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6 18:01
- 작년 영화구요. 런닝타임은 무려 2시간 7분. 스포일러의 기준이 참 모호한 영화라 일단 이 글은 스포일러를 극도로 자제해서 짧게 적고 나중에 스포일러 만발 버전을 따로 적든가... 해보겠습니다.
(감독, 각본에 음악까지 아주 화려한 위용을 자랑하는 구성이고 평가도 그만큼 잘 받은 영화죠.)
- 일본 소도시의 평화로운 야경... 을 보여주나 했더니 빌딩 하나가 불에 타고 있군요. 소방차가 달려가고 난리가 난 가운데 근방 주택 베란다에서 불구경을 하는 모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빠는 돌아가셨고 단 둘이 살아요. 엄마 이름은 사오리, 아들 이름은 미나토네요. 사이 좋고 다정한 모자로 보입니다만... 중략하고 미나토가 자꾸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사오리는 집단 따돌림을 의심해서 아들에게 이것저것 캐물어 보다가 결국 담임인 '호리' 선생이 아들을 학대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바로 학교로 쳐들어가 따지기 시작하는데 교장 휘하 교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일본 영화에서 자주 본 사과 방식, 그러니까 우린 아무 것도 확실하게 인정하지 않겠지만 무조건 정중하게 사과하는 폼은 잡아줄 테니 이걸로 끝내주면 안 되겠니? 를 시전하구요. 이들의 이런 대응에 기가 막힌 사오리는 일단은 물러 나오지만 곧바로 미나토에게 또 이상한 일이 생기니 다음 번엔 작정을 하고는...
(고지라의 옆집 아줌마가 이번에도 애 키우기에 도전합니다!!!)
- 근데 영화를 이미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위에 적은 도입부는 사실 별 의미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연히 전체적 그림을 위해 아주 중요한 밑바닥 블럭들이긴 합니다만, 결국 마지막에 드러나는 이야기는 저거랑 되게 다르다는 얘기죠.
이렇게 되는 것은 이야기의 구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전체 세 토막으로 나뉘어진 이야기이고 모두가 같은 시간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반복하는 식이며 토막이 바뀔 때마다 똑같은 사건을 다른 인물의 시점으로 보여줍니다. 뭔가 그 미나토 가나에 원작 '고백'과 비슷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렇게 독창적인 구성은 아니고 관건은 이걸 얼마나 잘 만들어 놓았냐인데... 뭐 깐느에서 각본상까지 수상한 각본을 제가 뭐라고 비평을 하겠습니까... ㅋㅋㅋ
...라고 적으니 뭔가 비꼬는 것 같은 느낌인데요. 비꼴 생각 까진 없지만 사실 좀 맘에 안 드는 구석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확실히 잘 쓴 각본이기는 해요. 이렇게 시점 바꿔가며 반복하는 구성의 특징을 최대한으로 잘 활용했죠. 앞부분에서 나왔던 장면에 2회차에선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든가. 별 의미 없이 스쳐 지나가는 대사나 표정, 심지어 생활 소음 같은 것을 다음 반복에선 아주 중요하고 인상적인 순간으로 바꾸어 보여준다든가. 또 이런 반전(?)들이 그냥 재미로 소모되는 게 아니라 작품의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되기도 하구요. 이렇게 기술적으로 정말 잘 쓴 각본이라 생각하는데 그게...
(근데 애초에 구성이 그렇다 보니 초반 전개를 볼 때부터 이미 '아 이건 사실 뭐뭐겠군...'이라고 짐작해버리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ㅋㅋ)
- 옛날 옛적에 듀나님께서 '번지 점프를 하다' 관련 글(리뷰는 아닙니다. 어느 글인지는 기억이...)에서 그런 얘길 한 적이 있거든요. 아니 이게 어인 민폐냐. 로맨스 주인공놈들이 지들끼리만 삘 꽂혀서 주변에 끼치는 민폐 생각 안 하는 건 옳지 아니하다. 뭐 대충 이런... 근데 이 영화의 이야기가 제겐 비슷한 케이스로 보였습니다.
당연히 스포일러라서 말을 못 하겠는데요.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딱 그 생각이 들어요. 아니 이게 이렇게 끝나 버려도 되는 이야기 맞나. 캐릭터 A씨의 남은 인생은 어찌되는데. 그리고 B는? 갸는 그냥 저걸로 끝임?? 저걸로 다 괜찮은 거임??? ...이런 거요. ㅋㅋㅋ
그러니까 대충 모두가 가해자이고 모두가 피해자... 라는 식의 이야기인 것인데요. 시점을 바꿔가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그걸 재미나게 잘 풀어내긴 했지만 그렇게 이쪽 저쪽 입장을 다 봐 버린 덕에 결말에서 뭔가 밸런스가 안 맞는단 생각이 드는 겁니다. ㅋㅋㅋ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큰 벌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너무 하찮게 그냥 넘어가 버리구요. 결과적으로 꽤 큰 찝찝함이 남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찝찝함까지 모두가 의도적인 것은 아닌 것 같은 거죠. 그냥 주인공들(?) 이야기에 몰빵하면서 주변부 정리를 살짝 대충 해버린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에선 국민 배우급 인지도를 가진 분이시라지만 저는 모릅니다!!! 우하하.)
