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1 11:50
- 전 어제 영화를 재생한 후에도 한참을 이 영화 제목이 바바'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평가 좋은 호러 무비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쭉 안 보고 미루고 있었던 이유가 제목이 묘하게 귀여워서(?)였는데 그게 제 멋대로 착각이었던 거죠. ㅋㅋ 한글도 제대로 못 읽다니...; 암튼 스포일러는 없어요.
(봐요. 호러 영화 빌런 주제에 너무 귀엽지 않습니까)
- 첫 아이를 출산하러 차를 몰고 병원에 가던 행복한 부부가 교통 사고를 당합니다. 훈훈한 비주얼의 남편은 대사 한 마디 없이 사망했지만 아내는 무사히 병원에 실려가서 아이를 낳았어요. 결국 남편 제삿날이 아들 생일날인 셈이죠. 세월은 7년이 흘러 그 때 태어난 아기는 늠름한 초딩이 되었지만... 살짝 문제가 있습니다. 늘 괴물, 유령에 집착하고 언젠가 괴물로부터 엄마를 구하겠다며 고스트 버스터즈 유령 장비 같은 걸 만들어서 메고 다니죠. 사회성도 떨어져서 이 학교 저 학교마다 문제를 일으키며 옮겨다니구요. 그 와중에 양로원에서 노인들 보살피며 간신히 먹고 사는 우리의 주인공은 인생이 너무나도 힘들고 피곤합니다. 그나마 이 분의 삶을 붙들어주는 게 너무나도 엄마를 사랑하는 아들의 존재이긴 한데, 사실 이 놈은 동시에 아주 거대하고 무거운 혹덩어리이기도 하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책 읽어주는 걸 좋아하는 아들놈이 어디서 굴러온지도 모르겠는 '미스터 바바둑' 이야기 팝업북을 들고 와서 읽어달라고 하는데, 대충 '부기맨' 이야기와 비슷하지만 왠지 소름이 끼치고. 이 책을 읽은 후로 집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아들놈의 상태도 격하게...
- 큰 틀에서 보면 아주 뻔한 이야기죠. 갑자기 닥쳐온 미지의 공포로부터 하나 뿐인 자식을 지키려는 엄마의 투쟁!!! 그리고 정말로 이야기 자체도 미리 준비된 그런 틀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게 전개가 됩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필살기가 하나 있었으니... 철저하게 이 '엄마'의 심리를 따라가면서 아주 사실적으로, 그럴싸하게 묘사한다는 겁니다. 분명히 '모성'이 중심 소재 중 하나이긴 한데 접근하는 시각이 다르구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되기 전의 거의 한 시간 정도를 (총 런닝타임은 90분 남짓입니다) 주인공이 직장에서, 엄마들 커뮤니티에서, 그리고 집에서 애를 돌보는 일에서 겪는 고난과 역경들과 엮어서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그리고 그 상황들은 모두 재난이면서 아주 현실적인 재난이죠. 정말로 두통이 날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후의 본격 대결보다 더 무섭기도 하구요. ㅋㅋ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의 결론은 '이게 다 아들놈 때문이다' 거든요. 따지고 보면 애초에 남편이 죽은 것도 애 낳으러 가는 길이었고, 또 주인공이 그렇게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냥 혼자 살고 있다면, 혹은 애 없이 재혼이라도 했다면 충분히 유유자적 라이프를 즐길 수 있겠죠. 아들만 사라지면 간단합니다. 뭐 그 애를 만들기로 한 건 본인의 선택이었겠지만,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요? 이제라도 본인 행복을 챙겨보려는 게 과연 그렇게까지 나쁜 선택일까요. 어차피 영화 초반부의 주인공 상태는 '이번 생은 망했어' 이고 이대로 쭉 가면 아들도 그리 행복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 그리고 다행히도 이런 주인공의 처지, 심리 묘사가 전체적인 '바바둑 이야기'와 잘 붙어서 자연스럽게 전개가 됩니다. 메시지 따로, 호러 따로 진행하는 그런 게으른 각본은 아니에요. 오히려 전반부에 알게 되고 공감하게 된 주인공의 처지가 후반부에 스릴과 공포 요소로 작용을 하죠. 특별할 거 없어 보이면서도 상당히 잘 짜여진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 또 한 가지 차별점이라면... 뭐랄까. 편집의 타이밍이나 음악을 쓰는 방법 같은 게 보통의 헐리웃산 영화들과 다릅니다. 뭔가 되게 스타일리쉬하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호흡이 좀 달라요. 그런 생소한 느낌도 작품의 개성 살리기와 공포 분위기 조성에 일조를 해주구요. 다 보고 나서 좀 검색을 해 보니 이 감독 양반이 연출을 라스 폰 트리에에게 배웠다고 하던데. 뭔가 수수께끼가 좀 풀린 느낌이었습니다. ㅋㅋ 맞아요 좀 그 쪽 스타일 느낌이었네요.
