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입니다 를 읽고 - 2

2020.08.14 22:57

Sonny 조회 수:949

성폭력 피해자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김지은씨의 수기를 읽으며 비로서 저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괴롭고 힘들게, 라는 수식어는 너무 당연한 전제여서 굳이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파장이 하루하루 어떻게 일상에서 퍼져나가는지 사실적인 묘사들을 접하고서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고통은 실증적이고 신체적입니다. 정신적인 통증은 육체와 생활로 침투합니다.

김지은씨는 방송에서 미투 고발을 한 뒤 집을 잃어버립니다. 일단 거주하던 곳이 충남 도청 직원들이 밀집해있는 곳이라 돌아갈 수가 없었고 취재진들에게 둘러쌓여서 가족들까지도 자기들 집에서 엄청난 고통을 당했으니까요. 김지은씨는 방송 후 성폭력 피해자들이 머무는 보호시설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저에게는 이 사실이 아주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경제적 곤궁을 겪은 것도 아닌데 한 성인이 난데없이 잘 데가 없어지고 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성폭력 피해자의 일상은 난민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김지은씨는 보호시설에서 규칙에 따라 살다가 계속되는 언론과 인타넷의 폭격에 정신이 초토화되어 나중에는 자해까지 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자신의 집에도 숨을 수 없고 사회 바깥의 외딴 보호소까지 피난을 가야한다는 현실을 체감하게 되더군요. 성폭력은 한 인간의 일상을 송두리째 황폐하게 만드는 현상이었습니다.

그 뒤 김지은씨는 자신이 겪은 고소 정황을 시간순에 따라 차근차근 기록합니다. 사건이 어떻게 진행이 되어야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그 객관적인 기록은 건조한 시간 배열에 짓눌리는 기분이 들 정도였는다. 김지은씨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구구절절하게 감정을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언론플레이라 일컬어질만한 대중 상대의 연설을 하지 않습니다. 최초 인터뷰 이후에는 검찰 수사에 집중했고 철저히 숨어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법부는 안희정을 불구속기소했고 조사과정은 지난했습니다. 조사 또 조사 또 조사. 성폭력 수사는 피해자가 너무나 바쁘고 시달릴 게 많은 일이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그 모든 고소과정의 자료를 조사하고 준비하고 인터뷰를 계속 다듬어야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김지은씨는 계속 일을 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로서의 일을 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결코 쉬지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도 안희정 측의 음해공작은 계속되었습니다. 이것은 안희정 측의 가해일뿐 아니라 안희정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가해이기도 했습니다. 같이 일하던 동료에게 대놓고 정보를 "취합"하겠다며 김지은씨의 안좋은 정보만 알려달라고 구자준씨를 포섭하는 안희정 측(큰아들)의 뻔뻔함은 성폭력 사건의 전개가 얼마나 권력에 따라, 진실과 무관하게 일어나는지를 알게 합니다. 우리를 도와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 여자의 정보를 취합해서 넘기라는 이 말은 안희정의 성폭력 가해 고발이 안희정만의 두번째 선거전으로 돌입한 느낌마저 있었습니다.

그리고 책은 두번째 장 노동자 김지은으로 넘어갔습니다. 저에게는 이 구성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습니다. 어떤 여자가 성폭력을 당하면 가장 먼저 드러내야 하는 사실, 외부의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하는 그 사실은 그가 피해자라는 점일까요. 김지은씨는 이 장에서 자신의 어릴 적부터 인생을 회고합니다. 그러니까 성폭력 피해자의 인생은 태어났을때도 아니고 아주 기쁘거나 슬펐을 때도 아니고 성폭력 피해를 알린 시점이 인생의 원점이 되는 것처럼도 느껴졌습니다. 탄생이 모체의 안락한 환경에서 거친 바깥으로 나오는 고통스러운 순간이라면, 성폭력 고발은 피해자에게는 안전한줄 알았던 세계에서 빠져나와 위험하고 끔찍한 현실을 온전히 인지하는 일일까요. 그 강력한 분기점은 왜 여자에게만 존재해야하는 것일까요.

김지은씨는 책을 좋아하고 어쩌다 가난해진 집을 꾸리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이걸 자기가 얼마나 불쌍한지 알아달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이걸 읽으면서 저는 두 종류의 감상을 느꼈는데 일단 하나는 이미 충분히 불행한 여자의 삶에 성폭력이란 불행이 아무런 개연성 없이 더 얹힐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성폭력은 행복하고 자유롭던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 무엇이 아니라, 이미 지독하게 갉아먹히는 여자의 삶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무엇입니다. 또 다른 감상은 남자의 삶이었습니다. 성폭력 피해를 걱정하거나 복구하려는 노력은 대다수 남자에게 어지간해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근본적인 차이를 남자는 이해할 수 있을까요. 혹은 이 진실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요.

김지은씨는 이후 자신이 안희정 캠프에서 일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합니다. 거기서 그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계약직 근로자의 노동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쌩뚱맞은 이야기처럼 들리면서도 결국 성폭력이 인권의 문제라면 그 인권유린이 일어나기 쉬운 환경으로서의 맥락은 오로지 젠더뿐만 아니라 노동문제라는 맥락도 겹쳐집니다. 퇴사가 자유롭고 상사의 갑질에 저항할 수 있는 노동환경에서 성폭력이 이렇게 버젓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요. 남자들은 안희정이나 박원순을 비롯한 고위직들의 성폭력을 남자인 자신은 안당하는 남의 일이 아니라 그저 다른 형태로 벌어지는 서열의 폭력이자 남자를 공범 혹은 다른 갑질의 피해자로 만들 수 있는 잠재적 위협으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김지은씨는 자기가 얼마나 불쌍한지 이야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왜 상사의 성폭행에 반항할 수 없었는지 그 문제를 한국의 폐쇄적이고 위선적인 조직문화에서부터 진단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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