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자이고 한국에서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다른 여성들처럼- 크고 작은 성추행을 아주 많이 겪어봤습니다.


성기 노출하고 핸드잡하는 바바리맨은 중학생 시절부터 십몇년간 너무 흔하게 발에 채일 정도로 만나봐서 나중에는 무덤덤해졌고요. (거시기 발기해봤자 쟤는 별로 크지도 않구만 하고 지나가는 수준으로) 좀 큼직큼직한 일만 열거하자면 중학생 시절, 여름 하복을 입고 집 근처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반대편에서 건너오며 노골적으로 제 가슴을 움켜쥐더니 다시 아무렇지 않는 듯 지나가던 중년 남자라든가, 고등학생 때 지하철에서 제 엉덩이에 성기를 부비던 양복입은 남자. 대학생 때도 지하철에서 허벅지 엉덩이 만지기는 심심찮게 겪었죠. 직장생활하면서는 거래처 사장에서 술자리에 기습적으로 포옹당하고 키스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사촌오빠에게 당한 성추행은 너무 더러운 기억이라 그냥 타이핑하기도 싫습니다.


저는 위의 경우들에, 그 자리에서 즉시 큰소리로 항의하거나 경찰을 부르거나 그 남자를 때리는 등의 격한 리액션을 보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어요. 제가 유약한 성격이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데도요. 어린 시절에는 뭐가 뭔지 잘 몰라서, 당황스럽고, 얼떨떨해서, 상대는 어른이고 나는 어린애라서, 친족간이라서, 이때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지 구체적으로 교육(네. 이런 건 교육이 필요한데 미성년자 시절에는 아무도 가르쳐주질 않았죠. 대학 올라와서 여성학 세미나를 듣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예요)받지 못해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사회인이 되어서 겪은 성추행은 하필이면 밥그릇이 걸린 문제라 이 일을 회사 내에서 시끄럽게 만드는 순간, 제 책상이 치워지거나 최소한 앞으로 이곳에서 일하는 데 너무나 골치아파질 게 뻔해서 가만히 있었고, 그러고도 속병이 나서 끙끙 앓다가 몇개월 뒤에 그냥 다른 직장으로 이직했습니다. 이렇게 쓰고보니 이런 경험들 와중에도 남성 일반에게 혐오감을 품지 않고 연애 잘하고 잘 살아온 제가 대견합니다. (저기 아래에 보니까 어떤 남자분은 25년 넘게 비자발적 동정이라고 다른 남자와 자는 여성 일반에게 폭력적인 혐오감을 표출하시던데 말입니다...-_-)


제가 처음으로 약하게나마 반항해본 게 대학생 때였는데, 상대는 제 허벅지를 집요하게 건드리던 술취한 중년남자였고 저는 "그만 좀 하세요. 계속 이러면 경찰 부르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나름 속으로는 덜덜 떨면서) 말했죠. 그렇지만 상대 남자는 이 미친년이 생사람 잡는다고 펄펄 날뛰었고 저는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심정으로 옆칸으로 옮겼는데 그 칸까지 따라와서 제게 삿대질을 하고 "이걸 콱..."하는 식으로 주먹을 위협적으로 쳐들고... 소란스러워졌습니다. 그런데 제게 더 공포스러웠던 것은 주변에 사람도 제법 많았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더라는 사실이었어요. 결국 그 남자는 저를 비웃으면서 다음역에서 유유히 내렸고 제 기분이 어땠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사람들이 구경만 하지 안 도와준다. 무관심하게 지나친다. 이 경험은 그후에도 또 비슷하게 이어졌는데...


