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중에서 특별한 감탄

2023.10.23 17:54

thoma 조회 수:227

에마뉘엘 카레르에게는 35년 알고 지냈으며 아들의 대부인 폴이란 친구가 있습니다. 

폴은 30년 전부터 카레르의 책 12권을 전담 출판한 편집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의 말미에 밝히기를 폴은 함께 간 멕시코의 도서전에서 카레르가 독수리 타법으로 글을 써왔다는 것을 2017년인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메일 보내는 것을 보고요. 편집자 폴은 경악하고 환각버섯 먹었을 때처럼(이렇게 쓰면 프랑스인들은 실감이 나나욤?) 미칠 듯이 웃게 됩니다. 저도 놀랐으니 30년 친구이자 편집자!!는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카레르는 '한 손가락으로, 스페이스 바를 두드리기 위해 왼손의 검지나 엄지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쭉 편 집게손가락 하나만을 가지고 타이핑한다'고 합니다. [요가]도 그렇지만, 와, 700페이지의 [왕국]을 집게손가락 하나로 쓰셨네요. 

폴은 1차 충격이 어느정도 진정되자 타이핑을 배우라고 권합니다.

 '자네는 이렇게 하면 얼마나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지 모르고 있어'

책을 쓰는 것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폴은 금방 이 논리를 포기하고 체념하는 듯하더니 잠시 후 또 얘길 꺼냅니다.

 '타이핑을 배운다면, 자넨 더 빨리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르게 쓰게 될 거야.'

술을 마시던 두 사람은 이에 열 손가락으로 쓰게 될 무언가는 한 손가락으로만 쓰는 것보다 열 배는 나은 게 되리라는 생각이 너무나 자명함을 느낍니다. 취중 사변을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속도의 논리를 무시하려던 기존의 생각조차 사실 신속함에도 관심 많이 생기네,로 기울고요.

그러면서 오스트리아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말을 옮겨가며 스스로에게 속도의 필요성을 강변합니다.  

'베른하르트는 말했다. 글을 쓰는 것은 조금도 복잡하지 않다고, 그저 고개를 기울여 그 안에 있는 것을 종이 위에 쏟아 내기만 하면 된다고. 좋다, 하지만 머리에서 떨어지는 것을 최대한으로 건지고 싶다면 재빨리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ㅋ 지금까지 오른손 집게손가락 하나에 직업적 명운을 걸고 있었다는 것이 기이할 따름이네요.

그리하여 4년 정도에 걸쳐 일어난 큰 덩어리 세 파트로 따로 있던 이야기들이 피나는? 타이핑 연습 후 작업이 됩니다. 열 손가락의 활약으로 서로 스며들고 잘리고 엮이는 후반 과정을 거쳐 애초의 계획과는 멀어진 책 한 권이 나오게 됩니다.

저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읽었습니다. 카레르의 다음 소설은 또 몇 년 기다려야 할까요.



참, 번역이 너무 좋습니다. 제가 번역에 대해 아는 건 없으나 그냥 느낌이 팍 옵니다.

책을 읽는데 남의 나라 말로 쓰였다는 것이 의식되지 않고 에마뉘엘 카레르의 문장으로만 느껴졌거든요.

옮긴이 임호경 님은 카레르의 이전 책도 세 권 번역했는데 좀 훌륭하신 듯.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9161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7842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8037
124679 [왓챠바낭] 숙제 삼아 본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잡담입니다 [17] 로이배티 2023.11.07 399
124678 귀를 기울이면 (1995) [2] catgotmy 2023.11.07 286
124677 에피소드 #62 [2] Lunagazer 2023.11.07 66
124676 프레임드 #606 [4] Lunagazer 2023.11.07 76
124675 1980년대 최고의 공포영화 20편 [4] ND 2023.11.07 452
124674 어그로의 트롤링이 먹히지않는 게시판 [4] ND 2023.11.07 495
124673 6시 반 KS 1차전이군요 [5] daviddain 2023.11.07 138
124672 내 머리 속의 지우개 (2004) catgotmy 2023.11.07 116
124671 플라워 킬링 문 - 아카데미 대상 예정? [3] 애니하우 2023.11.07 420
124670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4] 조성용 2023.11.07 468
124669 (사무실에서 놀면서 써보는) 요즘 일상입니다 [10] 쏘맥 2023.11.07 283
124668 [왓챠바낭] 보는 김에 몰아서 본 '캐리' 잡담입니다 [9] 로이배티 2023.11.06 381
124667 혼례대첩 [1] 잡채밥 2023.11.06 312
124666 가을비, 한신 타이거즈, 다시 뉴스레터 상수 2023.11.06 130
124665 미역 [9] thoma 2023.11.06 248
124664 프레임드 #605 [6] Lunagazer 2023.11.06 77
124663 김혜수가 마지막으로 진행하는 2023 청룡영화상 후보 [8] 상수 2023.11.06 544
124662 양파 [15] thoma 2023.11.06 343
124661 [왓챠바낭] 변태 감독님이 막 만든 영화 하나 더, '카인의 두 얼굴' 잡담입니다 [6] 로이배티 2023.11.05 368
124660 케이팝 아이돌을 넘어서 인터넷이 만들어낸 상황극앞에서, 자기편의적 생각을 멋대로 합리화하는 인간의 원죄를 생각하다 상수 2023.11.05 29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