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7 11:04
듀나게시판이니 서양 명작을 인용하며 글을 시작해봅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결말에는 작은 반전이 하나 숨어있죠. 그것은 지킬 박사가 하이드로 변모할 때 쓰는 약의 제조법은 그 자체로 불완전했고 본인도 몰랐던 불순물이 섞여있었기 때문에 약효가 발휘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실패나 오류가 포함되어야 비로서 저희가 원하는 것들을 얻게 된다는 사실은 인간이 얼마나 작고 하찮은 존재인지를 알려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예전에 저희 어머니는 제빵에 꽂힌 적이 있습니다. 그 덕에 정말 많은 빵과 쿠키들을 먹어야했죠. 그 결과물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준수한 수준이었지만 저는 오히려 "파는 거랑 맛이 다르지 않은데?" 라며 별 생각없이 먹었습니다. 그렇게 성공작들을 연이어 출시하던 중 어머니는 카스테라를 만드는데 실패를 하게 됩니다. 제가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어머니가 베렸다 베렸어 하면서 투덜거리시더군요. 포근포근하고 부드러운 카스테라가 나와야 하는데 약간 젤리처럼 투명하고 매끈한 뭉탱이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더 좋았습니다. 엄마의 슬픔과 무관하게 저는 아주 환장을 하면서 먹었죠. 그래서 이후로도 실패한 레시피를 엄마에게 요구했습니다. 그 때 그 젤리를 해주라고 말이죠. 저희 어머니는 별나다면서 그 레시피를 해줬습니다. 사먹을 수도 없으니 아주 귀한 음식이었죠.
요즘은 이상하게 휘낭시에에 꽂혀서 종종 사먹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휘낭시에의 가격은 참 사악하죠. 그 작은 덩어리가 2500원, 3000원 이러니까요. 그러던 중 어느 까페에서 싸게 파는 휘낭시에를 발견하고 신나게 사먹었습니다. 사실 휘낭시에 자체의 퀄리티로 치면 저렴한 게 티가 나는 상품입니다. 다른 제과점의 상품들보다 조금 더 기름에 절어있고 버터의 풍미보다 설탕맛이 더 진하기도 하구요. 약간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도넛같은? 그런데... 전 이 휘낭시에가 더 좋습니다. 다른 데서 휘낭시에를 사먹어보니 더 비교가 됩니다. 아마 누가 저에게 휘낭시에를 사다준다면 무척 고맙겠지만 그래도 전 그 저렴한 버젼의 휘낭시에가 더 좋을 것 같아요 ㅋ
모든 것이 다 고급과 저급, 성공작과 실패작으로 나뉘는 건 또 아니지 않겠습니까? 아마 제 미뢰는 B급에 영원히 머무르고 말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정통 파스타보다 피자집에서 파는 파스타를 더 좋아한다는 분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독일 소세지보다 분홍 소세지를 더 좋아하기도 할 것입니다. 어쨌든 세상의 수많은 미식과 불량식품 사이에서 합의점만 찾아낼 수 있다면 그걸로 또 장땡이겠죠...?
2023.11.17 11:22
2023.11.17 13:14
전 냉면은 안먹지만 그 마음이 어떤 건진 알것 같습니다 ㅋㅋㅋ
2023.11.17 14:41
전 떡볶이 원리주의자라서 치즈와 마라가 판치는 작금의 세태를 틈만나면 규탄하고 있지요. ㅎㅎ 복잡한 맛도 좋지만 어떤 음식들은 그냥 단순하고 익숙한 것이 더 맛있게 느껴져요.
2023.11.17 15:29
아니!! 듣기만 해도 사도의 향이 물씬 나는 재료들입니다 ㅋㅋ 비겁한!!