- 어쨌거나 재밌게 잘 만든 영화입니다. 2시간 넘는 런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잘 흘러가구요.
또 이렇게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구성을 택한 게 이유가 있습니다. 마지막에 관객들에게 던져주는 메시지 같은 걸 강화하는 거죠. 가만히 생각해보면 니들도 이런 부분 별 신경 안 쓰고 살고 있지 않니. 그게 다 누군가에게는... 이런 걸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한 영화였네요.
애부터 어른까지 배우들 모두 잘 어울리게 캐스팅 되어서 좋은 연기 보여주고 미장센도 아름답고 음악도 좋고 다 좋습니다. 특히나 최종 단계에서 드러나는 진실들을 보며 주인공들의 애잔한 스토리에 이입할 수 있는 분들에겐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만한 장면이 맨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어요. 이 정도면 호평 받고 사랑 받을만한 수작의 조건은 다 갖췄다 할 수 있겠는데요. 어찌보면 지엽적이라고 할 수 있는 주변 디테일 몇 개가 못내 마음에 안 들어 버린 저는 뭐... 잘 봤지만 그렇게 극찬을 하고픈 맘은 안 드네요. 정도의 소감으로 마무리합니다. ㅋㅋ
+ 올레티비 vod로 봤습니다. 이 놈의 비싼 영화 요금제는 이제 그만둬 버릴까? 할 때마다 뭐 하나씩 궁금했던 작품들을 물어다 줘서 끊지를 못하게 하네요. 흠.
++ 근데 사실 영화 홍보용 사진들을 보면 이렇게까지 스포일러에 엄격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죠. 결국엔 어떤 이야기로 흘러갈지 빤히 보이는지라... ㅋㅋ 하지만 제가 정말 아무 정보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봤기 때문에 그냥 유난 좀 떨어 봅니다.
+++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다 보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것도 학교 영화였네요. ㅋㅋ 그냥 우연의 일치입니다.
++++ 찜찜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나면 이렇게
배우들끼리 찍은 사진 같은 걸 찾아보면 기부니가 좀 편안해집니다. 그냥 제 버릇... ㅋㅋㅋ
2024.06.17 10:12
2024.06.17 22:28
맞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세상을 떠났죠. 뒤늦게 명복을 빌구요.
영화가 착하기로 작정을 할 거면 아주 제대로 착하든가... 뭔가 밸런스가 좀 안 맞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어요. ㅋㅋ
그래도 무척 잘 만든 영화라는 것엔 동의할 수밖에 없겠구요.
아역들 둘은 개인적으론 너무 대놓고 예쁘게 생겨서 좀 난감했습니다. ㅋㅋㅋ 역시 예쁘지 않은 건 용납하지 않는 것이 저쪽 나라의 정체성이란 말인가! 라는 생각을 잠깐 했네요.
2024.06.17 17:00
잘읽었어요. 감사합니다. 어제 자기 전에 글을 두번 썼는데 '다운' 되서요ㅠ.ㅠ 경험이 있으시겠지만 기억을 더듬어 쓰느냐 아예 새로 쓰느냐 이러고있어요.
좋아하는 감독에 큰 상도 받아서 기대를 가지고 보러갔었는데 마음이 많이 불편하더라고요. 특히 호리 선생님 나쁜 족으로 몰아가는거 같은거요.
언젠가부터 그만저만한 작품 대신 끌리는 영화를 N차 관람하는데 이건 안보았어요. 저는 아주 옛날에 '국민'학교를 다녔는데요.
지금 현재나, 영화 속의 일들은 못겪었어요. 그때가 행복했던거 같기도해요.
2024.06.17 22:30
그 심정 매우 잘 압니다!! ㅠㅜ 그래서 틈틈이 임시 저장을 생활화 하여 극복하고는 있는데... 그래도 종종 까먹고 낭패를 보곤 하죠.
네. 저도 정확하게 말씀하신 그 부분이 불편해서 마지막에 큰 감동은 받지 못했어요. 많이 아쉬운 부분이었구요.
저도 국민학생 시절에 저런 일을 겪진 않았지만, 그땐 잘 몰랐던 걸 수년 후에 돌이켜 보고 '아 그게 괴롭힘이었구나'라고 깨달았던 일 같은 건 몇 번 있었습니다. 제 멘탈 건강엔 다행히도 제가 가담하진 않았지만, 말릴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
하긴 캐릭터 A씨는 정말 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진짜 대인배다, 무엇보다 앞으로 커리어가 어떻게 되나, 뭘로 먹고사나 이런 찝찝한 뒷맛이 남는 게 좀 그랬어요. ㅋㅋ
지적하신 그런 부분들을 제외하면 어쨌든 스토리, 촬영, 연기, 음악 등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웰메이드고 특히 주제면에서 묵직하게 한 방을 날리는 작품이었죠. 비슷비슷한 소재에 안주하는 것 같다가도 또 이렇게 한발짝 진화하고 나아가는 역시 위대한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인배우들도 다 훌륭했지만 특히 두 주인공 아역들이 너무 이쁘고 귀여워서 보기 좋았고 그래서 계속 조마조마하게 보게되는 면도 있었어요.
엔딩씬이 정말 미소짓게 만들면서도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데 음악이 크게 한 몫을 했죠. 사카모토 류이치상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