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6 00:05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악마의 씨>가 남편에게 (강간당해서) 원치 않게 임신한 아내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 오컬트를 빼버리면 남는 것은 아내가 자신의 임신 사실에 점점 괴로워하고 그 아이가 너무 끔찍하게 보이지만 어쩔 수 없이 포용하게 되는 이야기잖아요. 악마라든가 악마의 추종자라는 것들은 자신의 임신을 축복하고 출산을 종용하는 주변인들에 대한 내면의 증오를 투사한 결과물일수 있을 것이고요. 이를테면 미아 패로우의 악몽 속에서 간간히 지나가는 그 끔찍한 털복숭이의 장면들은 하기 싫은 성관계를 억지로 당한 당시의 고통을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극 중에서 남편도 대충 그런 말을 하긴 하죠. 동의 없이 해서 미안하다는 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악마의 씨>처럼 명확하게 오컬트 집단의 존재를 밝혀버리면 모호한 열린 결말에서 관객이 해석하는 재미는 사라지지만, 그럼에도 이것을 미아 패로우의 의식 속 투쟁이라고 해석할 여지는 있습니다. 이를테면 마침내 사교도 집단의 실체를 집 벽장에서 발견하는 씬이 그렇습니다. 그 때부터 미아 패로우는 아무 것도 없는 벽장 속에서 너무나 완벽한 환상을 혼자 보는 것입니다. 이게 정답이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렇게 가정을 한번 해보자는 것입니다. 남편부터 주위의 모든 사람이 다 악마 숭배 집단입니다. 즉 미아 패로우를 아들 출산의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완벽한 선의와 친절에 자신의 독립적인 선택을 계속 방해받으면서 미아 패로우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게 아닐까요? 이 사람들이 나를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이렇게 악마숭배집단 같은 짓을 나한테 할 수가 있을까...
초자연적인 존재는 늘 인간의 현실적인 고통과 외로움을 증명하는 수단이 아닐까요. 모든 귀신은 어둠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공포의 산물입니다. 아이를 낳게 된 여자가 사교도들에게 철저히 통제당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자의 임신과 출산은 그 어떤 보살핌을 받아도 한 주체로서의 여자가 수단으로 완전히 전락하는 과정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자유가 건강한 아이의 출산을 위해 통제됩니다. 불필요할 정도로 한 여성의 사생활에 타인들이 침범하고 여자의 선택권은 자주 묵살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의 악마란, 자식을 위해 죽을 때까지 헌신해야하는 가부장제의 사슬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원치않는 성관계와 출산이 악마보다 못하다고 과연 말 할 수 있을까요.
2020.09.16 08:37
2020.09.16 09:58
바바둑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로즈마리 쪽은 임신에 대한 공포에 더 가까운 거 같습니다. 바바둑이 양육에 대한 공포였다면요
2020.09.16 11:56
충분히 이런 텍스트로 읽을 수 있죠.
2020.09.16 13:11
2020.09.16 15:06
Repulsion도 보세요. 폴란스키는 아름답지만 무력한 여자가 고통당하는 것을 즐겨 묘사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테스>도 그랬죠.
2020.09.16 20:21
글쎼요. 그런 혐의도 씌울 순 있겠지만 이 사람 작품에서 크게 느끼진 못했습니다. <테스>도 엄청 비참하고 끔찍하잖아요.
2020.09.18 14:13
저도 '원치 않는' 임신 뿐만이 아니라 임신과 출산이라는 과정 자체가 착취적임을 말하는 영화로 보였어요. 악마의 씨를 임신해서가 아니라 모든 임신과 출산은 영화에서처럼 내내 고통스럽고 비본래적이며, 남편과 사악한 주변인들은 가스라이팅을 해대고 여성을 숙주로 전락시키죠.(오지랖 넓은 '늙은' 참견쟁이 이웃들은 '시댁 식구'의 은유라고 생각합니다-_-;;) 그리고 폴란스키는 아름다운 여자가 무력하게 고통당하는 것을 묘사하고 싶었을 뿐이라는 말도 동의하고..그러나 결과적으로 본의아니게ㅋㅋ 페미니즘적인 텍스트가 되었다고요.
2020.09.18 15:09
한국에서는 저게 시집살이로 해석될 수도 있겠군요 ㅋㅋ
워낙에 오래전부터 여성 착취나 여성 혐오에 대한 텍스트로 해석하는 평론들이 많은 영화이긴 했죠. 또 그럴싸하게 어울리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