직장인이 되어서입니다. 퇴근길에 술취한 중년 남자가 제 앞을 막아서며 자기랑 한잔 하자고 제 손목을 아주 강하게 잡더니 어디론가 끌고 가려는 겁니다. 통행이 많은 시내 번화가였고. 늦은 시간도 아니었고, 저는 옷차림이 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와 그 남자의 실랑이를 보면서도 아무도 안 도와주더군요. 남자든 여자든. 저는 핸드폰으로 112에 신고했지만 당장 5초 후에 경찰이 나타나는 건 아니지요. 제가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핸드폰을 쥐고 경찰과 통화하고 있는데 그 남자는 제 뺨을 때리더니 이런저런 욕을 내뱉으며 다른 길로 가버렸습니다. 경찰은 10분 뒤에 나타났고요. 경찰이 오기 전에 제가 뺨을 맞은 것과 이런저런 충격이 겹쳐서 멍하니 서 있는데 어떤 남자가 슬쩍 다가오더니 "아가씨.. 아까 그 사람. 남자친구 아니었어요? 난 애정싸움인지 알았지..."하고 말을 거는 겁니다. 경찰이 왔을 때 그 남자가 증언 비슷한 것도 해주었고요. 


글쎄요. 제가 그때 저를 때리고 희롱한 그 남자 뒤를 쫒아서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고 경찰이 올 때까지 몸싸움을 벌이는 게 옳았을까요? 저는 근육이 없고, 육체적 완력이 정말로 약한 편에 속하고 그때 제 손목을 잡고 놓지 않던 그 남자 손아귀의 힘이 너무 대단해서 무서웠습니다. 뼈 하나쯤 부러질 각오 안 했으면 그를 잡아두지 못했겠죠. 나중에 보니 잡혔던 손목이 새빨갛게 부어있더군요. 무엇보다 저는, 이 남자를 (폭력의 무서움을 무릅쓰고 홀로) 잡아서 경찰에 인계해봐야 그가 '벌금 십여만원' 수준으로 끝날 거라는 사실을 직간접적 경험으로 너무나,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저를 때린 남자에 대한 분노보다 더 컸던 것은 위험에 처한 저를 보면서도 번화가 길거리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였습니다. 예전의 사람 많은 지하철 내에서처럼요.


그런 식으로 '고발' '고소' '폭력적 리액션'보다 제가 살아오면서 서서히 체득하게 된 것은 '무감각함'과 '효율적인 회피'였습니다. 지금도 바바리맨을 보지만 이제는 그냥 전봇대처럼 길가의 풍경일 뿐이고요, 어차피 이런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다가올 용기를 내지 못하는 부류인 걸 알기 때문에 무섭지도 않습니다. 그냥 빠른 걸음으로 거길 지나쳐버립니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에서 성추행의 기미를 감지하면 조금 큰 동작으로 그 자리를 벗어나 다른 장소로, 가급적이면 다른 칸으로 옮깁니다. 그것도 안 되면 내릴 정거장이 아니라도 내렸다가 다음 차를 탑니다. 회사에 10분 지각하는 한이 있어도요. 일 관계에서 성추행이 있어도 그게 언어적인 수준으로 그치면 그냥 못 들은 척 넘기고, 육체적인 무언가로 갈 만한 소규모 회식이나 술자리는 전혀 만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저는 가끔 성희롱이나 성추행의 상황을 만납니다. 나이들고 외모가 바래도 여전히 여성에겐 그런 상황이 찾아오더군요. 작년에도 두 번 있었고요. 둘 다 술 취한 남자였습니다. 하나는 한국남자. 하나는 외국남자. 이제는 그 사람들 자체에 대해서 상처를 받지는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저를 궁극적으로 상처입히는 것은 그 사실을 두고 반응하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일 뿐입니다. 뻔히 저와 그 남자를 바라보면서도 저를 도와주지 않던 사람들, 제가 겪은 봉변을 이야기했을 때 "거짓말하지 마라"라고 하던 어머니, 제가 당한 성추행을 이야기했을 때 "바보같이 반항을 제대로 안 한 네 책임도 크다"라고 말한 남자친구. (결국 이 남자하고는 그래서 헤어졌습니다)


이번 신도림 성추행범 뉴스를 보면서도 화면 속 그 남자에게 분노가 느껴지진 않았는데 (그래. 저 놈 곧 잡히겠지. 얼굴도 팔렸으니..하면서 고소함은 있었지만) 그 뉴스의 댓글이나 다른 커뮤니티에서 이 뉴스를 퍼온 게시물에 달린 댓글에서 남자들이 "술에 떡이 될 정도로 마시는 여자도 잘못..." 운운하는 댓글은 정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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