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1 13:34
-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입니다. 상영 시간이 좀 길어서 두 시간 십 분 남짓이구요. 스포일러 없게 적겠습니다.
(넷플릭스제 영화 포스터들 중엔 거의 역대급에 가까운 정성이 들어간 포스터 아닌가 싶습니다. 배우값 때문에? ㅋㅋ)
- 녹켐스티프. 참 특이한 이름이네요. 오하이오주에 실제로 있는 깡촌 마을이고 이 영화의 원작자가 실제로 태어나고 자란 곳이랍니다. 암튼 뭔가 태평스런 어조의 전지적 작가님께서 나레이션으로 이 동네에 대해 가볍게 투덜거려주시고. 군대 다녀오는 (아마 2차 대전이겠죠?) 훈남 청년을 소개합니다. 어쩐지 삐에로 분장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이 청년이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고, 가정을 꾸리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동네 사람들과 엮이고... 하는 장면들이 한가롭고 훈훈하게 지나가는 가운데 난데 없이 '얘들은 나중에 연쇄살인범들이 됨 ㅋㅋ' 같은 나레이션이 튀어나와서 영화의 장르를 혼동하지 않게 해 주고요. 이러쿵저러쿵 하다가 세월이 흐르고 결국 사건이 벌어지는데...
음. 이걸 뭔가 하나의 줄기로 요약하기가 애매하네요. 암튼 사람들의 믿음, 신앙 같은 부분들을 주된 소재로 해서 이십년 정도의 시간 동안 '녹켐스티프'의 사람들이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며 가차 없이 죽어나가는 운명의 장난을 그리는 이야기입니다.
- 나레이터의 역할이 굉장히 큽니다. 이 양반은 시종일관 차분하고 심지어 살짝 유쾌한 어조로 상황 설명을 하며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벌어지는 사건들은 연쇄 살인에다가 뭐뭐 되게 비극적이고 끔찍한 일들이란 말이죠. 그래서 이 이야기 전체가 거대한 운명의 굴레 속에서 몸부림치는 하찮은 톱니바퀴들의 이야기 같은 느낌을 줘요. 코엔 형제의 영화들이 떠오르는 대목인데... 사실 끝까지 다 보고 나면 코엔 영화와는 다릅니다만. 일단 보는 중에는 상당히 비슷하단 느낌을 주죠.
어쨌든 이 '신은 아니지만 아무튼 전지적인' 나레이터가 영화의 분위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자체는 분명합니다.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가 날뛰는 영화인데 이야기 톤은 포레스트 검프 느낌이랄까요. 그 위화감을 즐기느냐 마느냐가 영화에 대한 최종 인상에 큰 영향을 주는 것 같구요.
- 계속해서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주로 개신교 신앙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극중에서 종교가 없는 인물들 조차도 뭔가에 매달리고 집착하며 그것을 '믿으려' 드는 건 마찬가지더군요.
그리고 이 개신교 신앙은 뭐... 상당히 시니컬하고 비판적으로 다뤄지죠. 독실한 분들이라면 좀 불만일 수도 있겠는데. 개인적으로 좀 헷갈리는 건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스치듯 지나가는 인물 한 명의 얼굴이 영락없이 예수 초상화 코스프레라서...; 뭐지. 이 작가 양반 사실은 교인이셨나. 이 영화의 테마가 내가 생각했던 거랑은 좀 다른 맥락이었나... 이런 생각을 문득 해보게 되더군요.
- 배우들이 은근히 화려합니다. 일단 남자 배우들 중 비중 있는 셋이 각각 스파이더맨, 윈터솔져와 차세대 배트맨이구요. 스파이더맨의 아버지는 빌 스카스가드. 해리 포터 출신에 얼마 전 '올드가드'에도 나왔던 해리 멜링도 나와요. 여배우들 역시 엘리자 스캔런, 미아 바시코프스카, 헤일리 베넷 등 이름 있는 분들이 많이 나오는데... 여배우들은 사실 좀 애매한 기분이 듭니다. 여성들이 계속 이야기 전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긴 하지만 그 '결정적인 역할'이란 게 좀... 뭐 그래요. ㅋㅋ 그냥 남자들을 '운명의 굴레'에 빠뜨리는 도구적인 역할들이랄까. 어차피 남자들도 다 톱니바퀴 1, 2, 3 정도의 역할이긴 하지만 갸들은 몸부림이라도 쳐 보긴 하는데 반해 여성 캐릭터들은 다 매우 수동적입니다. 그리고... 음. 스포일러는 피해야 하니 이만 하죠.
사이코패스 살인마 역을 맡은 분도 분명히 낯이 익어서 찾아보니 제이슨 클라크.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제로 다크 서티에서 주인공 동료인지 상사인지로 나왔던 그 분이더군요.