- 주인공 역할의 배우가 연기를 참 잘 하더라구요. 처음 뵙는 분인데 딱 보는 순간엔 '키어스틴 던스트?'라고 몇 초 정도 착각을 했죠.
하나도 안 닮았다고 느끼셔도 정상입니다. 제가 늘 엉뚱한 사람들 두고 닮았다고 혼자 우기는 사람이라....;
저는 그냥 '라스 폰 트리에한테 연출 말고 배우 취향까지 배웠나봐'라고 혼자 생각하며 혼자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근데 사실 '호러' 무비로서 진짜로 이 영화를 살려내는 건 아들 배우입니다.
어린 배우에게 몹쓸 소리지만, 무섭습니다(...)
아니 정말로 영화를 보는 내내 아들이 제일 무서웠어요. ㅋㅋㅋ
어린 배우이다 보니 영화 내용을 순화된 버전으로 뻥쳐서 가르쳐 줘 놓고 이게 어떤 상황인지 설명을 잘 안 해주고 찍었다는데,
연기를 잘 못 해서 그런지 자꾸만 튀어나오는 어색한 표정에 저 창백한 느낌의 메이크업이 어우러져서 그 느낌의 총합이 참으로 ㄷㄷㄷ했네요.
미안합니다 어린 배우 양반.
- 대충 종합하자면 그렇습니다. 어마어마한 공포감 뭐 이런 것까진 아니어도 충분히 잘 만든 호러물이구요.
그동안 게으르게 그 밥에 그 나물로 변주되던 '모성'을 다룬 공포 영화에 나름 좀 다른 관점과 디테일로 신선한 느낌을 불어넣는 데 성공했다는 느낌.
시간도 90여분 밖에 안 되니 부담 없이 한 번 시도해보실만한, 재밌게 잘 만든 영화였습니다.
호러 좋아하시는데 아직 안 보셨으면 추천해드려요.
+ 신체 손상 장면 같은 건 딱 한 번, 1초 정도 나오는데... 애초에 그리 디테일하게 보여주지도 않는 짧은 장면인데도 알뜰하게 블러를 넣어뒀더군요. 케이블 방송용 소스를 갖다 틀어주는 컨텐츠의 경우 이런 일이 있다고는 하는데 저는 처음으로 겪어서 좀 기분이 별로. 였지만 워낙 짧았고 강조되거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면도 아니었으니 뭐 그냥저냥...
++ 옆에서 덩달아 같이 보시던 가족분께선 영화가 끝나고 난 후 '저 팝업북 갖고 싶어!' 라고(...)
