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임신기간

2011.10.25 05:40

미선나무 조회 수:3991

 

 

임신 초기를 간신히 넘겼습니다.

 

그간의 일은 말로 다할 수 없어요.

임신을 알자마자 매일이 지옥인 듯한 입덧에,

입덧의 다른 형태인 양 향수병까지 찾아와

남의 나라에 사는 주제에 남의 나라 것은 다 보기도 먹기도 싫었어요.

그게 가장 고통스러웠죠. 내가 숨쉬고 발붙이는 곳 자체를 몸에서 동물적으로 거부하는 느낌.

 

가뜩이나 전혀 마음으로부터 임신이 준비되지 않았던 상태였기에

그런저런 모든 것이 닥쳐오자 임신을 수도 없이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임신을 원망하는데, 아이에 대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었겠어요?

그 시기 아이와 저에게 가장 최적의 상태는 서로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뱃속아이에게 연민과 미안함이 들 때도 그랬겠네요. 미안하다. 왜 하필 이런 엄마를 만났니..정신이 좀 들면 그런 생각을 했어요.

 

게다가 지금 저와 남편의 다소 특수한 상황 때문에

임신으로 인해서 불가피하게 어떤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아직 벌어지지는 않은 일인데, 그 일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저의 불안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임신만 아니었으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기에, 임신을 원망하는 마음이 점점 커졌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서야 처음으로 초음파를 보았습니다.

초음파 보기 직전까지도 저는 아이의 존재를 백퍼센트 확신할 수 없었어요.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던 듯 싶습니다.

그러다가 초음파 모니터로 아이를 보았는데,

아이가 정말 튼튼하게 살아 있더라구요.

손가락 발가락이 한들거리는 것마저 보였어요.

미안하고 기특한 마음이 들더군요. 그렇게 엄마라는 사람이 못된 생각만 했는데,

별다르게 신경도 못 써줬는데, 진짜 넌 혼자서 건강하게 자란 셈이구나.

저는  기본적으로 술과 약물을 절대 피하는 것 이외에 다른 임산부들처럼

화장품도 골라서 바른다든가 하는 자잘한 금기 같은 건 크게 신경쓰지 않고 지냈거든요.

유난떨고 싶지 않았고, 저 자신부터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라벤더 화분을 키우는데(라벤더도 알고보니 임산부에게 좋지 않대요), 임신을 알고도 라벤더를 꾸준히 키웠어요.

뱃속아이에겐 '임신했다고 이제껏 키우던 생명을 덜컥 내버리는 건 라벤더가 임신에 좋지 않은 이상으로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 내세우면서...

 

 

 

남편도 그전까진 제 배를 들여다보며 "정말 거기 있긴 한거니?"라고 태담같지도 않은 태담을 할 정도로 임신을 실감하지 못했나 본데,

초음파를 보고 난 뒤로는 아이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 비슷한 게 생긴 듯 싶습니다.

저도 힘내서 이제부터는 좋은 생각만 하려고 했어요. 나쁜 생각은 거두고...

 

그런데 오늘 오랫만에 깨끗이 씻고(임신 초기에는 자주 씻지도 못해서 정말 봐줄 수가 없었어요, 그런 제 모습에 더 우울해졌죠)

장을 보러 가는데

드럭스토어에 기저귀를 뭉치로 쌓아놓고 파는 게 보였어요.

그걸 보는 순간 우울해졌습니다.

지금은 제가 돈을 벌지 못하는 상황이라 남편이 경제활동을 하고 일정량의 돈으로 살림을 꾸리는데,

신혼이라서 액수가 적기도 하고 여기 물가가 비싸기도 하지만 늘 빠듯해요. 저 자신을 위해서 쓰는 돈은 거의 없거든요. 말 그대로 가정을 위해서만 돈을 쓰는데

그럼에도 늘 빠듯했어요.

그런데 이제 아이가 태어나면 기저귀며 뭐며, 게다가 출산용품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검색하고 가격을 내 보면

정말 천문학적인 숫자가 나오더라구요.지금 저희 입장에선.

남편은 걱정하지 말라고,(아이와 저에게) 필요한 것은 다 해준다고 말은 하지만

막상 남자라서 그런지 세세하게 아이에게 뭐가 필요하며, 그게 얼마나 필요한 것이며, 얼마의 돈이 드는지를 모르는 것 같아요.

(그의 레퍼토리는 "우리 땐 그런 거 없이도 다 컸어!"입니다;;;저와 그는 같은 또래구요)

물론 임신하고 출산해서 육아하기에 돈이 넉넉지 않다는 건 그전부터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임신을 기피했던 한가지 큰 이유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막상 임신에서 출산으로 아주 조금씩이나마 가까워질수록

모든 게 점점 뚜렷해지고 실생활이 되네요.

아직도 생각납니다. 임신 초기 한참 곤욕스러울 때, 꼭 해야할 일이 있어 이곳 중심가에 나갔다가

장난감 가게를 보았는데,

가게 속 장난감들을 보면서 속으로 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나중에 우리 아이가 저거 사달라고 하면 뭐라고 해서 못 사준다고 달랠까'

'저것도 못 사주겠지'

 

물론 저도 유난스런 엄마가 되고 싶진 않습니다. 아니, 차라리 좀 모자라는 듯하게 갖춘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필요한 것만 갖추려고 하는데도 돈이 많이 드네요...

그런 생각을 하니 다시 또 우울해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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