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호 아니고, 그냥 '철인'

2024.07.12 18:26

돌도끼 조회 수:184

1972년 정창화 감독 작품.

정창화 감독은 홍콩에 합작영화 관계로 갔다가 쇼부라다스 사람들과 안면을 트게 되었다고 하고 몇년 뒤에는 쇼부라다스와 계약해 홍콩영화를 만들게 됩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홍콩영화는 아시아지역에서 선두에 있지는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쇼부라다스는 상품의 질을 높이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재능을 초청해다 자기네 영화에 이식하는데 열심이었죠. 당시 쇼부라다스 소속 감독들에게도 외국영화를 부지런히 보고 배울 것을 주문했다고 합니다. 그 외국영화에는 물론 한국영화도 포함되죠. 그러니까 홍콩 영화에 없는 새로운 감각을 이식해주길 바라고 초청 받아 간 거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홍콩에서 몇편의 영화를 만든 후 정감독은 가장 홍콩적인 장르, 홍콩에서 창조 혹은 재정의했다고 할수있는, 쿵후영화에 도전합니다. 이소룡이 등장한 후 홍콩 영화계는 쿵후영화 위주로 재편되었고, 홍콩에서 계속 활동하려면 쿵후영화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죠(또는... 당시 쇼부라다스는 소속 감독들에게 거의 의무적으로 한편정도는 쿵후영화를 만들게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정창화 감독의 첫 쿵후영화 [천하제일권]은 그렇게 대단한 스타가 나오지도 않고(주인공인 나열은 한때 장철이 열심히 푸시하던 사람이지만 주연급에서 밀려나고 악역을 하던 처지...) 그닥 대작도 아닌 소품입니다. 박스오피스에서도 중박 정도 쳤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사람한테 믿고 쿵후영화 연출을 맡겨도 되겠다는 시험은 통과한 셈이라 이후로 정감독님은 계속해서 쿵후영화를 만들게됩니다.

한국에서는 신상옥 프로덕션이 [천하제일권]을 몰래 수입해서는 한국어로 더빙하고 합작영화로 둔갑시켜 그해 연말에 [철인]이란 제목으로 개봉합니다. 한국에서도 대략 중박 정도 친것 같고, 평단에서는 아주 대차게 까였다고 합니다. 뭐 원래 한국에서 쿵후영화는 대중들에게 인기를 끈 것과는 별개로 평론가들은 아예 취급도 안해줬으니까...


그렇게 한국과 홍콩에서는 그시기에 무수하게 나왔던 쿵후영화들 중 하나... 정도로 소수 매니아들이나 기억하는 작품이 되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렇지만 이 영화는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클래식이 되었죠.


그시기 홍콩은 광동어, 북경어, 영어라는 세가지 언어가 공존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모든 영화에 중국어/영어 자막을 집어넣는다는 정책을 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본적으로 영어자막을 깔고 있었으니 중국어를 모르는 외국 관객들도 일단 보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미국에서도 차이나타운 중심으로 소규모로 상영되는 홍콩산 무술영화를 보는 사람이 생기고, 소문이 나게되면 영화업자들도 관심을 갖게 되어, 그럼 이게 혹시 일반관객에게도 먹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업자도 나오게 되겠죠.

당시 미국을 휘감았던 블랙스플레이테이션 열풍과의 연관성을 찾는 의견도 있는 것 같아요. 흑인관객들이 쿵후영화를 보러 차이나타운을 찾았더라는 거죠. 블랙스플레이테이션과 쿵후영화(사실 쿵후플레이테이션이죠)는 공통점이 꽤 있기도 하고, 예로부터 미국에서 쿵후영화 팬덤의 중심세력이 흑인들이기도 하고...


뭐 어쨌든... 미국 영화업자-워너부라다스가 테스트 삼아 한번 풀어보자 해서 들여온 영화가 [철인]이었습니다.
홍콩과 한국에서는 그렇게 대박나지는 않았던 이 영화를 미국사람들이 찜한 이유가 있겠죠.

나름 짐작해 보자면... 우선은 외국인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거. 그니까 중국인들끼리만 알아먹을 감성같은 건 (많이는) 없을 거라는 거...

