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사람

2020.03.12 17:22

은밀한 생 조회 수:1198

사람 변하는 거 쉽지 않다고 하죠.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 뭐 그런 말도 있고요. 특히나 부부 관계에 있어 인생 선배들이 주로 하는 조언에 상대방이 변하기를 기대하지 말라. 같은 내용이 많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것들 백가지를 해주는 것보다 상대방이 싫어하는데 난 좋아하는 (또는 아무것도 아닌) 그 한 가지를 고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운 일임을 세월이 흐를수록 더 절실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음 그런데 드물게 자신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그 사람을 아는 주변인들도 조금의 예상을 하지 않았던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정말 ‘다른 사람’이 돼버리는 경우요. 사소하게는 입맛 같은 것들도 그렇고. 음악이나 영화 같은 취향의 영역도 좀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고요. 요즘 제가 자주 주변에서 듣는 말은 “니가 아이돌을 좋아할 줄 몰랐다”입니다... 쿨럭. 그래서 떠오른 기억들이 있는데요.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니가 아이돌을 좋아할 줄 몰랐다 소리를 듣다가 떠오른 게 아니라, 최근 불거진 신천지 사태로 인해 떠오른 것 같기도 하네요.

제 이십대를 관통하며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있었어요. 어린 나이에 이미 업계에서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작품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죠. 사람이 어찌나 총명하고 고상한지 그 언니랑 같이 있음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았어요. 목소리도 신비로울 만큼 좋아서 은은하고 낭랑하게 퍼지는 그 목소리의 여운에 취하는 기분이었죠. 차분하고 어여쁜 자태도 정말 좋았는데..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담배를 피우고 하루 종일 담배를 펴도 신기하게 좋은 냄새가 났어요. 아기 얼굴처럼 말갛고 흰 피부에 쌍꺼풀이 없이 큰 눈. 오뚝한 코. 적당한 길이의 살짝 얇은듯한 입술,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는 또 어찌나 영롱한지.

그 언니가 얘기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기만 해도 제 마음에는 일종의 감동이라든지 설렘 같은 것이 늘 서렸어요. 어쩐지 애틋한 기분도 들었고.. 그 언니가 저를 부르던 애칭이 있었는데 “**아...” 하면서 살짝 말끝이 잦아드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물끄러미 그 언니를 바라보곤 했죠. 재능 있고 고상한데다 아리따운 젋은 예술가. 누구보다 순수했고 성실했던 사람. 그런데 그 언니가 성실하게 종교에 입문하더군요. 개신교이긴 한데 굉장히 공격적으로 포교 활동을 하는 교회였어요. 우리의 대화는 기승전우리교회안올래로 바뀌었고.... 그걸 계속 견딜 수 없었던 저는 마음의 소파 같은 한 사람을 보내야만 했죠. 신천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교회도 성령을 받은 목사를 섬기는 교회였어요. 그 목사가 기도를 하고 손을 대면 아픈 사람도 낫는다는.

저는 지금도 정말 모르겠어요. 그 언니가 왜 그런 종교에 빠졌는지. 소위 힙스터라고 불리는 무리 중에서도 순도 200%짜리 힙스터 영혼인 사람이었는데 말예요. 그러면서 한편으론 회의론자이기도 해서 종교나 샤머니즘에 무척 냉소적이었거든요. 심지어 몇몇 작가들이 협업한 프로젝트에서 동료 작가가 개신교인이란 이유로 트러블이 나기도 했었던 그 언니가.... 왜.


그 이유를 그 언니가 직접 얘기를 해줬는데, 그녀는 프랑스 시골 마을로 여행을 가서 두 달 정도 살다 온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심심해서’ 성경을 읽었다고 하더군요. 그 언니는 어릴 적부터 굉장한 다독가였어요. 그런데 그 성경을 읽다가 그만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해요. 신의 계시요. 한국으로 돌아가서 사역하라는. 저는 사실 이 부분은 믿었어요. 그 언니가 뭐 그런 걸로 사기를 치겠나요. 정말 목소리를 들었으니 들었다고 했겠죠.

암튼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언니를 저는 점점 감당할 수가 없었고, 이제는 어느 곳에서 어떻게 쓰러지든, 무엇에 슬프고 무엇에 기쁘든. 아무런 소식도 모르는 익명이 돼버렸네요. 한때는 서로를 소울메이트라 부르던 사람들이 이렇게 서로에게 익명 1이 되다니. 이 언니의 “**아..” 하면서 저를 부르는 그 목소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그리고 그 언니가 진심으로 저를 안타까워했거든요. 너도 거기서 그러고 있으면 안 되는 앤데.... 영적 허기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어.. 왜 주님을 만나지 못하니.. 하면서 대성통곡을 하며 슬퍼하기도 했죠.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저를 보면 가슴이 찢어질 거 같다고 괴로워했어요.

그녀가 들은 신의 목소리를 따라 잘 살고 있겠죠. 부디 아프지 말고 건강하길.
밥은 안 먹어도 그림을 그리는 것이 생명수와도 같은 사람인데, 물감이랑 캔버스 살 돈은 넉넉하길..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352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2774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3181
111980 연수을 후보단일화 [25] 사팍 2020.04.05 1127
111979 예전에는 파격적이었는데 [3] mindystclaire 2020.04.05 932
111978 코로나 일상 잡담2 [4] 메피스토 2020.04.05 789
111977 대구 의료진 기사들 요약. [2] 잔인한오후 2020.04.05 875
111976 진중권은 왜 이리 망가졌을까요..? [22] 풀빛 2020.04.05 2126
111975 비슷한 역을 오랫동안 맡는 배우 [6] 부기우기 2020.04.05 894
111974 일상 5. [2] 잔인한오후 2020.04.05 549
111973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타란티노가 모든 것을 다 이룬 영화 [5] ssoboo 2020.04.05 1021
111972 [총선 천기누설 4탄] 총선결과가 불러올 언론개혁 & 로켓펀치 [1] 왜냐하면 2020.04.04 620
111971 선거보조금 8.4억 싹쓸이…허경영 정당의 '수상한 공천' [2] 왜냐하면 2020.04.04 781
111970 (종료)놀면 뭐하니? 유투브 라이브/ 유재석의 '부캐의 세계3' (17시~) 보들이 2020.04.04 517
111969 진중권, 그를 지지하던 정의당, 정의당 지지자들 참 자랑스러우시겠어요 [26] 도야지 2020.04.04 1727
111968 안철수의 행복 [6] 어제부터익명 2020.04.04 1045
111967 무료 게임? - Homo Machina [1] 도야지 2020.04.04 467
111966 [바낭] 탑건: 매버릭이 개봉 연기되었군요 + 지옥의 외인부대 [8] 로이배티 2020.04.04 704
111965 이런저런 일기...(창작, 불확실한 시도) 안유미 2020.04.04 455
111964 영화가 딱히 끌리는게 없네요 메피스토 2020.04.03 423
111963 애들이 절대 재미없는 만화영화 가끔영화 2020.04.03 606
111962 예술의 전당 온라인 상영회/ 발레 지젤/ 4/3(금), 20시부터~ (120분) [1] 보들이 2020.04.03 373
111961 혹시 직장에 가서 데워먹을 수 있는 도시락이 있을까요? [17] 산호초2010 2020.04.03 1051
XE Login