돌고 돌아 순정으로 회귀할 것을 저는 믿고 있습니다 ㅎㅎ
2023.11.17 15:40
옛날에 갑자기 덜컥 생겨 버린 고구마 한 박스를 한참을 방치하다가 어떻게든 해결해 보려고 머리를 굴린 결과 '고구마칩을 만들어 애들을 먹이자!' 라는 생각에 고구마를 얇게 잘라서 오븐에 구웠는데요. 게을러서 대충 한 결과 수분이 남아 돌아서 본의 아닌 반건조 고구마 말랭이가 되어 버렸거든요. 근데 입 짧은 아들래미가 여기에 환장해서 이후로 몇 년을 고구마가 생길 때마다 반건조 말랭이를 만들곤 했습니다. 뭐가 됐든 잘 먹으면 뭐. ㅋㅋㅋ
좀 다른 얘기지만 카페 빵이나 케이크류는 늘 유행따라 흘러가는 것 같은데요. 그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게 휘낭시에였는데 이것도 한창 인기일 땐 디저트류가 거의 휘낭시에들로만 되어 있는 카페들도 있었죠. ㅋㅋ 이후로 이것저것 유행 타다가 얼마 전엔 약과 유행도 지났고... 근데 결국 먹다 보면 새로 유행하는 것들은 별로더라구요. 걍 기본 메뉴들이 좋습니다. 휘낭시에도 뭐 바르고 뿌리고 한 것들보다 기본 휘낭시에가 좋아요.
2023.11.17 15:58
아니!! ㅋㅋㅋㅋㅋㅋ 반건조 고구마 말랭이는 제 최애 음식입니다 아드님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군요 ㅋㅋㅋㅋ 실패작이지만 사실 성공작이었던 것!!
저도 휘낭시에는 기본이 제일 좋습니다 흑임자니 뭐니 장난질해놓는건 좀 ㅋㅋㅋ
2023.11.17 15:46
언제봐도 글 통찰력 있게 잘 쓰셔요. 저는 '압구정 문화센터'에서 '쿠키 앤 케이크' 수업을 일년 정도 들었어요. 수제 빼빼로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 나눠주느라고 혼난 기억이 있어요.
요새 'CGV 압구정점'에 영화보러갈 때 골목에 있는 '투썸'에서 식사를 해요. 보통은 어머니께 마카롱을 사다드리는데 휘낭시에 사다드려봤어요. 투썸은 모두 다섯 종류인거 같더라고요.
저는 '우주패스'가 있어서 30% 할인 받아요.
2023.11.17 16:00
헉 그 귀하다는 제빵수업듣는 분이시군요 ㅋㅋ 저희 어머니도 한동안 사람들 나눠드리고 그랬습니다 수제 빼빼로 맛있었겠네요
투썸의 휘낭시에는 아직 안먹어봤는데 언제 기회되면 저도 트라이해봐야겠습니다 ㅋ
2023.11.18 22:25
2023.11.19 13:19
ㅋㅋㅋㅋ 그렇습니다!! 하지만 줄여야할텐데요...
2023.11.19 12:29
실수와 실패는 창의의 발판!
저는 어릴 때 엄마가 해 준 실패작은 아니었으나 지금도 기억나는 특이한 음식 중에 사과 튀김이 있습니다. 한 달 요리학원에 다니며 집에서 해 보신 음식 중 하나였는데 다른 데서는 못 먹어 본 거였네요. 맛있었는데 어쩐지 제가 해 볼 생각은 안 듭니다...
2023.11.19 13:20
오옹?? 사과튀김이라니 신박한데요? 사과 겉에 그 튀김옷이 있는 건가요? 비쥬얼이 상상이 잘 안됩니다 ㅋ 정말 특이한데요?
2023.11.19 14:11
처음에 사과를 튀겨? 라고 이상했는데 먹어 보니 맛이 괜찮았던 기억입니다. 달콤하면서도 약간 향긋한 맛.
그런데 사실 신발끈도 튀김을 하면 맛있다란 말이 있으리만치(그런 말 있는 거 맞는지 갑지기 혼란??) 기름에 튀긴 음식은 맛의 승화가 일어나는 거 같아요.
2023.11.19 16:03
애플파이같은 맛이 나려나요...한번 먹어보고 싶어집니다 ㅋㅋ
전 냉면이 그래요. 유명한 곳에서 파는 한 그릇에 만 몇천원씩 하는 냉면보다 풀무원 같은 공장제 냉면이 더 맛있어요. 이건 잘못 만든 레시피라기 보다는 그냥 싸구려 입맛에 가깝겠지만...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