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31 11:34
'더 프랙티스' 3시즌 중반을 보고 있어요. 그리고 벤야민 평전을 몇 페이지씩 찔끔찔끔 읽고 있고요. 아마 그래서 이런 밑도끝도 없는 잡생각을 하나 봅니다.
현실에서 어떤 사람의 범죄 행위가 일어납니다.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개별 인간의 행위란 점에서 유일무이한 사건일 수 있어요. 수백 가지 요소들이 작용한 매우 우연적이고 물렁물렁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경찰이 수사하고 사건이 되고 변호사, 검사들이 붙어서 재판을 하면서 우연과 물렁물렁함은 어떤 형태를 갖춥니다. 어떻게든 기존의 케이스를 찾고, 아는 지식으로 분류를 해서 유무죄와 형량을 정할 수 있는 형태를 만듭니다. 그 특정한 형태로 갖추어진 사건이 판결을 받습니다.
이렇게 판결을 받은 실제 사건은 1차로 다듬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작진에 의해 어떤 사건이 선택되어 드라마가 만들어지면서 2차로 다듬어집니다. 쳐내고 잇고 붙이고 드라마 캐릭터의 허구적 성격도 더하여 현란한 언어적 공수로 재무장된 사건사례가 되는데, 두 번 다듬어진 그것을 우리는 시청합니다.
저는 책, 영화, 드라마로 현실을 배운다는 생각을 합니다. 재미도 중요하지만 현실 경험과 감각이 부족한 저에게는 책과 영화가 배움의 통로로도 큰 역할을 하니까요. 하지만 이는 참 허약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책, 영화, 드라마에서 제시되는 것은 현실인 것처럼 정제된 가공된 무엇이라고 해야 맞겠죠. 현실에 대한 견해라고 해야 맞겠습니다. 하지만 '배우다' 라는 단어를 쓰자면 허약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실 자체는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닌 거 같아요. 말로 옮기는 순간 많은 것이 빠져나가고 애초에 말로 옮길 수 없는 것들도 많고요. 느끼고 체험할 수는 있겠지만요. 글로든 영화로든 써야만 배울 수 있는 무엇이 될 거 같아요.
글도 영화도 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대부분의 날을 그냥 치이며 사는 저 포함 많은 이들이 반복 실수의 날을 보내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느끼고 체험한 것에 대한 생각을 써야 배울 가능성이 생기는 거 같습니다. 다른 배움의 가능성은? 명상, 묵상, 기도 같이 물리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고 뇌에 아로새겨 쓰는(비우는) 것? '극장전'에선가 김상경이 생각, 생각을 해야 한다, 인가 비슷한 대사를 했던 것도 떠오르네요.
글이든 영화든 열심히 보기라도 하자 싶네요. 돌고돌아 결론은 언제나 비슷합니다. 내 우주가 그렇죠 뭐.
2023.10.31 15:44
2023.10.31 18:03
본인의 체험이 위험한 것도 맞아요. 체험한 걸 최우선 가치로 두다 보면 '나 때는 말이야' 혹은 '내 경험으로 책 한 권 쓰는 건 일도 아닌데 글재주가 없어서' 이런 소리 나오게 되니까요.ㅎ
그런데 때로 책이나 영화로 간접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짜 내 힘이 되어 주는지 의심이 될 때가 있어요. 취미를 넘어서 기대할 때, 실제로 사는데 필요한 힘으로 남았는지.
그래봤자 다른 방법도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걸로 잘 해 보는 수밖에요.ㅎㅎ
2023.11.01 14:27
남이 필터링하고 정제해서 전달해주는 경험이라 할지라도 그게 진정으로 내게 유익하다면 문제가 없을 텐데. 사람이란 게 결국 이런 걸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데에도 본인 취향을 적용할 수밖에 없는 동물인지라... 허구헌날 호러 영화만 보는 저 처럼요. ㅋㅋㅋ
데이빗 E 켈리 말빨이 참 죽여준단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앨리 맥빌'을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희한한 상황들을 법정으로 끌고 들어와서 코미디를 하는데 그 코미디의 와중에도 늘 최종 변론은 마음에 와 닿고, 특히 '말이 안 되는 얘긴데 말이 되네?' 라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죠. 어린 나이에 불치병에 걸린 아이가 신을 고소하는 사건이라든가, 유니콘 환상을 본 아저씨가 직장에서 잘리는 걸 변호해주는 이야기라든가... 대표적인 것들 몇 가지 있는데 다 막 이입되고 공감돼서 미국식으로 배심원제 재판을 하는 곳이라면 케이지&피쉬 사의 변호사들 승률도 꽤 괜찮겠다 싶었죠. ㅋㅋ '프랙티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서 아무 말 해봤습니다!
2023.11.01 20:57
사람이 두루 넓기는 어려운 일인 거 같아요. 본인 취향을 가지고, 들고 있는 패를 가지고 잘 해 보는 게 최선일 거 같아요. 본인 취향을 모르는 사람도 많은데 그에 비하면 로이배티 님은 복받으신 겁니다!
프랙티스는 고정 출연자들 가지고 이리저리 엮고 서로 싸우기도 하고 개인사건도 끼워넣고 하는데 아직까지는 계속 보고 있어요. 더 뒤로 가면 다른 드라마처럼 힘이 빠질지 모르겠지만요. 아니나다를까 그 제작자가 변호사 출신이더군요. 이 사람도 꽤 유명하던데 맨날 뒷북치고 있습니다.ㅎㅎ
말씀하신대로 이미 가공된 진실, 그리고 책이나 영화 같은 매체를 통한 간접적 체험으로만 접할 수 있는 진실은 세계를 이해하는데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필연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슬프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본인이 직접 체험하는 것조차도 본인이라는 필터를 거친 진실이기에 차라리 더 훈련되고 더 의지가 충만한 이들이 전달하는 진실을 간접적으로나마 받아들이는 것도 축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저런 체념속에서도 세계를 이해하려는 thoma님이 늘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