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5.25 10:23
지난 주에 박정현의 '조금 더 가까이' 콘서트를 보러 LG아트센터에 다녀왔습니다. 스트레잇임에도 불구하고 박정현 이야기만 나오면 눈에서 하트가 쏟아져 나오곤 하는 지인 한 명이 있었는데, 저도 막연한 호감만 조금 가지고 있다가 나가수 프로그램을 통해서 좀 더 자세히 알게 된 김에 표 두 장 질러서 같이 다녀왔습니다. 부산에서도 같은 제목으로 콘서트를 한다고 하는데, 보러가실 분은 이 글이 스포일러가 될테니 읽지 않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나가수 프로그램을 통해서 진지하게 관심을 갖기 이전, 박정현에 대해 갖고 있던 독특한 인상이 있었습니다. 얇은 목소리로 비교적 세련된 가요를 얌전하게 부르다가 마지막 부분에는 목이 터져라 폭발하는 게 확실히 다른 여자 발라드 가수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는데, 얇은 미성과 후반부의 애드립 양쪽 모두가 독특했어요. 그래도 그런 스타일이 저에겐 크게 와닿지는 않았었고 박정현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얌전하고 세련되었지만 열정적인 그런 면을 좋아하나보다 하고 생각했었죠. 콘서트 표 지르고 나서 예습한다고 그동안 냈던 음악들을 쭉 들어보기 전까지는, 그 얌전함과 열정의 괴리가 획일적인 한국 대중 음악 형식에 자기가 원하는 음악을 담기 위한 고군분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습니다.
콘서트 시작하자마자 공연장 환경에 제 귀가 적응을 못했던건지 너무 큰 음량 때문에 좀 힘들었고, 여유있는 멘트들에 비해 음악은 조금 급하게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4~5곡 지난 이후부터 귀에 꽉 차게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그 때부터의 공연은 기대치를 꽉 채우고도 남더군요. 좀 극성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팬들과 매번 콘서트 할 때 마다 또는 심지어 5회의 콘서트 중 두 번 이상을 보러 간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될 정도로.
가장 인상깊었던 멘트들 중의 하나가 공연 준비하기 위해서 집에서 종이를 앞에 놓고 프로그램을 먼저 짠다는 이야기였는데, 꽤 스케일이 큰 공연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개인적으로 뼈대를 짠다는 면에서 이 가수가 가진 음악 세계가 매우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분 음악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요. 듣고 싶은 노래들이 빠졌다는 아쉬움이 담긴 후기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동안 꾸준히 일곱장의 앨범을 발매하면서 꽤 많은 곡들이 쌓였나봅니다. 그 중 3~4 곡씩을 묶어서 선곡하고 선곡 이유를 설명하는 형식으로 콘서트가 진행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하비샴의 왈츠-몽중인-사랑보다 깊은 상처"로 이어지는 선곡, "Puff"와 "꿈에"를 이어 부르던 부분, 콘서트의 엔딩이었던 "만나러 가는 길-P.S I Love You" 그리고 앵콜 첫 곡이었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였습니다.
박정현의 음악에 푹 빠진 사람들의 인터뷰 영상이 나와서 관객들이 잠시 웃은 후 하비샴의 왈츠가 시작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천장에 새장이 몇 개 달려있는 붉은 조명의 무대 위에 스크린 뒤로 박정현과 남자 무용수 두 명의 실루엣이 보이면서 노래가 시작되었고 굉장히 다이나믹했어요. 세 곡은 피아노 반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애잔한 분위기와 큰 스케일이 공존하는 멋진 무대였죠. 이번 공연에서 최고라고 할 만한.
