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2020.04.21 17:13

은밀한 생 조회 수:704

봄바람 수준은 이미 한참 벗어난 어제오늘의 돌풍으로 덜컹거리는 문소리를 듣고 있자니 점점 심장이 두근거리고 배가 아프네요.

며칠 전 한 사람이 “그걸 어디다 말할 곳도 없고...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면서 웃는 걸 봤어요. 그의 유년 시절 일화를 좀 들은 적이 있기에 아 그렇게 외롭고 거칠었던 얘기 말고 더 깊은 상처가 있는 거구나 싶었어요. 외도로 사라진 아버지는 소식이 없고 한밤중에 삼촌이란 사람이 칼을 들고 찾아와 그와 그의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었단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서 허둥댔던 기억이 있는데. 그보다 더 깊은 상처라니 그게 뭘까 궁금해 하기도 어렵더라고요.

최근 그의 어머니가 수술을 받게 돼서 병원을 다니게 되자 유년의 그 순간이 더 떠오른다고 해요. 그리고 자식을 낳아 보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자기 부모의 행태가 이 나이를 먹도록 점점 더 치가 떨린다고. 짐짓 위로인지 공감인지 모를 대답이 잘 떠오르질 않아서 “사람이 울어야할 때 못 울고 지나가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튀어나온대요. 말해 뭐하나 하시지 말고 어디에라도 털어놔 보시죠....” 라고 말하니까 그가 쓸쓸하게 웃더군요. “시간이 너무 지난 것 같아요. 기억은 또렷한데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사실 그 얘긴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어요. 덜컹거리는 문이나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보면 떠오르는 거친 편린들이 다 거기서 비롯됐구나... 내가 그때 제대로 못 울었고 어디다 털어놓질 못했구나. 그래서 정처 없기가 이를 데 없구나. 그러다가도 아 뭐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야 그냥 살아 있으니 사는 거지 이제 와 털어놓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하죠. 왜 그랬냐고 따질 사람과 미안하다고 들을 사람이 같지만, 알면서도 왜 모른 척 했냐며 따지고 싶은 사람도 있고 분명 난 아니라며 우길 거라 예상되기도 하지만. 세월이 흘러 잡아뗀다고 있었던 사실이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꽤 자주 ‘나 상담을 한번 받아볼까’ 하는 것 같아요.

외형적으로는 사건 사고 없이 밝게 자라서 쿨하고 당당한 컨셉인데. 뭐 그렇다고 그 컨셉 들킬까 노심초사하며 장황하게 센척하는 식은 아니고. 그냥 어릴 때부터 굳이 내 상처 보여줘 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다는 생각 같은 걸 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제 어린 시절 유일한 위로였던 카뮈의 영향도 큰 것 같고. 피 철철 흐르는 팔뚝 보여주면서 같이 울어줘 하는 거만큼 끔찍한 게 어딨겠어요. 그리고 사람들은 남의 불행으로 위안 삼는 것을 참 쉽게 생각하더라고요. 딱히 악의로 가득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죠. 그래서 돈을 지불한 심리상담사에게 털어놓으면 좀 나은 걸까요? 심리상담사는 내 불행으로 위안 삼는 사람이 아니니까? 음.

정말 모르겠어요.
아무런 계기도 개연성도 없이 그냥 지 혼자 휙 나타나서 흔들어놓고 가버리는 ‘그때’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나의 양지바른 언덕에게도 말하지 못한 얘기를.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애인에게도 말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보면, 그때를 말하는 것이 오히려 나란 인간에겐 독이 되는 건가도 싶고... 그냥 묻고 잊고 외면하는 게 맞는 건지. 며칠 전 그 사람 말대로. 시간이 너무 흘렀네요. 왜 그랬냐고 소리쳐도 아무 소용 없을 그런 날이 온 것 같아요.

그냥 그때가 나타나면 아 왔니 오늘은 얼마나 흔들고 갈 거니 하면서 살아가야 하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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