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연애 경험이라고는 사소한 것도 없이 폭주 기관차처럼 서른 살까지 달려온 친구이기에 이 길로 쭉 만렙 찍는 걸로 우린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 A가 덜컥 여자친구 생겼다고 선포하여 저희 친구계는 경악을 금치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딱 2주 되는 주말에 생긴 일입니다.

 

그 친구가 불러서 조금 거창하게 청소 하고, 술 한 잔 하고 그 집에서 잤습니다. 일어났더니 부지런히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더라고요. 여자친구와 대학로로 공연을 보러 나간다고 합니다. 부럽다 야. 저도 그 친구 시간에 맞춰 함께 집에서 나왔죠.

그렇게 집 앞에서 헤어졌는데, 가만 보니 제가 핸드폰 배터리가 나갔더군요. 충전은 하고 나와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집에 돌아갔습니다. 저도 열쇠 있거든요.

핸드폰 충전하면서 밖을 내다보는데, 어라?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열어봤더니 이불 빨래입니다. 가스불은 끄고 나가는 걸 잊을 수 있죠. 그런데 세탁기는 다르잖아요. 약속시간 빤히 있는데 그냥 세탁기를 돌렸다? 왜? 그냥 뒀다가 밤에 와서 빼려고? 이불을? 그 친구 성격 아닌데......... 어?

 

불안한 예감으로 A의 룸메이트인 B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오늘 몇 시에 들어오냐"

"출장가서 오늘 밤 늦게나 와"

"A도 알지? 그거 예정됐던 거고?"

"A한테는 며칠 전에 말했지."

 

A가 나갈 때 복장을 떠올려 봤습니다. 가방도 안 들고 멀리 나갈 복장이 아니었구나. 책상을 보니 MP3도 그대로. 어제 대청소도 그렇고. 등줄이에 땀이 흐릅니다. 

마중 나간거구나.......

 

사람 있던 흔적을 황급히 지우고 나서려는데, 덜컹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으악, 친구 여자친구가 미친듯이 민망해하는 걸 내 눈으로 보는구나 하고 얼어붙었죠. 귤봉지를 안고 들어오던 A도 저를 보고는 깜짝 놀랍니다.

한 3초 침묵. 제가 먼저 입을 엽니다.

"여자친구는?"

"그냥 마을버스 탔다고 해서 정류장에서 보려고"

"이 새끼 여자친구 오면 온다고 할 것이지"

"알았으면 빨리 나가라 다왔다고 문자왔다 방금"

 

친구가 주는 귤 몇 개를 주머니에 쑤셔넣으며 정거장 반대쪽으로 뛰었습니다. 무슨 불륜이라도 저지르다 달아나는 기분이었어요. 

모태 솔로 여러분, 늦었다고 계속 늦는 건 아니더군요. 힘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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