박정현이 혼자 부른 사랑보다 깊은 상처는 이번 콘서트에서 거둔 의외의 큰 수확이었습니다. 전 임재범의 솔로 버전 '사랑보다 깊은 상처'는 가요가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과 울림의 정점을 보여준 노래라고 생각해요. 사실 박정현과의 듀엣 버전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곡을 부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누군가 게스트가 나와서 듀엣을 할 지 혼자서 부를 지 별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고, 여자 혼자서 부르는 사랑보다 깊은 상처가 임재범 버전의 원곡 같은 울림을 느끼게 해줄 거라고는 전혀 기대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임재범 특유의 금속성 울림이 어떻게 박정현 목에서 나오는거죠. 너 콘서트 티켓 값 내고 이 곡 하나만 다시 들을래 해도 아마 돈내고 듣고 싶을 것 같아요. 열심히 검색을 해서 제가 갔던 날의 사랑보다 깊은 상처를 팬이 녹음한 것을 발견했는데 다시 들어봐도 그 때의 느낌이 전해지더군요. 노래가 끝난 후, 이 노래를 혼자 부르면 사람들이 중간에 남자 게스트가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는 설명으로 웃음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Puff-꿈에"를 이어서 부른 후에 "꿈에"의 호응이 좋자 "꿈에 많이 듣고 싶으셨구나"라는 농담을 한 후, 자신이 들려주고 싶은 노래와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노래를 이어서 불러봤다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Puff" 라는 곡에 대해서는 두 번이나 자신이 쓴 곡이라고 강조를 해서 재미있었는데, 인트로의 한국어 가사는 원곡에 없던 부분이고 콘서트를 위해 새로 썼다고 하더군요. 뒤이어 부른 "꿈에"에 비해서는 객석 반응이 크지 않았지만 제 기억에 이번 콘서트에서 가장 뜨거웠던 공연이 아니었나 싶어요. 제가 '콘서트'라는 단어에 뭔가 기대를 한다면 바로 이런 음악일테지만, 이런 곡의 비중을 더 늘이지 못하는 사정을 이해할 것 같기도 합니다. "꿈에"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아여~ 우워우아아앍~ 우워우워우워우예예~" 이 부분이 없어서 좀 서운했다는 후기들도 눈에 띄는데 이번 공연의 깔끔하고 잘 다듬어진 버전의 꿈에는 꽤 듣기 좋았습니다.
공연 막바지에 "만나러 가는 길" 이라는 노래는 어쿠스틱 기타 (정확한 기타의 종류는 파악을 못했지만 어쨌든 어쿠스틱한) 한 대의 반주에 맞춰서 불렀는데 아주 좋았습니다. 기타 연주자 분의 깔끔하고 담담하고 안정적인 기타 연주도 특별히 언급해두고 싶을 정도로 인상깊었습니다. 마지막 곡 P.S I Love You 는 사랑보다 깊은 상처와 더불어 팝적인 느낌이 목소리랑 잘 어울려서 너무 좋았고, 앵콜 첫 곡은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였는데 "TV로 듣는 것과 현장에서 듣는 것이 확연히 다르다"는 사람들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 무대였습니다. TV나 음원으로 들을 수 있는 건 그냥 그림자에 불과했던 게 정말 맞구나.
마지막 앵콜 곡은 "좋은 나라"라는 시인과 촌장 곡이었는데 매 공연 때마다 앵콜로 이 곡을 부른다고 하더군요. 박정현이 맨 앞에 계신 여자분에게 가사를 아냐며 마이크를 넘기자 한 소절을 완벽하게 열창하셨는데, 떨리는 목소리에서 어딘가 종교적인 분위기까지 느졌습니다. 사실 이 노래의 후렴구를 부르면서 박정현이 중간 중간에 추임새를 넣을 때도 개그콘서트의 '이희경 권사님'이 연상되어서 웃겼는데, 이 노래의 원곡자인 하덕규가 ccm 가수로 활동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박정현의 지향점이 뭔지 알 것 같았고, 콘서트 분위기가 고조되는 마지막 순간이 되니 그런 본색(?)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게 당황스러우면서도 재미있더군요.
마지막으로, 그날 게스트로 박재범이 나왔었어요. 여기 박재범 좋아하시는 분들도 계실테니 잠깐 말씀을 드려보자면 "Nothing on You"와 "Abandoned" 두 곡 불렀고 무대 좋았고 중간에 멘트도 잘 했습니다. "박정현과 개인적으로 친한 건 아니고 평소에 좋아하는 가수이기 때문에 일 들어왔을 때 바로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고, "개인적으로 친한건 ... 아니다"는 말과 "일 들어왔을 때"라는 표현 때문에 관객 웃음 터졌고,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수줍음을 타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아주 열광적이진 않아도 호의적인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11.05.25 10:36
2011.05.25 10:39
2011.05.25 10:55
2011.05.25 12:07
2011.05.25 12:54
2011.05.25 13:04
2011.05.25 13:23
2011.05.26 1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