근데 어쨌거나 모두들 연기는 좋습니다. 톰 홀랜드를 제외하곤 다들 분량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그 짧은 와중에 다들 열심히 연기 하더라구요. 스파이더맨을 벗어나니 상당히 근사한 배우로 보이는 톰 홀랜드를 비롯해서 여전히 '아 나 진짜 트와일라잇 나온 그 남자 아니라고!!'라고 절규하는 느낌의 로버트 패틴슨 연기도 좋았구요. 빌 스카스가드의 광기 어린 연기도 좋았고 여배우들도 캐릭터들은 좀 뻔할지언정 연기들은 다 훌륭했어요.
- 이야기 측면에서 말해보자면, 가장 맘에 들었던 부분은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튈지 예상이 잘 안 되는 이야기'였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야기 초장에 '얘들은 나중에 연쇄 살인마가 된다'고 툭 던져졌을 땐 당연히 주인공들이 그들과 엮이면서 흘러가는 스릴 넘치는 대결 이야기를 짐작하게 되잖아요. 근데 갸들이 한동안 그냥 안 나옵니다? ㅋㅋㅋ 그리고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뭔가 다 예측하기 힘든 파국을 맞아요. 마치 단독 주인공처럼 보이던 톰 홀랜드의 캐릭터도 뭐 단독 주인공인 건 맞긴 한데 분량이 그렇게 압도적이지가 않구요. 그나마도 그냥 운명 따라 흘러다니다가 본인이 뭔가 결심하는 건 막판이 다 되어서이고 그나마도 본인 계획대로 해내는 일이 별로 없구요.
이렇게 예측이 잘 안 되는 가운데 계속해서 긴장감은 유지를 해주기 때문에 두 시간이 넘는 분량이 길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찾아보니 원작 소설이 그 작가의 장편 데뷔작이자 비평, 흥행 양면에서 최고 히트작인 것 같은데 그럴만 했겠다는 느낌. 재밌더라구요.
- 대충 종합해보겠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무비들의 평균치는 확실하게 좀 멀리 뛰어넘는 완성도의 영화입니다. 스토리 좋고 배우들 좋고 연출도 좋고 뭐 딱히 흠 잡을 데 없이 잘 만들었어요.
영화가 다루는 소재에 대한 거부감, 살인 스릴러 장르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분들이라면 대부분 즐기실 수 있을 작품이었구요.
특히 살짝 코엔 형제 분위기를 풍기지만 결이 다르다는 것도 매력 포인트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레알 코엔 형제보단 좀 라이트하달까... 군상극에 가깝다는 점에서 로버트 알트만 생각도 조금 났구요.
암튼 취향에 따라 호불호는 갈려도 '대체로 수작 이상'이라는 데엔 의견이 크게 갈릴 것 같지 않은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넷플릭스 유저라면 한 번 보실만 해요.
+ 워낙 배우들이 화려하다 보니 그게 나름 화제가 되어서 이런 식의 짤들이 많더라구요.
주력 남배우 4인방.
여배우 포함 버전이면서 동시에 캐스팅 변경 전 버전이라 캡틴 아메리카가 들어가 있군요. 그러고보니 웃기네요. 캡틴 아메리카가 빠지고 윈터솔져 투입이라니(...)
++ 암튼 히어로물 배우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런 경우가 하도 많아서 이젠 마블 배우들 소재로는 캐스팅 농담도 식상해서 못 하겠더라구요.
이 분들이 마블 덕에 인지도 부스트 얻어서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하게 되는 데다가 또 마블 영화 자체가 워낙 편수가 많으니 거기 나왔던 배우들만 해도 몇 트럭이고...;
+++ 이런 범죄물들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옛날'이 참 나쁜 놈들 살기는 편했을 거에요. 뭐 과학 수사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니 경찰들 수사력도 모자라고. 국가 행정력도 한참 딸리던 시절이라 잠적하거나 신분 세탁하고 새 삶을 사는 것의 난이도도 상대적으로 낮을 거구요. 특히나 미국처럼 거대한 시골 같은 나라라면야...
2020.09.21 13:46
2020.09.22 02:57
버키 이 자식은 극중에서도 현실에서도 계속 친구 빽으로... ㅋㅋㅋㅋ
소설은 그렇군요. 그렇다면 저도 영화의 결말 쪽에 걸겠습니다. 하하.
2020.09.21 14:00
어디선가 '전광훈' 같은 사람이 나온다. 라고 해서... (...)
2020.09.21 14:05
전광훈보다는 개신교계의 그루밍범죄를 저질렀던 많은 멋쟁이 전도사/목사님들이 떠오르더라고요. 파리 열방교회의 송 모 목사같은.