근데 검색을 해보니 정말로 팝니다? ㅋㅋㅋㅋ 근데 레플리카라고 적어 놓고도 600달러씩 받다니 이게 무슨... 감독 본인 사인까지 적혔다고 하는 물건은 천 달러가 넘네요. 안 사요. ㅋㅋㅋㅋ
+++ 감독님이 배우로 활동하던 분이라 출연작을 훑어봤는데 '꼬마돼지 베이브2'가 눈에 띄는군요. 음. 거기에 대체 무슨 역할로 나오신 거죠. 구글 이미지 검색으로는 안 나와서 imdb를 보니 그냥 한 장면 정도 스쳐가는 단역이었던 듯 하네요. 이거 집에 블루레이가 있긴 있을 텐데... 굳이 찾아볼 생각까진 안 드는군요.
++++ 도대체 주인공이 밤마다 켜놓고 보는 채널은 뭐하는 채널이길래 그런 영화들(?)만 주구장창 틀어주는지. ㅋㅋㅋ '바바둑' 디자인의 모티브를 알리고 싶으셨던 것 같은데, 그냥 좀 웃겼습니다. 아니 왜 귀신 때문에 정신줄 날아간 양반이 그런 채널에서 그런 영화를 보고 있어.
2020.05.11 12:37
2020.05.11 16:36
아. 유전의 그 분을 말씀하시니 음... 아무래도 그 분이 더 기분 나쁘긴 했던 것 같은 느낌이? '바바둑'의 어린이는 그에 비해 좀 경박(?)하거든요. ㅋㅋ
닮은 배우 지적에 공감을 받다니 정말 기쁩니다. ㅠㅜ
2020.05.11 12:42
2020.05.11 16:37
사실 유령 이야기 껍데기 속에 담겨 있는 핵심 이야기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다 보고난 후에 생각을 정리해봐도 (스포일러라서 여기 적진 못하겠지만) 노골적으로 그런 주제를 다루는 이야기가 맞기도 하구요.
2020.05.11 13:05
말씀하신 생소한 호흡이랑 장르적인 재미가 좀 떨어지는 부분때문에 기대보다는 별로였습니다ㅠ 보기 전에 여러곳에서 호평밖에 못봐서 음청 기대했었거든요..
근데 거꾸로 이야기하면 좋게 본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영화이니ㅎㅎㅎ
이 감독의 후속작 "나이팅게일"이 복수물이던데... 복수물 좋아해서 궁금합니다ㅎ 아마 그것도 평범한 장르물은 아니겠죠?ㅎ
2020.05.11 16:38
아마 무서움이나 재미 측면보단 '모성' 이야기에 대해 현실적이면서도 신선한 시각을 디테일하게 보여준 게 호평에 일익을 담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전 그래도 재밌게 봤습니다. ㅋㅋ
'나이팅게일'은 또 뭐죠. 넷플릭스에 있나요. 그것도 봐야 하나...;;
2020.05.11 14:24
몇년간 본 공포영화중에 가장 무서운 영화였어요
초중반 이후부터는 저 아이 얼굴만봐도 공포와 스트레스가 몰려왔어요
오멘 이후로 가장 무서운 아이였습니다.
저 아이가 악령에 씌이지 않은 그냥 인간이라는게 더 무서웠어요 ㄷㄷㄷ
2020.05.11 16:38
ㅋㅋㅋㅋㅋㅋ저보다 더 잔인한 말씀을! ㅋㅋㅋ
그래도 공감하는 분을 만나니 신나네요. 정말 무서웠다구요 저 아이. ㅋㅋㅋ
2020.05.11 14:25
2020.05.11 16:39
아뇨 못봤습니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좋게 보신 것 같네요.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2020.05.11 14:36
어떤 분은 무섭다 하시고 어떤 분은 안무섭다 하시고.. 후기는 재밌어 보이는데요? 어쨌든 9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적절하네요. 어둠의 여인과 바바둑 봐야겠어요.
2020.05.11 16:39
네 시간이 짧아서 혹시 맘에 안 드셔도 인생의 큰 낭비는 안 된다는 게 또 장점입니다. ㅋㅋ 한 번 보세요.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2020.05.11 15:19
2020.05.11 16:39
배우 닮은 꼴 지적에 두 분이나 공감을 표해주시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ㅠㅜ 공감 감사합니다.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