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4 21:14
방 한 켠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업라이트 피아노를 이젠 팔아야 하나 생각 중입니다. 손 대지 않은지도 너무 오래 돼서 이젠 악기라기 보다는 가구화 되었거든요. 오랜만에 한 번씩 건반 뚜껑을 열어보면 소복하게 먼지가 앉아 있어서, 아마존에서 피아노 몸체의 2/3를 덮는 커버를 사서 푹 씌워놨어요. 어릴 땐 낮 시간이면 동네 여기저기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아파트에서도 낮에 치는 피아노 소리에 뭐라 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는 시간을 불문하고 항의를 받는 일이 생겨 아예 연주하지 않게 됐어요. 그러고 보니 요즘은 대체로 디지털 피아노를 구입하는 추세이고, 아이들이 예전에 비해 피아노 학원을 많이 다니지도 않는 것 같아요.
피아노를 팔고 나도 키보드나 디지털 피아노를 들일까.. 공간 문제로 하나만 선택해야 해요. 키보드는 아직 제게는 너무 신문물?의 느낌이고 기능도 가격도 천차만별어서, 뭘 사야 하고 그 기능은 언제 다 익힐 수 있을지 아득한 느낌부터 먼저 드네요. 지금까지는 감히? 피아노를 처분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의식하지 못했지만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나봐요. 그래도 디지털 피아노로 바꿔서, 질긴 스프링 같은 그 건반 느낌과 띵띵거리는 전자음의 거부감을 조금 참으면, 이제 이어폰 끼고 밤낮으로 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피아노를 보고 있으면 어릴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매장에 가서 피아노를 고르던 기억이 떠올라요. 제게 피아노를 사주셨던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 안 계세요. 보면대에 붙어있던 피아노 가격도 정확하게 생각이 나네요. 지금도 몇백만원은 적지 않은 돈이고 저희 집은 넉넉하지 않았었는데, 그 당시의 피아노 값은 아버지의 몇 달 치 월급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는 표현이 별로 없는 분이셨고 저는 그다지 착한 자식이 못 되어서, 주로 못되게 굴었던 기억만 많이 나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저 피아노는 영원히 처분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해요.
집값이 마구 오르는 뉴스를 보면서 웃기게도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앞으로 내가 내 피아노를 계속 가지고 살 수 있을까 하는 거였어요. 지금은 어머니 집에 얹혀 살고 있는데 머지 않아 독립한다면, 당장 집을 살 입장은 못 되니 흔히 그렇듯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녀야 할 건데, 그때마다 피아노를 가지고 다닐 수 있을까.. 공동주택에 살 가능성이 많으니 방음장치나 방음부스를 한다고 치면 어느 정도의 공간도 필요하고, 개별 냉난방까지는 못할 것 같고, 이사할 때는 또 그 망할 방음부스까지 이고 지고 다녀야 할텐데, 불가능할 것 같아요. 주택에 사는 게 오랜 로망이지만 혼자 주택에 사는 게 좀 자신이 없고, 요즘은 왠지 주택가에서도 시끄럽다고 옆집 아저씨나 뒷집 고3 어머니가 뛰어오실 것 같기도 해요. 가까운 연습실에 등록하거나 역시 디지털 피아노를 사는 게 현실적이겠죠. 자기 피아노를 갖는다는 건 생각보다 사치스러운 일이네요.
나무와 현의 공명과 열 손가락의 감각이 주는 힐링이 그리워서, 자그마한 우쿨렐레를 하나 샀어요. '방과후수업 세트'를 구입했더니 초급 교본이 딸려왔길래, 책 보고 이삼일 연습해본 결과 이제 기본적인 코드 몇 개와 동요 멜로디 정도를 연주할 수 있게 됐어요. 제일 작은 악기를 산 게 문제인지 품에 안은 느낌이 계속 불편해서, 조금 큰 악기로 바꾸는 게 맞을지 잘 모르겠네요. 손은 아직 잘 못하는데 머리로는 책 내용이 거의 숙지가 되어 그런가 더 연습할 기분이 안 나요. 새로운 악기를 너무 오랜만에 익혀봐서 이제 어떻게 연습할지 감도 별로 없네요. 교본의 노래와 코드를 다 외워볼까, 중급 책을 사야 하나, 좀 더 어려운 악곡을 하나 정해서 도전해볼까.. 어쨌든 이 작은 나무통을 울리는 나일론 줄의 소리가 기대 이상으로 아름답고, 악기를 꺼낼 때마다 나무 냄새가 나기도 해요. 줄을 튕기고 있자니 오랜만에 정신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2020.07.04 21:36
2020.07.05 21:03
20세기에 발명된 최고의 악기가 컴퓨터이듯 21세기의 악기는 스마트폰, 태블릿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기기의 발전으로 행복하기도 하고 뒤쳐질까봐 겁나기도 하고 그렇네요.
2020.07.04 22:45
저도 한 때 바이올린을 배워볼려고 그랬는데 결국 그 소음을 견디지 못한 가족들의 항의에 얼마 못가 중단해야 했죠. 그 바이올린 지금 냥이들 방 한 구석에서 먼지만 뒤집어 쓰고 있네요.
추억이 깃든 피아노라 간직하고 싶으실텐데 아파트라 다들 음악 소리에 민감한가 봅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저야 여지껏 주택에서만 살아온터라 그런 불편함을 전혀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이같은 공동주택의 애로사항을 들을 때 마다 참 낯설게 느껴집니다. 예전에 과외수업 다니다가 아파트 단지 사이에서 들려오는 피아노나 바이올린 소리 들으며 누군지 모르지만 저렇게 연주를 잘한다니 부럽구나 하던 기억도 떠오르는군요.
2020.07.05 21:07
한 집에서 오래 살다 보니, 피아노 소리 같은 게 동네에 비교적 흔하고 아무렇지 않던 시절도 있었던 것 같아서 격세지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2020.07.05 16:41
이거 제가 쓴 글인줄 알았어요. 전 업라이트 20년 가까이 이고 살고 있습니다 ㅜㅜ 이미 조율상태도 엉망이라 요새는 치지도 않아요. 이번에 이사오면서 디지털로 바꿀까 하다가 결국 못버렸네요. 저도 비슷한 사고의 과정을 거쳐서 우쿨렐레를 하나 장만해 연습중이에요. 아파트같은 공동주택에서는 우쿨렐레까지가 마음 편하게 칠수있는 한계인것 같아요. 그 영화 "그녀"에 나오는 "Moon Song" 연습해서 요새는 침대에 누워 불다끄고 달빛맞으면서 좀 흥얼대다가 잡니다. 기타 열화버전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름의 매력도 있고 생각보다 표현력도 좋더라고요. 다만 제 뚱뚱이 손가락이 여전히 말썽이네요. 기타배울때도 그러더니 ㅠㅠ 손가락 늘씬하게 길고 뾰족하신분들 너무 부럽습니다.
2020.07.05 22:36
2020.07.06 2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