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친정엄니가 한복장이셨기 때문이에요.

엄니는 우리 동네에서 10년동안 한복집을 하셨었습니다.

"세모시~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하는 가곡에서 따온 가게이름의 한복집이었어요.

 

어린시절 저는 매일 하교하면 엄니 가게로 달려가곤 했었지요.

가게에는 마네킹이 하나 있었고, 쇼윈도우엔 예쁘게 한복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복주머니와 꽃신이며 작은 매듭노리개 같은 것들을 진열장에 늘어놓았기도 했고요.

 

요즘엔 결혼 할 때 한복을 하는 것이 조금은 사치에 가까운 풍습이 되었지만, 그 때 당시만 해도 시집가는 새색시들이 한복집에 한복을 지으러 오는 일은 거의 통과의례였습니다.

그덕에 어린 저는 새색시들을 뒤켠에서 많이도 봤었지요.

다들 예쁘고 젊디 젊은 날에 결혼이라는 가슴뛰는 행사를 치룰 생각에 볼이 발그레 할 정도로 상기된 모습들이었다 기억합니다.

 

우리 엄니가 인디안핑크나 철쭉빛 우아한 원단을 꺼내 놓고 좌르륵~하고 펼치면 그 특유의 한복지 내음이 은은하게 퍼지면서 이를 지켜보는 새색시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었습니다.

예쁜 자수를 소개하거나, 아가씨들이 좋아하는 복주머니 모양 핸드백을 꺼내 들어 보여주는 엄니의 손길 하나하나에 색시들의 눈은 경이로움으로 바뀌곤 했었지요.

 

저는 어린시절 대부분을 이런 엄니를 보고 자랐습니다.

한복이란 저에게 일상복같은 친근한 옷이었고, 저와 저보다 한살 어린 제 친척여동생은 철마다 새 한복을 얻어입고 둘이 나란히 손을 잡고 시골집에 가서 뽐을 내곤 했었어요.

 

이런 엄니에게 한복장이로서의 일생일대 큰 과제가 있었으니, 바로 저와 제 오빠의 결혼 한복이었습니다.

저는 작년에 시집을 갔지요.

엄니는 이제는 한복집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원대한 계획과 특유의 집요함으로 제 한복을 직접 지어내셨습니다.

 

그래서 완성된 옷이 이겁니다.

 

 

(오그라드는 웨딩촬영컷이지만 한복이 제일 잘 나왔으므로...)

 

새색시 한복이라고 외치고 있는 녹의홍상이에요.

자세히 볼 순 없으시겠지만, 원사에 모란꽃 무늬가 들어있습니다. 녹의 소매 끝에는 금사로 모란 수를 놓았어요. 새색시라 자수는 최소한으로..

엄마의 욕심으로 인해 결혼식날 입고 장롱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한복은 값이 꽤나 나가는 천들로만 만들었습니다.

 

 

 

 

같은 원단으로 무려 배자까지 지어주셨어요.

은실로 나비무늬 자수를 놓았습니다.

남편 한복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팥색의 풍성한 바지는 평소 입던 츄리닝 바지보다 편하다고 했어요.

같은 자수로 조끼 앞섬을 장식해서 짝이라는 표시를 단단히 해두었습니다.

 

남편은 한복이 너무 맘에 든다고 벗기가 싫다고까지 했었어요.

남편에겐 생애 첫 한복이었습니다.

장모님의 사랑이 막 느껴지는 첫 한복을 입고 설레하던 얼굴이 기억나는군요.

엄니에겐 그것도 자부심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엄니의 다음번의 큰 과제는 이제 10월이면 돌이 되는 손녀에게 세상에서 제일 예쁜 돌복을 입히는 것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작은 조바위를 씌울 생각을 하고 계시겠지요.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신라호텔에서 한복입은 사람을 출입금지 시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굉장히 슬퍼졌습니다.

그래도 한복은 전통의상인데요.

불편하고, 사치스러워 보이고, 쓸모없어 보여도요.

한복을 입고 즐기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한복은 아름다운 우리옷일진데...

반평생 한복장이 딸은 그래서 조금 슬펐습니다.

예뻐해 줬으면 좋겠어요. 한복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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