그리고 사전지식이 많이 필요하지 않는 영화라는 거.
무협이 바탕이되는 영화를 보려면 무림이라는 세계의 생리를 알아야하고 [정무문]을 이해하려면 아시아쪽 근현대사를 알아야하는데...(그걸 모르고 [정무문]이 부당하게 일본을 비하하는 영화니 어쩌니 하고 짖어대는 양덕도 있습니다) 그런 거 깊게 알 필요도 없고, [철인]은 무술대회 우승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치고받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나름 중요한데, 미국인들에게 쿵후-맨손무술이란건 '무술대회에서나 볼수 있는거'였거든요. 사람들이 좋은 총을 놔두고 맨손으로 치고받을 일이 없잖아요. 더군다나 미국에서. 그러니 사람들이 맨손으로만 싸우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만들려면 뭔가 그래야만 하는 구실이 필요한데 무술대회가 개입되면 바로 납득할 수 있게되죠.(이후로도 미국산 무술물은 계속 무술대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탈컴뱃'같이 우주의 운명을 무술대회로 결정한다는 억지도...ㅎㅎ)

글구, 정감독님의 연출이 동시기의 다른 홍콩무술영화 보다는 좀 더 세련되고 모던한 면도 있었다고 하니까 그것도 이유가 되었겠죠. 사실 무술액션이란 측면만 보면 이 영화는 (주인공 나열의 무술실력도 별로고) 그렇게 대단한 볼거리는 없습니다. 그런걸 영화적 기교로 커버한 면이 있죠.

[철인]은 영어더빙을 거쳐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라는 제목으로 개명되어 73년 봄에 미국에 공개됩니다. 개봉과 동시에 한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먹었죠.(동시기에 미국에선 [대부]가 상영중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선 '[대부]를 제치고 1위'라고 표현해 국뽕도를 좀 더 업하기도 하죠. [대부]는 개봉한지 1년 지난 영화였다는 말은 빼고...)

홍콩영화가 미국 박스오피스 1위라니... 대형사고도 이런 대형사고가 없죠. 외신을 타고 이 소식이 한국에도 전해지자 언론에서 들썩였다고 합니다.
'홍콩도 저러는데 우리 영화는 뭐하나!'...하고... 당시 한국 사람들이 홍콩 영화를 우리보다 더 수준높다고 생각하던 시절은 아니었던것 같으니 상당히 심기가 불편했겠죠.
좀 더 자세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 홍콩영화를 감독한 사람이 한국사람이라는 것도 알려집니다. 그제서야 국뽕에 차오른 감격의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데, 그때까지도 그 자랑스런 영화가 바로 몇달전 한국에도 개봉해서 대차게 까였던 그 [철인]하고 같은 영화라는 사실은 몰랐다는 것 같아요. 알아도 모른척 했거나...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 예상치도 못한 초대박을 내자 워너는 안심하고 자신들이 직접 만든 쿵후영화, [용쟁호투]를 여름에 개봉시킵니다.([용쟁호투]도 무술대회를 둘러싼 이야기ㅎㅎ)
그니까, [철인] 또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이소룡이 세계인에게 알려지게되는 바람잡이 역할을 한 영화가 됩니다. 글구 미국인들에게 처음으로 쿵후영화란 걸 알린 작품이죠.


아시아쪽에서 쿵후영화는 오랜 시간 동안 이런저런게 차츰 쌓여서 형성된 거지만 그런 과정 없이 갑자기 이런 영화를 보게되면 당황스럽겠죠. 생전 처음 보는 영화일테니까.

[죽음...]이 개봉되었을때만 해도 미국 관객들이 영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아니 뭐 사람 손에서 빨갛게 빛이 나고 손으로 치니까 상대방이 펑하고 날아가서 벽에 박히는 그런 영화인데, 진지하게 볼 수 있을리가... ㅎㅎ 그렇지만 슈퍼히어로물이 인기를 끄는 동네에서 그런 말이 안되는 장면이 나온다고 해서 크게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았을 거 같아요. 거기다 엑조틱한 동양이 배경인 이야기이고 하니까...
맨손인 사람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걸 본다는 쾌감은 슈퍼맨 만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걸 겁니다. 이성적으로 말이 안된다고 해도 매력적이죠. 사람들은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영웅 이야기에 끌리니까요. 무협/쿵후영화는 아시아의 슈퍼히어로물이고.
거기다 슈퍼맨에 비하면 [죽음...]같은 쿵후영화는 다큐급으로 사실적이지 않갰습니까ㅎㅎ(거기에 곧 이소룡이 진짜로 사실적인(것처럼 보이는) 영화를 들이밀었고요)

어떻게 받아들였 건 간에 흥행성적이란 객관적 성공지표가 있고, 미국 쿵후영화팬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모든 것의 시작에 있는 영화입니다. 이미 영화의 단점같은 걸 따지고 깎아내릴 그런 영역을 벗어난 역사 그 자체죠. 그래서 전 물 건너에서의 이 영화에 대한 평가에는 버프가 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어쨌거나 그런 영화를 한국사람이 만들었다는 국뽕심 정도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ㅎㅎ






-한국에서 70년대 후반에 나열을 초청해서 만든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라는 제목의 쿵후영화가 있고, 홍금보 영화 [찬선생과 조전화]의 한국개봉제목이 [천하제일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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