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한 켠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업라이트 피아노를 이젠 팔아야 하나 생각 중입니다. 손 대지 않은지도 너무 오래 돼서 이젠 악기라기 보다는 가구화 되었거든요. 오랜만에 한 번씩 건반 뚜껑을 열어보면 소복하게 먼지가 앉아 있어서, 아마존에서 피아노 몸체의 2/3를 덮는 커버를 사서 푹 씌워놨어요. 어릴 땐 낮 시간이면 동네 여기저기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아파트에서도 낮에 치는 피아노 소리에 뭐라 하는 경우가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는 시간을 불문하고 항의를 받는 일이 생겨 아예 연주하지 않게 됐어요. 그러고 보니 요즘은 대체로 디지털 피아노를 구입하는 추세이고, 아이들이 예전에 비해 피아노 학원을 많이 다니지도 않는 것 같아요. 


피아노를 팔고 나도 키보드나 디지털 피아노를 들일까.. 공간 문제로 하나만 선택해야 해요. 키보드는 아직 제게는 너무 신문물?의 느낌이고 기능도 가격도 천차만별어서, 뭘 사야 하고 그 기능은 언제 다 익힐 수 있을지 아득한 느낌부터 먼저 드네요. 지금까지는 감히? 피아노를 처분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의식하지 못했지만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나봐요. 그래도 디지털 피아노로 바꿔서, 질긴 스프링 같은 그 건반 느낌과 띵띵거리는 전자음의 거부감을 조금 참으면, 이제 이어폰 끼고 밤낮으로 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피아노를 보고 있으면 어릴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매장에 가서 피아노를 고르던 기억이 떠올라요. 제게 피아노를 사주셨던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 안 계세요. 보면대에 붙어있던 피아노 가격도 정확하게 생각이 나네요. 지금도 몇백만원은 적지 않은 돈이고 저희 집은 넉넉하지 않았었는데, 그 당시의 피아노 값은 아버지의 몇 달 치 월급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는 표현이 별로 없는 분이셨고 저는 그다지 착한 자식이 못 되어서, 주로 못되게 굴었던 기억만 많이 나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저 피아노는 영원히 처분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해요. 


집값이 마구 오르는 뉴스를 보면서 웃기게도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앞으로 내가 내 피아노를 계속 가지고 살 수 있을까 하는 거였어요. 지금은 어머니 집에 얹혀 살고 있는데 머지 않아 독립한다면, 당장 집을 살 입장은 못 되니 흔히 그렇듯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녀야 할 건데, 그때마다 피아노를 가지고 다닐 수 있을까.. 공동주택에 살 가능성이 많으니 방음장치나 방음부스를 한다고 치면 어느 정도의 공간도 필요하고, 개별 냉난방까지는 못할 것 같고, 이사할 때는 또 그 망할 방음부스까지 이고 지고 다녀야 할텐데, 불가능할 것 같아요. 주택에 사는 게 오랜 로망이지만 혼자 주택에 사는 게 좀 자신이 없고, 요즘은 왠지 주택가에서도 시끄럽다고 옆집 아저씨나 뒷집 고3 어머니가 뛰어오실 것 같기도 해요. 가까운 연습실에 등록하거나 역시 디지털 피아노를 사는 게 현실적이겠죠. 자기 피아노를 갖는다는 건 생각보다 사치스러운 일이네요.  


나무와 현의 공명과 열 손가락의 감각이 주는 힐링이 그리워서, 자그마한 우쿨렐레를 하나 샀어요. '방과후수업 세트'를 구입했더니 초급 교본이 딸려왔길래, 책 보고 이삼일 연습해본 결과 이제 기본적인 코드 몇 개와 동요 멜로디 정도를 연주할 수 있게 됐어요. 제일 작은 악기를 산 게 문제인지 품에 안은 느낌이 계속 불편해서, 조금 큰 악기로 바꾸는 게 맞을지 잘 모르겠네요. 손은 아직 잘 못하는데 머리로는 책 내용이 거의 숙지가 되어 그런가 더 연습할 기분이 안 나요. 새로운 악기를 너무 오랜만에 익혀봐서 이제 어떻게 연습할지 감도 별로 없네요. 교본의 노래와 코드를 다 외워볼까, 중급 책을 사야 하나, 좀 더 어려운 악곡을 하나 정해서 도전해볼까.. 어쨌든 이 작은 나무통을 울리는 나일론 줄의 소리가 기대 이상으로 아름답고, 악기를 꺼낼 때마다 나무 냄새가 나기도 해요. 줄을 튕기고 있자니 오랜만에 정신이 편안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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