2020.09.22 02:58
뭐 전광훈만큼은 아닙니다. 그만큼 화려한 악행을 뽐내기엔 할당된 분량이 그렇게 크지 않아요. ㅋㅋㅋ
2020.09.21 14:25
오 간만에 넷플릭스에서 볼만한게 생겼네요~ 조금 어두운 분위기일거 같은게 걸리긴 하지만요 ㅠㅠ
2020.09.22 02:59
사실 조금이 아니라 대놓고 많이 어둡습니다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끔찍한 모습을 대놓고 보여주는 연출은 거의 없습니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다 가리거나 순화시켜 보여줘서 좋았어요.
2020.09.21 14:48
2020.09.22 03:00
네 다들 코엔 형제 얘길 하는데 사실 안 떠오를 수가 없더라구요. ㅋㅋ
저도 몰입해서 참 재밌게 봤습니다. 한 번 이야기가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나니 긴장감이 확 살아나더라구요.
2020.09.21 16:31
여기 올라온 다른 감상글에도 똑같이 적었지만 이미 정해진 운명에 도구처럼 쓰이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남캐들에 비해 여캐들은 죄다 그냥 그렇게... 나와서 좀 그렇더군요. 최근 몇년간 PC가 화두인데 이렇게 정반대편에 있는 작품(전원 백인 캐스팅, 상대적으로 비중 적고 기능적인 여성 캐릭터)이 대놓고 나와서 좀 신선했어요 ㅋㅋ
그런 불편한 부분을 빼면 2시간 10분여의 시간이 언제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흡입력 있고 정말 탄탄하게 잘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최근 넷플 오리지널 영화가 이제 그만 끝낼까해에 이어 연속으로 훌륭한 작품이 나왔네요.
2020.09.21 16:44
이제 그만 끝낼까해도 참 예상과는 다른영화여서 당황했어요 ㅋㅋ 나중에 찰리카우프먼이 만든 영환거 알고 에이 그럼그렇지했습니다. 제시 버클리의 매력이 아주그냥 좔좔흐르는 영화였지요. 언럭키 맷데이먼이신 제시 플레먼스님은 아예 그런 캐릭터로 굳은모양이에요 ㅎㅎ 브레이킹배드 이후로 항상 이런식입니다. 약간 의뭉스러운 곰상 캐릭터 전문으로 가시는듯.
2020.09.21 17:13
중간 중간 좀 힘들고 난해하긴 했는데 엔딩까지 보고나서 아 그런내용이구나 대략 짐작을 했었지만 감독 인터뷰랑 분석해놓은 외국 리뷰를 보니까 이거야말로 진짜 올해의 최고로 암울한 작품이더군요. 괜히 저까지 우울해져요 ㅎㅎ
2020.09.21 20:28
그러게요. 여캐들 임팩트가 넘 없었네요. 그리고 이제 그만 끝낼까 해에 이어 연속으로 훌륭한 작품이 나왔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감독님이 두 번, 세 번 보게끔 의도하고 만들었다고 하는 데 스트리밍으로 영화 보는 시대에 굉장히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본 사람이 요점을 정리해준 글을 읽고 다시 볼 동기가 많이 감소하긴 했지만요(...) 분명히 일반적인 영화들에 비해 매우 무척 비참할 정도로 우울한 영화인데 어쩌면 그 비참한 상태 보다 더 우울하고 더 소외된 상태의 사람들을 위로해 주려는 어떤 뜨거운 열망을 감독이 가진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2020.09.21 21:37
2020.09.22 03:01
대놓고 PC의 정반대 노선이라 신선했다... 라는 말씀에 많이 공감합니다. 저도 딱 그 생각을 하면서 봤어요. 옛날 영화 보는 기분이랄까요. ㅋㅋ
'이제 그만 끝낼까해'도 리스트에 넣어두고 조만간 봐야겠군요. 추천(?) 감사합니다!
2020.09.21 21:58
2020.09.21 23:17
아 라이트하우스! 보는 걸 잊고있었네요. 패틴슨님 기대 됩니다.ㅎㅎ
2020.09.22 03:03
사실 여성 캐릭터들 중 분량은 가장 많았죠. 상대적으로 배우로서의 무게감이 떨어지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아님 맡은 역할이 그래(?)서일 수도 있겠고.
맞아요 이 영화에선 그래도 잘 생기고 매력적인 면이 있는 캐릭터로 나오긴 했죠. ㅋㅋ 더 라이트 하우스는 안 봤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니 또 관심이 가네요. 언젠간 꼭 볼 영화 리스트에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ㅋㅋㅋ
-자기소설 영화화해서 나레이션하는 건 소설가의 웻드림 아니겠습니까 ㅋㅋ 전 이양반 목소리가 마음에 들더라고요. 자전적인 면이 있는 소설같던데 말투도 어울리고요.
-제이슨 클라크는 인류의 구원자 존 코너였습니다아!
-윈터솔져대타는 캡틴아메리카 추천이었다는것 같습니다 ㅎㅎ
-소설은 좀더 꿈도희망도 없는 버전이라던데 저는 이영화의 결말이 조금 안심되어서 좋았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