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롭지 않은 세계

2020.06.01 17:52

Sonny 조회 수:738

무섭고 파괴적인 사건들은 스크린에서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천재적이고 매혹적인 악당이 있고, 그 악당의 주도면밀한 계획 아래 세계는 부숴지거나 불탑니다. 그를 저지하기 위해 지혜롭고 선한 영웅이 분투합니다. 흔들리는 세계를 무대로 두 초인이 각자의 무기를 쓰며 어지롭고 사나운 싸움을 펼칩니다. 세계의 혼란은 잠시 중지되고, 악당을 쓰러트린 영웅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모두를 안심시킵니다. 세계는 다시 지켜졌고 치열하던 이야기는 숨을 고르며 끝에 도달합니다. 평화는 언제나처럼 잔잔하게 세계를 감싸고 흐를 것입니다.


이 정형화된 공식의 픽션에서 저는 안도감을 받곤 했습니다만 이제는 어쩐지 영화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습니다. 현실의 세계는 그냥 아프고, 힘들고, 지루하고, 끔찍하게만 흘러갑니다. 조지 플로이드 살인사건으로 다시 한번 도화선에 불이 붙은 blacklivematter 시위는 픽션의 그 어떤 재미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어떤 사람들은 경찰의 폭력에 내동댕이쳐집니다. 아무리 놀랍고 끔찍해도 감상자가 이입한 주인공이 박해를 당하는 걸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이들에게 승리가 보장되어있다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현실의 흑인들에게는 어떤 승리가 준비되어있을까요. 이들이 무엇을 거둔다 한들 죽은 사람은 살아돌아올 수 없고 죽은 이가 대표하는 흑인들의 차별받아온 역사는 보상받지 못합니다. 현실은 처음부터 새드엔딩으로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덜 비참하게 마무리를 짓는가, 그 뿐인 전개입니다.


누가 죽었다 해도 픽션에서는 죽은 자 외의 다른 자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혹은 누가 죽는 이야기라면 죽으면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그런데 미국의 인종 차별을 현실로 목격할 때 누구도 주인공이 아닙니다. 히어로이즘을 책임지고 실천할 어떤 초인도 없는 가운데 엑스트라들만이 계속 나부끼다가 짓밟히거나 끝끝내 나부낍니다. 반대로 모두가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주인공들은 그 어떤 능력도 지혜도 없고 그저 코로나가 기승인 이 상황에서 자살에 가까운 집합을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뭉친 이들을 향해 미국의 최고권력자인 대통령 트럼프가 선언을 합니다. 당신들은 테러 조직이고 공권력으로 응징하겠다고. 현실이라는 서사는 어떤 희망도 없어서 개미떼같은 주인공들은 계속해서 본인들의 덩어리를 야금야금 잃어가면서 전진합니다. 극적인 상황은 거의 없고 그저 울거나 소리치거나 그러면서 나아갈 뿐입니다. 


아주 짧은 장면들만이 가슴에 시커먼 멍자욱을 남깁니다. 경찰차가 시민들을 밀어버리거나, 백인 경찰들이 흑인을 집단구타하거나, 시위하던 흑인들이 울면서 이 아이는 시위에 참가하기엔 너무 어리니 집에 돌려보내야한다고 서로 싸우거나. 어떤 백인은 조커 분장을 하고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전혀 얼개가 없고 그저 찢어질것 같은 세상의 한 풍경들이 각기 다른 핸드폰에 찍혀서 퍼집니다. 저는 차마 승리하라고 응원할 수가 없고, 그 누구도 죽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최대한 덜 다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반드시 이 사태에 책임을 지는 결과를 흑인들이 만들어내길 바랍니다. 불과 몇년 전에 이와 똑같은 사건이 벌어져서 참담했던 기분을, 지금 또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겹습니다. 이 폭력은 질리지도 않고 속편이 나옵니다. 제발 그 텀이라도 길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003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9034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9336
112537 뭔가 큰 변화가 이루어 지고 있는 것 같아요.-BLM 시위 [9] 애니하우 2020.06.11 1134
112536 부디 [2] astq 2020.06.11 597
112535 8년 전 뉴욕 맨하탄 지하철에서 흑인에게 선로에 떠밀려 사망한 한인 사건 기억하십니까 [16] tomof 2020.06.11 1800
112534 빌 앤 테드의...그러니까 엑셀런트 어드벤처 3편 예고편을 봤는데요 [9] 부기우기 2020.06.10 618
112533 일상잡담들 [2] 메피스토 2020.06.10 443
112532 덥군요 [9] 예상수 2020.06.10 689
112531 끝이 뻔한 일이 있을때 어떻게 하시나요? [10] 하마사탕 2020.06.10 982
112530 [듀나인] B4나 A3 인쇄 및 복사 가능한 가정용 프린터 있나요? [5] underground 2020.06.10 5765
112529 매일 등교하는 초등학교도 있나봐요... [4] 가라 2020.06.10 768
112528 한국에도 양을 키웠군요 [4] 가끔영화 2020.06.10 623
112527 (움짤주의) 마음 따뜻한 부회장님 [4] 보들이 2020.06.10 751
112526 [초바낭] 아들이 졸업한 어린이집이 뉴스에 나왔네요 [4] 로이배티 2020.06.09 1085
112525 [팬텀싱어3] 잡담. 드디어 4중창 시작! [4] S.S.S. 2020.06.09 497
112524 '과절'이 요즘 쓰이는 말인가요? [6] eltee 2020.06.09 1063
112523 이런저런 일기...(작업, 아이즈원무비, 사우나) [1] 안유미 2020.06.09 575
112522 [바낭] 슬슬 여름이네요 + 늘금, 건강 등등 일상 잡담 [20] 로이배티 2020.06.09 1144
112521 [EBS1 다큐프라임] 혼돈시대의 중앙은행 [1] underground 2020.06.08 546
112520 위안부 쉼터 소장 [13] 사팍 2020.06.08 1704
112519 [EBS2] 홍성욱의 모던 테크, 곽재식의 미래박람회 [2] underground 2020.06.08 688
112518 영화 시(이게 벌써 10년전 영화,,,스포주의) [7] 왜냐하면 2020.06.08 1008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