕망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엿보입니다. 희극적인 상황과 비극적인 상황 모두 결국 인간의 욕망이 극적으로 실패하는 지점들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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